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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물밑작업
그렇게 미츠루씨와 사토씨와 간간히 연을 이어가며 관리부에서 2주를 보냈다. 파견업무를 끝내고 다시 유격부로 돌아갈 때 사토씨는 ‘이 정도 실력이면 관리부에서도 충분히 먹힐 실력이니까, 괜히 딴 곳에 기웃거리지 말고 바로 관리부에 지원해라’라고 못 박았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요구는 기각되었다.
관리부 다음에 업무를 배우기 위해 파견된 곳은 회계부였다. 회계부에는 미즈가와 사키코씨가 있었다. 관리부에서 다시 턴백한 그녀는 역시 자기에게는 회계와 관련된 일이 제일 적성이라고 생각하여 바로 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회계부에서도 그녀를 흔쾌히 받아들여서 서로 기분 좋게 자리를 잡았다고.
떠돌이 아닌 떠돌이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나도 이제 슬슬 한곳에 정착해서 제대로 일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때도 있다. 물론 그 자리를 잡기 위한 사전지식을 배우기 위해 다양한 부서를 돌고 있는 거긴 해도 말이다.
회계부는 이름 그대로 세이렌의 재정적인 부분을 담당한다. 각 부서에서 올라온 필요경비에 대해서 적합성을 검토하고 예산을 책정하고, 집행한다. 추후에 올라온 영수증 관리나 세금계산을 위한 회계, 경리뿐만 아니라 임금, 인사고과에 관한 업무까지 담당하는 세이런의 HQ에 해당하는 부서라고. 실은 이야기만 들어도 약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수학에 그나마 가장 재능이 있는 것 같았지만 재능과 취향은 별개의 관계로 존재한다.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은 엄연히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처음 이동이 결정되고 회계부의 부처로 들어왔을 때 처음으로 얼굴을 맞이한 사람도 미즈가와씨였다. 쭉 쿨한 이미지에 여전히 지적이고 날쌘 이미지지만 사토씨 앞에서 울쌍을 짓고 있을 모습이 머리에 떠올라 살짝 웃음을 짓고 말았다.
미즈가와씨는 ‘왜 그래요?’하고 당황한 듯이 물어왔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애써 넘기느라고 좀 혼났다. 미즈가와씨가 회계부가 돌아가는 모양새에 벌써 익숙해졌다는 관계로 나에게 붙는 담당자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미즈가와씨의 밑에서 회계와 세무에 관한 업무를 배우기 시작했다. 여전히 흥미는 일지 않았지만 얼추 흉내는 낼 수 있는 수준의 업무들이었다. 복잡한 계산은 컴퓨터가 알아서 처리해주기 때문에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는 과정을 입력하는 것과 결과물이 사실과 맞는지에 관해서 때려 맞추는 센스가 중요한 일이라고.
삼일 째쯤 지났을까, 미즈가와씨가 보는 앞에서 예시로 정해진 자료를 타이핑하고 계산하는 시험을 보고 있었다.
“음, 이건 이렇게 하고… 미즈가와씨?” “네?” “대충 끝난 것 같은데 한번 봐주시겠어요?” “생각보다 빨리 끝내셨네요, 어디보자.” 그렇게 말한 미즈가와씨는 상체를 숙여서 마우스를 잡았다. 미즈가와씨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내 어깨와 목덜미에 내려 닿았다.
샴푸냄새와 여성 특유의 체취가 은은하게 코를 울렸다. 미즈가와씨가 머리를 움직일때마다 살랑살랑 거리면서 볼이나 귀를 간질이는데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었다. 미즈가와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모양새로 모니터에 집중하는데 나만 발정난 똥강아지처럼 깨갱거리는 것 같아서 좀 부끄러운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코코넛향일까, 달작지근하게 퍼지는 냄새가 썩 마음을 진정시켜주지는 못했나 보다. 그렇게 마음속의 고뇌와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머리 위쪽에서 미즈가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부 제값에 들어왔어요! 얼추 생각은 했는데 토베씨는 정말 대단한 걸요?” 그래요? 하면서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내 뒤에 그녀가 딱 붙어있는 모양새였다는 것이 기억났다.
멈추려고 빠르게 목 근육에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관성의 힘으로 내 목은 뒤로 쭉 돌아가고 말았다. 푹신. 하고 부드러운 곳에 닿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닿았다기보다는 얼굴을 묻었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까.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길쭉길쭉한 미즈가와씨의 팔다리 덕분에 그녀의 가슴은 대체로 피했지만 보드라운 배에 얼굴을 완전히 묻어버렸다. 당황에서 그녀에게 사과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배에 얼굴을 대고 있었기 때문에 뜨거운 공기에 놀랐는지 미즈가와씨는 작게 비명을 지르면서 나에게서 떨어졌다.
“아… 저 그게. 죄송해요, 뒤에 계신 걸 까먹고… 그게.” 내가 횡설수설 변명을 하는데 미즈가와 씨도 시뻘게진 얼굴로 떠벌떠벌 말을 이어놓았다.
“아, 아니에요. 제가 붙어있던 게 잘못이죠, 그게 음.”
둘 다 당황에서 이것저것 이상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잠시 뒤에 머리에서 열이 빠져나가면서 진정이 됐다. 흐아.
“아무튼, 다시 말하는 거지만 대단해요. 정확도도 정확도지만 빠르기, 그리고 계산을 비틀어서 답으로 가는 지름길을 만드는 건 엄청났어요. 분명히 거기서 계산이 틀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쉽게 풀렸네요.”
미즈가와씨는 다시 쿨뷰티 모드로 돌아가서 차근차근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했다.
“네, 좋아하지는 않지만 수학은 나름대로 자신이 있더라고요. 아무리 해도 그다지 흥미가 나진 않지만요.”
“그래요? 전 다른 과목은 그저 보통에 성적을 내기 위해서 열중할 뿐이었지만 수학만큼은 늘 재미가 있었어요. 재미만 있었지 재능은 없었는지 꽤 노력했지만요. 저와는 정반대네요.”
미즈가와씨가 재미있다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런 식으로 2~3일 정도 더 업무를 배우고 나자 기본적인 회계정리는 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물론 어시스턴트 수준이고 전문적인 부분은 다른 선임자들이 도와주어야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회계에 대한 공부가 끝난 뒤에는 인사계통의 업무도 종종 견학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럼 토베씨, 내일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서류를 정리하며 말하던 미즈가와 씨가 우측 벽에 걸려있던 타임테이블을 보면서 말했다.
“내일이 비번이셨네요?”
그리고 나에게 물어왔다.
“네, 지난번 업무도중에 인사과의 호타기 씨가 비번을 언제로 할 생각이냐고 물어보셔서, 목요일이 괜찮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거든요.”
내 말에 미즈가와씨는 잠깐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헤에, 내일 관리부의 비품실로 재고조사를 나가려고 했더니 미뤄야겠네요. 그럼 금요일에 갈 테니까 미리 준비해두세요,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미즈가와씨 특유의 안경을 다시 쓰는 동작 -왼손 검지와 중지로 한쪽 안경테를 잡고 끌어올린다.- 을 하면서 웃으며 말했다.
“편히 쉬세요.”
미즈가와씨와 헤어져서 별관으로 향했다. 미즈가와씨는 원래 고향이 사와자카라 버스로 출퇴근을 한다고 들었다. 취업난에 지방으로 밀려 났다 기 보다는 명문대에서 하고 싶었던 공부를 다 끝마치고 이제 어렸을 적 꿈이었던 세이렌에 들어온 것이라고.
원래 아름답고 유능한 종업원 언니를 꿈꿨는데, 현실은 종업원의 재능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그저 대학교에서처럼 키보드만 뚜닥거리고 있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드디어 내일 비번이구나. 세이렌에 도착한지도 벌써 한 달 가량 되어 가는데 처음으로 맞는 휴일이다. 기본적으로 한 달에 삼일 지정해서 나가는 휴일이지만 여차저차 하다 보니 이번에야 첫 휴가를 받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도 인사과의 호타기씨, 호타기 마츠모토 씨가 토베군은 언제가 비번이야, 라고 물어오면서 자신의 pc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아마 더 늦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알아서 챙겨먹어야 하는 형식의 휴가인데 그동안 멍청하게도 신청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마츠다 씨가 종종 비번날짜를 정하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호타기 씨가 멍청한 건지 충직한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확실히 알아보니까 챙겨먹는 식이라고 딱히 어려운 절차가 필요한건 아니고 그냥 신청만 해놓으면 동일한 직무를 수행하는 인력이 과하게 비지 않는 수준에서는 다 처리가 된다고 한다.
아무튼 내일은 뭐를 할까, 생각하면서 방에 들어갔다.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서 한모금마시고는 리모컨을 들어서 tv를 틀었다. tv를 잘 안보는 습관이긴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일도 약간 일찍 끝났고 확실히 시간 때우는 데에는 이만한 물건도 없지 않은가.
아직 대욕탕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도 아니었고, 오늘은 비좁은 샤워실 보다는 큼직한 탕에서 제대로 몸을 씻어내고 싶었다.
채널을 돌리다가 문득 맛집을 찾아라! 같은 기믹의 프로그램으로, 어느 카페를 밀착취재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딱히 이 프로그램이나, 저 지방이나 메뉴, 주인 같은 것이 눈길을 끈 것은 아니었다. 그저 카페에 눈길이 끌렸다.
대학생 때 친구에게 이끌려서 지긋지긋하게 커피와 차를 마시러 다녀야 했다. 여기 디저트는 어쨌네 저기는 어쨌네. 4년 동안 상상도 못할 만큼 다양한 지방의 이름난 찻집을 순회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이 집이나 저 집이나 다 비슷한 차 맛에 그저 달짝지근하기만 한 디저트들이었지만 그렇게 1년 2년 동안 같이 다니고 나서는 어느 정도 그런 류의 맛에 대해 눈이 떠졌다고 해야 할까. 어느새 나도 취미가 되어서 곤욕이었던 식도락 행에서 벗어나 같이 다니는 게 즐겁게 느껴지곤 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학원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그 친구랑은 좀 뜸해졌다. 몇 번 얼굴이나 보는 정도였지, 사이에 거리가 생기고 나니까 주말마다 붙어 다니기가 애매해졌으니까. 그렇게 된 뒤로도 혼자서 종종 이곳저곳 찻집에 들려서 다양한 미식을 하고 다니곤 했다. 완전히 취미가 들렸는지 말이다.
그러다가 여기에 온 뒤로는 제대로 된 차를 마셔본 적이 없으니까…. 간만에 차 생각이 나니까 내일은 꼭 차를 마시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변에 괜찮은 가게가 있으려나, 하고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키려는 찰나.
아, 있다. 사와자카에 들어온 첫날에 마츠다씨와 갔었던 카페. 에반스라고 했던가, 마츠다씨의 동창이 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느낌의 가게. 확실히 독특하고 특유의 맛이 있는 가게였던 게 기억난다. 프랜차이즈 특유의 애매한 차 맛이 아니라 별미라고 할 만큼 특별한 느낌의 가게. 음, 그렇게 첫 번째 휴가는 내 동창의 취미를 쫓아, 마츠다씨의 동창이 하는 가게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