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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물밑작업
그렇게 방을 하나 둘 정리하면서 복도를 타고 쭉 올라갔다. 그래도 나름 숙련이 되었는지 지금까지 소요된 시간이 생각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사토씨도 꽤 괜찮은 속도에 수준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그 말에 기운이 붙어서 빠르게 쭉쭉 치고 올라가서, 금세 복도 끝에 있는 봄앗이방에 도착했다.
방 앞에서 사토씨가 나를 ‘빨리 시작해.’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토씨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준 뒤, 문 앞에서 작게 인기척을 냈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서 안쪽으로 말을 걸었다.
“계십니까?”
“네, 들어오세요.”
방 안에서 미츠루씨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닫이문의 문고리를 잡고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고개를 들자,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있는 미츠루씨의 웃는 얼굴이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이네요.” 가벼운 옷차림을 한 미츠루씨가 책상에서 고개를 돌린 체 인사를 건넸다.
“네, 이번에 조리2부로 지원을 나갔다가 다시 교육을 받으러 관리부로 돌아왔습니다.”
“수고 많으셨네요, 방은 조금만 정리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나름대로 신경써가면서 살고 있거든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던 미츠루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책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방을 둘러보니 딱히 지저분한 곳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냥 가볍게 비질만 한번 하고 걸레질만 해줘도 깨끗해질 것 같았다.
가지고 들어온 빗자루로 방을 바지런히 쓸고 있는 동안 책상을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미츠루씨의 모습이 보였다. 애써 무시하고 계속 청소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토씨가 미츠루씨에게 말을 걸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 언니.”
사토씨는 미츠루씨랑도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긴 직접적으로 같이 일을 하는 사이도 아니고 나이차이도 꽤나 나는 편이니까.
“이거 말이야, 이 문제.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어.”
“어떤 거?”
사토씨가 책상에 펼쳐져 있는 노트를 주의 깊게 쳐다보기 시작하자 미츠루씨가 말을 이었다.
“분명히 난 이렇게 푸는 게 맞는 것 같거든? 해설집을 보면 설명도 과정도 내가 생각한 거랑 비슷하게 나와 있어, 그런데 막상 집적 풀어보면 도무지 맞는 답이 나오지가 않는 거 있지.”
“어디, 어디.”
그렇게 사토씨는 1~2분정도를 노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작게 고민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음…….”
“음?”
“모르겠어…, 애초에 나 수학이 싫어서 빨리 취직이나 해야지 하고 생각한 거라서….”
사토씨는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말에 미츠루씨는 알겠다는 듯이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왠지 상황이 재미있어서 나도 작게 웃는데 사토씨가 그런 나를 보고는 쌍심지를 켰다. “왜, 웃는 거야. 그래, 그러면 류노스케가 풀어보면 되겠네. 대학까지 잘 나왔으니까. 이정도 수학은 끄떡없을 거야. 그치?”
“아니, 꼭 그렇지는 않은데…요.”
사토씨의 말을 받다가 옆에 있는 미츠루씨가 걸려서 뒤에 요자를 붙였다.
“아니야, 가능할 거야. 난 우리 류노스케씨가 이런 문제정도는 손쉽게 풀 수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온 사토씨는 나의 뒷목을 한손으로 움켜쥐고는 책상 쪽으로 끌고 갔다.
“청, 청소해야 해요!”
나는 그렇게 반항해 보았으나, 사토씨가 ‘그럼 내가 청소할게~’라는 한 마디에 완전히 무시당하고 말았다. 내 손에 들려 있던 청소도구를 뺏어간 사토씨는 비질을 하러 방구석으로 돌아갔고, 나는 결국 책상 쪽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긴장을 하면서 책상에 다가가서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음……. 곁눈질로 옆을 돌아보니 미츠루씨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흐으음……. 오, 그래도 다행히 이 정도는 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거요.” 하고 옆에 있는 펜을 무의식적으로 들려다가 멈칫하고는 미츠루씨에게 물어보았다.
“펜 좀 사용해도 될 까요?”
“네, 쓰는 건 여기다가 하시면 되요.” 내 질문에 청초하게 웃으면서 미츠루씨는 옆에 있는 무지다발을 나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음, 꽤 오래되기는 했어도 다행히 이런 종류의 문제는 풀어본 기억이 난다. 꽤나 고급 축에 끼는 함정 문제로 수험생들의 정신과 육체를 갈가리 찢어놓는 타입의 문제다. 그래도 패턴자체는 단순한 편이라 몇 번 정도 풀어보면서 감만 터득하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다. 요는 이런 걸 겪어보았느냐 아니면 겪어본 적이 없느냐 하는 그런 문제.
“여기서 D를 A에다가 합치게 하는 부분에서 걸리는 거 같아요. A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모델이라서 따른 것과 합쳐지면 맞게 계산을 한다고 해도 값이 뒤틀려 버리거든요. 그래서 조금 돌아서 계산하는 것 같아도 D랑 F랑 먼저 계산을 하면 조금씩 계산이 되실 것 같아요.”
내 설명을 옆에서 곰곰이 듣고 있던 미츠루씨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다.
“음음! 알 것 같아요! 생각보다 단순한 문제였네요. 조금 쉽게 풀어가야지 하는 순간 걸리는 함정 같은 거였네요.”
“네, 잘 이해하신 거 같아요, 속느냐 속지 않느냐 그런 문제지 그것만 알아채면 답을 내는 데에는 그다지 부담이 없는 문제니까요.”
“정말 고마워요, 아마 저 혼자 풀려고 했으면 오늘 내내 여기에 매달려 있었을 지도 몰랐겠어요.”
그렇게 말한 미츠루씨가 다시 열의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노트에 빠져 들려고 할 때 옆으로 쓰윽 하고 빠져나왔다. 집중력이 굉장한 건지 척척 문제를 풀어나가는 모습이 굉장히 보기 좋았다. 그때 옆으로 나가온 사토씨가 팔꿈치로 나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면서 작게 속삭였다.
“오, 류노스케 대단한데? 그냥 망신만 줘 보려고 부른 거였는데 말이야.”
사토씨의 장난스러운 말에 나도 작게 대답했다.
“왠지 그런 거 같았어, 다행히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망정이지 큰일 날 뻔 했잖아.”
“큰일까지야. 아무튼 대단하다는 건 정말이야. 미츠루 보이는 것만큼 엄청난 수재거든, 작년에도 실수만 없었으면 H여대정도는 쉽게 붙었을 거야. 근데 그런 미츠루도 낑낑대는 문제를 쉽게 푼 거잖아?”
사토씨가 여전히 눈으로 실실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니, 그건 실력보다는 경험적인 문제니깐. 한번 풀어보고 나면 어떻게 응용되어도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야.”
그렇게 둘이서 속삭이는 사이 어느 사이에 문제를 다 푼 미츠루씨가 이쪽을 보면서 말을 걸었다.
“와, 정말 이렇게 푸니까 답이 맞았어요. 정말 감사해요.”
밝게 웃는 미츠루씨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아니에요, 그다지 복잡한 것도 아니었는데요.”
“복잡하지 않다뇨, 제가 그 문제에 몇 시간을 매달렸었는데.”
내 겸손에 미츠루씨는 볼을 부풀리면서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보니 확실히 이상한 말투였던 것 같아 바로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죄송해요.”
내 사과에 뾰로통한 얼굴로 날 노려보던 미츠루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농담이었어요.’라고 이야기했다.
“보기보다는 진지한 분이네요, 토베씨는.” 라고 미츠루씨가 말하자 사토씨가 맞다고 이야기 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 나서는 둘이 마주보고는 쿡쿡거리며 웃음을 주고받았다.
“아무튼, 그럼 사과는 받아 드릴 테니까, 다음에 시간 날 때 또 공부를 봐주세요. 그 정도 선에서 용서해드리게요.”
어느 정도 웃고 나서 미츠루씨는 나에게 용서해주는 대가로 공부를 가르쳐달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 농담이었다고 이야기해놓고서는….
내가 그 이야기를 하자 장난기를 가득 담은 눈으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요.”라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음, 사실 가능하다면 공부를 봐주는 것도 물로 나쁘지 않다, 오히려 공식적으로 단 둘이서만 있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일이니까, 꽤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그녀를 가르칠 수 있을 만큼의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다.
H여대면 전국에서 한손에 꼽히는 톱클래스권의 학교는 아니지만 상위 10%안에는 들어가는 명문대로, 보통 여대 중에서는 최고로 치는 대학이다. 그런 대학에 아슬아슬하게 낙방하고 재도전을 노리고 있는 아가씨한테 수험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그저 그런 2류 대학을 골라서 입학-졸업한 내가 말이지.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이 제안은 거절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게, 공부를 봐달라고 이야기해도 말이죠…, 저도 그렇게까지 공부를 잘 했던 게 아니라서요. 죄송합니다.”
“그래요…? 아쉽네요.”
내 말에 미츠루씨는 누가 보아도 아쉽다는 표정을 지은 체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바로 그 표정을 지우고는, 다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공부를 봐주러 오시는 게 아니라, 종종 시간 날 때마다 놀러오세요. 차라도 한잔 마시어요. 맛있는 찻잎을 구해놓은 게 있으니까. 감사표시도 할 겸 말이에요.”
“아, 나도 와도 되?”
“언니는 벌써 아무 때나 불쑥하고 찾아오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렇게 미츠루씨와 이야기하던 사토씨는 나를 돌아보면서 얘기했다.
“알았지, 류노스케? 아가씨가 직접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놀러오라고 초청 하신 거니까 꼭 기대에 부응해 드리라고.”
말을 마치고 작게 깔깔거리는 사토씨의 얼굴에는 웃음이 한가득 피어있었다.
뭐, 미츠루씨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데 거절하기도 그렇다. 사실 나쁜 기회인 건 결코 아니니까. 잘 하면 가끔씩 업무시간을 때울 수 도 있을 것 같고, 둘이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놓는다는 건 꽤 쓸 만한 일이 될 테니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입시 공부책을 다시 지져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내 입시 때도 귀찮아서 내팽겨 쳤던 일인데….
“예, 알겠습니다. 그럼 종종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미츠루씨는 그 특유의 커다란 눈을 크게 반달자로 휘게 만들면서 웃음을 지었다.
“후후, 감사합니다. 준비 많이 해 놓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