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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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물밑작업

흠….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점차 떠졌다.

얼마 만에 이렇게 늦잠을 자보는지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봤더니 아직 오전 10시. 직업병이라는 게 무섭긴 무서운 거구나.

샤워실로 가서 가볍게 몸을 씻었다. 면도도 그새 습관이 되었는지 구석구석 깔끔하게 하고 나서 거울을 보았다.

물에 젖어서 착 들러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들어보니 역시 약간 덥수룩해진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자라면 확 지저분한 느낌이 들것 같으니 이번에 내려가는 김에 자르고 오는 것이 좋겠다.

몸에 묻은 물기를 수건으로 대충 닦아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간단하게 스킨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말렸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시간을 보니 10시 30분 정도. 지금 시간에 점심을 먹고 가기는 약간 애매하고 바로 에벤스로 들어가서 점심 겸 티타임을 가지면 딱 좋을 것 같다.

업무 중인 동료들을 마주칠 때마다 가볍게 목례를 건네면서 세이렌을 벗어났다. 셔틀버스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아마 정시마다 한 대씩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리면 버스가 올 것이다. 예상대로 11시 정각에 버스가 들어왔고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기사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낸 뒤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서 회수 통에 넣었다.

휴양촌에서 돈을 걷어서 운용하는 버스라 그런지 꽤 저렴한 가격에 운행된다. 무료로 운행시키기엔 종종 부작용이 따라서 적게나마 현금을 받고 있다고.

버스가 휴양촌을 지나고, 관광지구인 카이센 쵸를 지나서 상업지구인 시마바 쵸로 나아갔다. 그러고 보면 종종 심부름이나 간단한 생필품을 사러 나온 적은 있었어도 이렇게 느긋한 기분으로 놀러 나왔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왠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편안한 게 썩 좋았다.

시마바 쵸의 가장 중심지인 사와자카 역 근처로 버스가 도착했다. 

사와자카 역전에서 내렸다.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게 근 한 달 만이라서 그렇게 편안하고 느긋한 기분이 들었나 보다. 주변을 거니는 주부나 길고양이, 학교가 일찍 끝난 듯 신난 꼬맹이들이 보인다. 세이렌 안에서는 꽤 보기 힘든 평안한 조합이라 마음이 더할 나 위없이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평생을 살아온 평화로운 거리가 오히려 새롭게 느껴질 줄이야. 확실히 요 한달 간이 살아온 와중에서 꽤 치열하게 지낸 시간이었어,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에벤스로 옮겼다. 에벤스가 대로 가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났기 때문에 크게 헤매지 않고 쭉쭉 길을 찾아 갔다. 카페가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2층 높이에 걸려있는 고풍스러운 팻말에 'Cafe Evans'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니 맞게 찾아온 모양이다. 

계단을 올라가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까지 일본의 지긋지긋하게 많이 봐온 평범한 회색 건물에서 단숨에 고급스러운 응접실로 주변이 변하였다. 지난번에는 얼결이라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지 못했었지만, 졸부의 악취미라고 이야기했던 마츠다씨의 말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귀족의 응접실에 들어온 듯 고풍스러운 가구나 카펫이 깔려있고, 그것들을 너무 어둡지도 않고 확 밝지도 않은 은은한 어둠이 감싸고 있다. 보면 벽에 큼지막한 수사슴의 머리박제가 걸려있는 것도 보였다. 수사슴의 머리박제. 수사슴의 머리박제.

“아, 저거는 가짜랍니다.”

그때 옆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으로 고개를 둘러보니 전에 보았던 타이트한 정장을 입은 소녀가 카운터에 서있었다.

내가 그녀를 보고 벙쪄있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저 사슴얼굴이요. 그게, 왠지 자꾸 보고 계시 길래. 아우.”

전형적인 조그맣고 귀여운 상의 여인이다. 세이렌에서는 꽤 보기힘든 타입의.

마츠다씨는 귀엽긴 해도 역시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성인 여성의 느낌이 강하고, 아가씨는 귀여움 보다는 고상하고 우아한 매력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귀여운 맛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소치씨는 귀엽다 기 보다는 씩씩한 사람이고, 미무라씨는 똑 부러지는 맛이 있다. 

하긴 전형적인 귀여운 상이라고 해도 실제로 이런 타입이 오히려 드물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에게 대답했다.

“네, 정신없이 보고 있었네요.”

“그죠? 많이들 그러시더라고요. 사장님이 이번에 새로 구입해오신건데, 홈런이라고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나중에 여기다가 포토제닉존도 만드실 거라고…”

“음, 그건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내가 살짝 얼굴을 찌부둥하게 구기며 대답하자 따라서 그녀도 살짝 얼굴을 구기며 대답했다.

“그죠? 저도 그건 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아무튼 이쪽으로 오세요. 라고 말한 그녀는 나를 이끌고 벽 쪽에 있는 자리로 데려갔다. 나를 빼고는 두 무리가 카페에 들어와 있었는데, 자리에서는 서로 다른 무리가 완전히 보이지 않도록 인테리어를 해놓았다. 어떻게 보면 신기하고 프라이버시 보호에 좋아 보이지만 공간 활용 면에서는 상당히 안 좋은 배치일 것이다. 대체 장사는 어떻게 하고 먹고 사는지….

완전히 남일 이지만 내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녀는 나를 자리에 앉히고는 메뉴판을 딱하고 꺼내서는 나에게 건넸다. 정말로 딱하고 꺼냈다. 어디서 뽑았다든가 하는 게 아니라.

“마술 같은 건가요?”

신기한 기분이 들어서 그녀에게 물어봤으나 그녀는 쯧쯧쯔 라고 혀를 차면서 짓궂게 웃으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기업비밀이에요. 궁금하면 나중에 다시 오시면 되요. 그때는 음, 그래 두 번 정도는 보여드릴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깔깔 웃는 소녀.

호오, 이런 식으로 장사를 하는구만.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부드러운 모직 재질로 된 메뉴판 커버를 여니 빈티지한 느낌의 종이에 부드러운 손 글씨로 적혀진 메뉴들이 보였다. 첫 페이지는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커피 메뉴들이, 두 번째 페이지는 홍차종류가 자리 잡고 있었고 세 번째 페이지에는 음료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과자나 빵 종류, 식사 류 도 몇 가지 자리 잡고 있었다.   

역시 이 시간까지 공복이다 보니까 꽤 출출한 기분이 들었다. 먼저 식사부터 하는 게 좋겠다. 차는 실론으로 하고 식사를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딱 먹고 싶은 걸로는 파스타류와 커리라이스가 눈에 띄었다. 두 종류 다 세이렌에서는 먹기 힘든 종류의 음식. 평소에 생각이 없다가도 보고 나니까 갑자기 입맛이 확 땡기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메뉴판을 보면서 조합을 짜다보니까 생각이 났는데 함께 찻집탐방을 다녔던 친구가 너는 맛을 보는 혀는 좋은데 음식과 음식의 조합을 맞추는 능력은 그저 그렇다고, 라기 보단 형편없다는 이야기도 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더 내 입맛에 맞는 조합을 찾아가는 거였을 뿐, 남의 눈을 신경 쓰느라 나에게 맞지 않는 정석인 조합을 따라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석을 탈피해서 오리지널 테이스트를 쫓기 시작했을 때부터가 진심으로 찻집탐방이 즐거워졌던 때였고. 

음, 역시 왠지 오늘은 면 요리보다는 밥이 먹고 싶었다. 

종업원 소녀에게 메뉴판을 건네면서 입을 열었다.

“여기 커리는 어떤 식으로 나오나요?” 내 질문에 눈만 깜빡거리면서 대답하는 소녀.

“음, 인스턴트라든가 아니면 어떤 향신료를 쓴다든가 하는 그런 거요.” 내 덧붙임 말에 그제야 소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주방장이 직접 그날 그날 기분에 맞춰서 배합해서 나옵니다.”

뭔 소리야. 이 말이 턱 끝가지 올라왔다가 겨우 다시 몸속으로 내려갔다. 얼마나 자유로운 가게인 거야, 그전에 이렇게 작은 가게에 주방장까지 있고. 뭐 그래도 오리지널 믹스라는 점이 중요한 것일 테니까. 생각해보면 그렇게 까지 나쁜 이야기도 아니다. 인스턴트 카레나 한번 조합해서 루로 만든 다음에 몇 개월을 두고두고 사용하는 가게보다야 주방장이 그날 선택해 만드는 쪽이 더 매력적이기는 하니까.

“그럼 약간 맵게 해서 부탁드릴게요, 음료는 실론으로 주세요.”

“네, 주문 받았습니다.”

작게 웃으며 대답한 소녀가 주방 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특이한 가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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