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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물밑작업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의자. 굉장히 마음에 드는 감촉이다. 재질의 촉감만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라, 너무 부드러워서 몸이 푹 무너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딱하다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는 딱 적당하게 몸을 잡아주는 느낌이 드는 의자다. 꽤 비싸 보이는 물건이다, 공산품보다는 수제품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 정도의 의자로 가게를 채우려면 자본금이 얼마나 들어갔을지 모르겠다. 녹색 빛이 살짝 감도는 원목 테이블하며, 커튼, 카펫 뭐하나 싼 티를 내는 물건이 없을 정도다. 아니 싼 티가 아니라 평범하게 비싼 물건의 티조차 내지 않고 각자가 오묘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을 정도다. 약간 아쉬운 것은 그 아우라들이 너무 강해서 합쳐지기보다는 서로 부딪히고 반감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배치가 엉망인 느낌이다.
분명히 조금 더 좋은 가게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 인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가게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쪽을 바라보니 전에 본 적이 있는 이 가게의 오너, 타카하시 메이코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 출근하는 것인지 지난번에 봤던 타이트한 정장차림이 아니라 회색 원피스 차림에 체 다마르지 않은 긴 머리를 휘날리면서 가게로 들어왔다. 눈은 왠지 X자로 보일 정도로 찡그리고 있는데 은근히 귀엽다.
카운터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면 늦게 일어났다, 라는 것 같다. 뭐 사장이고 하니 문제는 없는 일 아닐까. 어느 정도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스탭룸이라고 쓰여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타카하시씨가 보였다.
조금 더 기다렸더니 카운터 소녀가 중간사이즈 정도 되어 보이는 쟁반에 크고 가운데가 움푹 패어져 있는 은색 접시와 찻잔, 차 주전자를 들고 다가왔다.
“주문하신 커리라이스랑 실론티 나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는 먼저 받침대를 놓고 그 위에 숟가락을 올려 세팅을 해주었다. 그리고는 내 앞에 움푹 팬 접시에 담겨있는 커리라이스를 내려놓고 그 옆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따로 준비해온 빈 잔에 찻잔에 미리 담겨있던 따뜻한 물을 버리고는 찻잎을 거르기 위한 스트레이너를 잔에 올리고 차 주전자에 씌워져 있는 티 코지를 벗겨냈다.
스트레이너 위에 차를 따라서 잔을 채우고는 다시 스트레이너를 회수한 뒤 나에게 살짝 웃어 보이면서 말했다. “맛있게 드세요.”
은근히 전문적이다. 보통 홍차전문점이 아니고서야 이 정도까지 해주는 가게는 드문 편인데. 아니면 절차는 다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주방 안에서 다 끝내고 차를 따른 체로 내오던가하는 편인데 여기는 손님 앞에서 일련의 과정을 다 진행할 줄이야. 꽤 놀랐다. 생각보다 서비스도 괜찮은 편이구나.
커리라이스를 먹기 전에 먼저 찻잔을 들어서 차 내음을 맡아 보았다. 실론 특유의 상큼한 냄새가 코를 싱그럽게 만들었다. 살짝 입술을 대서 마셔보니 찻잎도 괜찮은 걸 사용했고 모양새만 갖춘 것이 아니라 제대로 끓인 차라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잘 찾아온 것 같다. 이 정도면 모처럼의 휴일을 사용하는 게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잘 사용하는 편에 속할까.
커리는 살짝 된 느낌이 나는 루 커리였다. 주문이 잘 전달이 되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하게 매콤한 맛이 났다. 옆에 요구르트나 몇몇 야채가 곁들여져 있어서 먹는 내내 입에 물리지 않게 계속 맛을 조절해가면서 먹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커리도 식당에서 흔히 나오는 범용 커리가 아니라 전문점에서 나올 수준의 음식이다. 주방장이 날마다 기분에 따라 조합한다는 게 그냥 주방장이 기분파여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전문성을 겸비한 오리지널리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점이 많이 있는 가게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에 남아있는 차를 입안에 머금고 남아있는 향신료 특유의 향취를 빼내었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은근히 뒤끝에서 톡 쏘는 맛이 있다. 확실히 맛있게 잘 먹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매 끼니를 학생 때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고급스럽게 때우는 일이 잦아져서 입맛이 점점 올라가는 게 종종 느껴졌는데 - 과자라든가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전에 즐겨 먹던 싸구려 음식 생각도 전혀 안 나고 그랬다. - 그 입맛을 충족시켜줄 만큼 상당히 괜찮았다. 나중에 또 들러서 다른 식사 메뉴들도 한 번씩은 먹어보고 싶어질 정도다.
그럼 이제 식사를 마쳤으니까, 디저트를 챙겨 먹어야겠다. 식사의 수준을 생각해보면 참 기대되기 그지없다. 한손을 작게 올리고 홀 쪽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던 카운터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네, 갑니다.” 나를 보고는 작게 웃으며 말한 소녀는 내 쪽으로 쫄쫄쫄 걸어왔다. 걸어 왔다 기 보다는 뛰어 왔다와 걸어 왔다의 중간 속도 정도로, 정말로 쫄쫄쫄 이라는 느낌이 나도록 걸어왔다.
“부르셨나요?” 그리고 나에게 다시 물어오는 소녀.
“네, 이제 디저트를 시키려고 하는데 혹시 메뉴판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내 말에 작게 대답한 소녀는 다시 팟, 하고 메뉴판을 꺼냈다. 이번에는 꽤 주의 깊게 살펴봤는데 아마 등 쪽에서 뽑아낸 느낌이었다. 물론 느낌일 뿐 전혀 확신을 서지 않지만. 이 정도로 유심히 지켜봤는데도 쉽게 밑천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예사 재주는 아닌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녀가 공손하게 건네는 메뉴판을 받아 들었다.
아까는 홍차였으니까 이번에는 커피 류 로 마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커피 종류는 아무래도 약간 얼얼하게 남은 향신료의 자취를 깨끗하게 날려줄 수 있도록 얼음이 들어간 차가운 종류가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시원한 커피에 달짝지근한 디저트보다는 담백한 차 과자가 당기는 느낌이다.
담백한 차 과자 같은 메뉴들이 모여 있는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스콘에서 딱 눈이 멎었다. 그 친구가 참 스콘 류를 좋아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도 결국 제일 좋아하는 것은 집 근처에 있는 스콘 전문점. 어렸을 때부터 자주 먹었던 것이라고. 물론 맛도 상당히 괜찮은 집이지만 말이다. 좀 싸웠을 때도 그 집에서 파는 한정판 스콘을 구해다 주면 쉽게 풀려주곤 했었는데, 스콘을 보니까 그 친구 생각도 나고 그렀다. 조금 있다 시간이 나면 오랜만에 연락이라도 해봐야겠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부모님이 경영하는 회사에 입사했으니 걔도 이제 2년차에 한창 바쁠 시기일 것이다. 나중에 서로 짬이 날 때 한잔 마시러 가는 것도 꽤 구미가 당기는 일이고. 그냥 만나서 얼굴만 봐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쿨 커피에 치즈 스콘으로 해주시겠어요?” “커피에 시럽 넣어서 드시나요?”
소녀의 물음에 살짝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아뇨, 기본으로 해주세요.”
“네, 주문받았습니다.”
소녀는 빙긋 웃으며 대답하고는 다시 메뉴판을 팟하고 집어넣고는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음, 오히려 등 쪽으로 팔을 빼는 건 페이크 같다는 생각도 약간 드는데… 역시 나중에 왔을 때 두 번 보여준다고 직접 말했으니 그 때를 노려서 비법을 캐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면서 딱히 할 것도 없기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기다리는데,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언뜻 보여서 고개를 들었다. 카운터 소녀가 아니라 이번엔 타카하시씨가 직접 커피와 스콘이 담긴 그릇을 쟁반에 담아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아까 살짝 젖은 머리에 허둥거리는 사복 모습도 꽤 괜찮았지만 타카하시 씨는 역시 이렇게 정갈한 모습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마츠다 씨 보다 약간 큰 정도의? 여성치고는 꽤 큰 편에 속하는 키에 깔끔하게 하나로 묶어 내린 긴 생머리. 카페 에벤스의 정복에 타이트하게 감싸인 몸. 특히나 잘록한 허리가 바스트와 힙을 더 강조시켜 주는 모습이다. 얼굴은 살짝 보이시한 느낌이 들면서도 사카라기씨에 비하면 굉장히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편이다.
물론 사카라기씨가 남성스럽다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굳이 말하자면 사카라기씨를 기준으로 키 반 숟갈, 여성스러움 반 숟갈, 성숙함 반 숟갈 정도를 더 넣어서 만들어진 느낌이다.
표범과 치타의 차이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무슨 소린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타카하시씨는 마츠다 씨처럼 한눈에 억 소리가 나는 미녀는 아니지만 그녀 역시 상당한 매력이 있는 아름다운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녀도 내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내 얼굴 쪽을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잠깐이었지만 언뜻 누구였더라, 이런 표정이 스치고 지나간 다음에 금방 밝게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카페 에벤스 오너 타카하시 메이코입니다. 오랜만에 찾아오셨네요.”
이렇게 말하면서 세팅을 하기 전에 테이블 위에 남아 있는 접시와 찻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들어서 계속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이 용하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차가 참 맛있더라고요. 감사히 먹고 있습니다.” 나를 나로 기억하는 지는 잘 모르겠으나 날 기억하고 있나 모르고 있나 서비스 정신은 참 좋은 것 같다.
기억하고 있다면 한 달 전에 처음 얼굴을 본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 대단한 것이고 날 모른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저렇게 친근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것을 보면 장사하는 사람의 기본이 되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이렌에서도 고참 들이 뿜어내는 그런 자연스럽게 타인이 아닌 가족 같이 느끼게 만드는 아우라와도 약간 비슷한 능력. 서비스업에 종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필수로 가져야 하는 능력이고, 끊임없이 계속 가꾸어나가야 할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까진 전혀 꽝인 능력, 오히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신경 쓰면 쓸수록 나에게서 멀어져가는 느낌이 나는 능력이다. 선배들도 무엇보다 자연스러움이 중요한 것이라고. 그런 면에서 빠르면서도 자연스럽게 웃음을 지을 수 있는 타카하시씨가 대단하다는 이야기였다.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카페 에벤스는 고객님께 언제나 더 좋은 맛을 제공해 드리는 것을 모토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커피와 스콘이 담긴 그릇을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그렇게 세팅을 끝마치고 스콘 그릇에서 손을 떼려다가 잠깐 멈칫하고는 나를 계속 쳐다봤다. 정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개가 약간 옆으로 젖혀지고 눈매가 살짝 좁아진 느낌이 들었다.
“음, 토…”
“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우물거리기에 물었다.
내 물음에 눈매에 살짝 주름을 잡다가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토 오베, 토베 류노스케씨?”
아, 이제 기억이 난 모양이다. 특히나 서비스 맨의 가면을 반쯤 벗고 지어오는 저 애매한 표정에서 나에게 동의를 구해오는 것이 느껴졌다.
“예, 토베 류노스케입니다. 세이렌 휴양원에서 마츠다씨랑 같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작게 웃으면서 그녀에게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듣고야 그녀는 얼굴이 살짝 펴지면서 입가에 어느 정도의 웃음을 머금었다.
“헤에, 아니면 어쩌다 싶었어요. 긴가민가했네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슬쩍 내 앞자리의 의자를 끌어당겨서 자리에 앉았다.
방금 상황을 직접 입으로 이야기 한 것도 그렇고 가게 오너로서의 가면을 살짝 벗은 느낌이 난다. 차라리 나도 이런 분위기 쪽이 더 편하니 나쁘지는 않다.
“정말로요, 지난번에 봤을 때는 나중에 혼자서 찾아올 것 같다는 느낌은 없었거든요. 온다면 리노랑 함께? 일려나. 이런 느낌이었죠.”
타카하시씨는 의자를 들어서 끄는 소리가 나지 않게 앞으로 당기고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동작이라 그런지 이런 모습도 꽤 호감이 갔다.
그러고는 살짝 손을 들어서 카운터 소녀를 불렀다.
“네, 사장님?” 이쪽으로 다가온 소녀는 어느새 외간손님과 겸상을 하고 있는 타카히시씨를 보고는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긴 이상하기는 이상한 모양새일 것이다. 살짝 지각했다면서 출근하자마자 이렇게 농땡이를 피우고 있으니.
“응, 마키. 나도 쿨 커피한잔 해서 가져다 줘, 쿠키 남은 거 있으면 더 구워서 가져다주고.”
“네, 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방 쪽으로 사라지는 소녀에게 타카하시씨는 친구야, 친구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는 작게 탄식 음을 냈다.
“네?” 내가 물어보자 그녀는 입가에 작게 웃음을 머금고는 나에게 물어왔다.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네, 물론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