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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물밑작업
미용실을 나와서 시간을 보니 어느새 여덟 시가 좀 넘어있었다.
해도 넘어갔고 많이 어둑어둑해진 느낌이었다.
아예 아쉬움이 하나도 남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즐거운 일이 충분히 많이 있었던 마음에 드는 주말이었던 것 같다.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달 전만해도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다시 직업학교를 다니고, 남는 시간을 주체할 길이 없던 날 백수였는데, 근 한 달 만에 이렇게 변하였구나.
이런 생각도 들고 마츠다씨와 처음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었던 날 -세이렌에 정식으로 들어오던 날- 생각도 났다.
그 날도 이렇게 버스 장으로 걸어가던 중이었는데 말이지.
그러고 보니까 아까 친구한테 전화를 걸려고 했던 일이 생각났다.
문득 지금 세이렌에 들어가고 나면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학생 때의 자유로운 영혼을 어느 정도 되찾은 지금이 아니라, 세이렌의 견습사원 토베 류노스케로 되돌아가고 나면 말이다.
왠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그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당장 버스 장에 가면 이번에 오는 버스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버스 안에서 전화를 하는 행위는 썩 편치 못한 행위다. 기본적인 예절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세이렌으로 들어가는 중이니 만큼 세이렌의 평판과도 관계되는 일이다.
당연히 전화를 하면 -일단 그 친구와 전화를 하면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워낙 오랜만에 연락을 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 친구 성격을 생각한다면.- 이번 버스는 놓치고 다음 버스에나 탈 수 있을까.
아직 셔틀버스의 운행시간은 꽤 여유가 있다. 아마 10시 30분에 여기서 출발하는 차까지 있을 것이다.
당장 들어가려하지 않는다면, 그 친구와 전화 한통화정도 할 시간은 충분히 있다.
나는 그 친구에게----
1. 전화를 건다.
2. 전화를 걸지 않는다.
---1. 나는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를 걸어야겠다.
어차피 한 번쯤은 목소리고 듣고 안부도 묻고 싶은 녀석이다.
세이렌에 들어가면 연락할 기분이 사라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 여기서 전화를 하면 되지 않겠는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큰길가에 적당한 벤치가 보여서 그쪽으로 걸어가서 그 벤치에 걸터앉았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그 친구의 번호를 찾았다.
‘마코토… 마코토… 찾았다.’ 카노미 마코토. 내가 다녔던 니시카노미 대학의 모회사인 중견회사 카노미 물산의 제1 후계자. 물론 다음 세대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상태인 것일 뿐,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어디까지나 일종의 시드 비슷한 개념이라고.
잘 사는 집 외동답지 않게 털털하고 서민적인 취향도 강한 녀석이다. 집에서 좋은 차를 뽑아줘도 운전하기 귀찮다면서 기차니 버스니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곤 했다.
물론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란 만큼 배배꼬인 구석도 있긴 한데, 그 배배꼬인 구석 때문에 녀석과 친해지는 계기가 된 거니.
졸업할 때, 같이 카노미 물산에 들어와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지만 당시엔 뭐든지 하기 귀찮고 대충대충 살고 싶어서 그 제안을 거절했다.
자신의 인생이 걸린 싸움을 해야 하는 친구 옆에서 설렁설렁 하면서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제대로 팟하고 뭔가를 하기에 그 당시에는 너무 의욕이 없었다.
그 일로 어느 정도 다퉜다고 해야 하나, 멀어지기는 했다.
자기 제안이 거절당할 줄은 몰랐는지 꽤 꽁하고 있어서 풀어주려고 노력은 해봤으나, 점점 마주칠 시간도 줄어들고 그렇게 흐지부지하게 됐다.
음, 역시 전화를 걸기로 마음먹은 게 잘한 생각인 것 같다.
대학교 때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이렇게 멀어질 수야 있나, 시간도 어느 정도 지났고 은근히 가벼운 친구라 이제 꽁한 것도 많이 풀렸으리라.
통화버튼을 눌렀다.
뚜- 하는 신호음이 가다가 카노미 물산의 CM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컬러링으로 지정해놓은 모양인데, 꽤 회사에 충성스러운 모습이다.
두 번, 세 번, 네 번…
신호음이 이어지다가 찰칵하는 받는 음이 들렸다.
“류노스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에서 마코토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대쪽에서 챙하는 소리도 들리고 호탕하게 웃는 아저씨들이나 깔깔거리는 아가씨들의 웃음소리도 간간히 들려왔다.
회식 중 인걸까?
“어, 지금 통화할 수 있어?”
“당연하지, 좀 만 기다려봐.”
마코토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 소란스러운 소리는 더욱 커졌다.
‘에이, 어딜…’
‘…가세요? 호호 한잔 더…’
‘지금…급한 전화…’
‘결혼한…아니면서 무슨 급한…에요, 빨리…. 제 마누라가… 찾기에…차에 놓고…’
잘 안 들려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전화를 받으러 나오려다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지당한 느낌이다.
내 전화가 그렇게 급한 전화는 아닌데….
“야, 류노스케.”
“응, 바쁜 것 같은데 다음에 다시 할게.”
내 말에 마코토는 빠르게 자신의 말을 이었다.
“아니야, 지금 시간이 여덟시네… 한 열두시쯤에 다시 전화할게. 그때 받을 수 있어?”
“받을 수야 있지. 근데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니니까. 굳이…”
“그때 전화할거야, 꼭 받아.”
그렇게 내 말을 자르고는 자신의 말만 하고나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말 이 녀석은 하나도 변한 게 없구만.
기분이 나쁘다 기 보다는 오히려 웃음이 날 정도였다.
생각보다 전화가 일찍 이라고 해야 하나, 바로 끝나 버려서 무사히 여덟시 반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차를 놓치면 할일도 없이 버스장에서 한 시간을 죽치고 앉아있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것이다.
이번에는 옆에 마츠다씨도 없으니까. 한 시간을 멍하니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심코 버스 장으로 가기 위해서 빠르게 발을 놀렸다.
빨리 걸어온 것이 효과를 보았는지, 무사히 셔틀버스에 탑승해서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버스가 어두운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는데 문득 피곤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릴려고 생각하는 데도, 생각은 하는 데도 꾸벅 꾸벅 졸게 되었다.
많이 자고 나왔고, 그렇게 늦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다.
갑자기 잠이 막 쏟아지는 기분에, 어차피 도착하려면 삼십 분정도 걸리기 때문에 그냥 수마와 괜히 싸우느니 그냥 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에게 항복선언을 하자, 바로 스르륵하고 눈이 감겼다.
“…세요. …나세요.”
음.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몸도 살짝 흔들고 있는 것 같고….
“아!”
확하고 눈이 떠졌다. 썩 밝지는 않은 어두운 조명이 켜져 있는 셔틀버스 안.
버스는 어느새 멈춰있고 내 앞에는 버스기사 아저씨와 한 명의 여성이 서있었다.
“아이고, 이제 일어나셨네.”
버스기사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깜빡 졸았네요.”
“아니 죄송할 것까지야 없는데…”
버스기사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주변을 한번 쭉 둘러보았다.
그에 따라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버스기사가 말을 이었다.
“지금 종점까지 왔는데, 혹시 어디서 내리려고 하셨는지?”
“세이렌 휴양원에서 내릴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약간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말았다.
둘러보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던 것 같다.
세이렌이 사와자카 역전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데, 버스 노선 상에선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내려야 할 곳에서 버스로 30분 거리를 더 달려온 셈이다.
물론 휴양촌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구석구석에 있는 휴양원이나 여관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노선이 빙빙 도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거리 자체는 그렇게 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정확한 방향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세이렌이면, 허어 멀리도 왔구만. 그래도 아직 버스가 끊길 시간은 아니니까, 좀 기다려야 하기는 해도 기다렸다가 타고 가면 되겠네요.”
“아직 차가 안 끊겼나요?”
그나마 다행인 이야기다.
“그럼요, 10시 30분에 출발하는 차가 마을로 내려가는 막차니까 한 시간을 째로 기다려야 하긴 하겠지만 돌아갈 차는 있네요.”
“네, 감사합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버스기사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옆에 있던 여성도 같이 내렸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도 졸다가 내릴 곳을 놓쳤다고. 그 이야기를 하는 데 꽤 부끄러워 하는 모양새였다. 하긴…
그렇게 우리 둘을 내려준 버스기사는 유유히 버스를 몰고 차고지로 사라져갔다.
바보짓을 하다가 만난 동지라 그런지 약간 어색함을 가진 체 터벅거리는 발걸음을 반대쪽 버스 장으로 옮겼다. 막 차가 떠나가고 난 뒤라, 한 시간 뒤에야 올 막차를 기다려야 한다고.
“세이렌에서 숙박하시나 봐요?”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 아뇨. 세이렌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아직 견습 신분이기는 해도 말이죠.”
견습이라는 부분에서는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와, 세이렌에서 근무하시는 구나. 대단하시네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서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그녀가 부끄러운 듯 약간 고개를 숙이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아렌 장이라고 세이렌에서 10분정도 거리에 있는 조그만 여관에서 살고 있어요. 굉장히 고풍스러운 곳이고, 직원 분들도 굉장히 유능한데 고풍이 아니라 낡아빠진 거라고들 생각하시는지 장사가 거의 안 되거든요. 할머님도 많이 편찮으신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적당히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손님이 자주 찾는 여관이나 휴양원 들에 관심이 계속 가더라고요. 어떤 게 노하우인지도 궁금하고요. 할머님은 그저 지금까지 이어온 방식을 유지하면 된다고 하시는데…”
“아, 제가 너무 폐를 끼쳤네요. 처음 뵙는 분에게 못하는 말이 없었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내 앞에서 웃고 있는 그녀는 한눈에 확 들어오는 아름다움은 좀 부족하지만 수수해보이면서도 아름다운, 좀 이상하기는 해도 수수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화원이나 수목원의 꽃들이 가지는 화려한 미가 아니라 들에서 자라는 들꽃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강한 생존력을 지닌 매력 말이다.
한쪽으로 잘 빗어 내린 단발도 썩 잘 어울렸다.
말 그대로 초면에 무거운 얘기를 해버리고 나니 분위기도 좀 안 좋고 그래서 가벼운 일상 이야기 쪽으로 대화를 유도했다.
내 쪽이 절대적으로 경험이 일천해도 비슷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다보니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손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거의 터부시되기 때문에 주로 동료나 일 자체에 관한 이야기, 실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다행히 그럭저럭 즐겁게 남은 시간으로 보낼 수 있었다.
10시 30분이 되어서 막차가 버스 장으로 들어왔고 그녀 -이름은 사오토 료코,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어렸다. - 와 버스에 탑승했다. 일과를 마치고 퇴근 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지 꽉 찰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버스 안이 금세 북적거리게 되었다.
사오토씨는 아렌 장 근처에서 먼저 내렸고, 나도 5분 정도 뒤에 세이렌 앞에서 하차했다.
11시가 거의 다 되어서 세이렌에 돌아왔다. 첫 비번을 -본의 아니게도- 정말 남김없이 소모하고 돌아온 것이다.
12시에 마코토가 전화를 건다고 했었기 때문에 빨리 씻고 조금이라도 더 쉬고 싶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서 업무를 시작해야 할 텐데 늦게 자는 것은 치명적이니까 말이다.
방에 들어와서 갈아입을 속옷과 수건, 세면도구를 챙겨서 샤워장으로 향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누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보다는 침대와 이불속에 한시라도 빠르게 몸을 누이고 싶었다.
샤워장에서 몸에 묻은 땀과 노폐물들을 깨끗하게 닦아냈다.
방에 돌아오니 11시 30분. 꽤 애매한 시간이 되어 버렸다. 30분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있으면 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tv를 켜서 보기에는 귀찮고 재미도 없을 것 같고.
그래서 그냥 핸드폰으로 인터넷이나 좀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스포츠 뉴스나 사회뉴스, 경제뉴스, 연예뉴스 마음에 드는 기사만 몇 개씩 들어가서 읽어 보았다.
그러다 연예뉴스 쪽에서 기억에 있는 이름을 발견했다.
전에 같은 동네에 살았던 여자얘, 아이돌이 되긴 했었지만 이리저리 치이면서 마이너 그룹을 전전하던 그녀가 결국 아이돌을 은퇴한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유명하지는 않은 친구였기 때문에 작게 나온 기사에 사람들의 관심도 썩 시큰둥했다.
차라리 아이돌이 아니라 제대로 된 가수로 데뷔를 했더라면 분명히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 텐데.
그녀의 목소리와 노랫소리가 기억이 나서 약간 마음이 씁쓸했다.
은퇴를 결심한 이유는 아이돌로서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한은 도무지 자신이 원하는 길대로 갈 수 없다고 느꼈다는 것.
점점 자신의 이상에서 멀어져가는 모습에 은퇴를 결심했다고.
그래, 차라리 잘 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제대로 자신의 길을 찾아 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