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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물밑작업
침대에서 일어나서 현관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네, 토베씨. 마츠다 리노입니다.” 현관문 너머에서 마츠다씨의 나긋나긋하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고나서 바로 현관문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마츠다씨가 서 있었는데 마츠다씨도 방금 씻고 나왔는지 아직 머리카락이 완벽히 마르지 않고 살짝 젖어있고 몸에서는 은은하게 카모밀레 향기가 났다.
굉장히 맡기 좋은 냄새여서 나도 모르게 킁킁거리고 말았는지 마츠다씨는 부끄러운 듯 약간 얼굴을 붉히곤 산짝 고개를 숙인체 입에 아스라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을 보다보니 -또 코를 울린 것도 포함해서- 나도 왠지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일단 화제도 돌릴겸 또 이렇게 세워 놓는 것이 실례라고 느껴져서 마츠다씨에게 들어올 것을 권했다.
“일단 들어오세요, 마츠다씨.” “네.” 마츠다씨는 작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방에 비치되어있던 접객용 방석 두 개를 집어서 적당한 곳에 던져두고 냉장고에 -다행히도- 들어있던 오렌지주스를 꺼내 컵 두 개에 채운 후 마츠다씨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렇게 작은 앉은뱅이 상을 경계로 해서 그녀와 각각 양쪽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무슨 용무로 나를 찾아왔을까 싶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마츠다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토베씨가 내일은 조리2부에서 일을 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그걸 말씀 드리고 또…….” 여기까지 말한 마츠다씨는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말꼬리를 흐렸다. “또?” 내가 작게 반문하자 그제야 그녀는 머뭇머뭇 거리며 대답했다. “음, 지금까지 지내면서 힘들었던 일이나 아직 잘 모르겠는 일이나 그런 건 없나 싶어서요…….”
허. 마츠다씨가 날 생각해주는 게 굉장히 고마웠다. 그런데 그것보다, 방금 말을 할 때의 그녀가 굉장히 귀여웠다! 마치 -모두 내 상상이지만- ‘선배티를 내는 건 아니지만 왠지 그런 것 같아서 너무 부끄러워요.'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인 체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왔던 것이다.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귀엽담! 하며 나의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고 있을 때,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고 기분탓인지 평소보다 더 쳐져있는 것 같은 눈꼬리에 당장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은 커다란 눈을 나의 눈과 맞추고는 다시 한 번 대답을 재촉해왔다.
“네……?” 이렇게 오랫동안 묵묵부답인 체로 버티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다 싶어 -또 금방대답하지 않으면 그녀의 눈꺼풀이 댐의 기능을 상실할까봐- 급하게 대답하려다 보니 나도 덩달아 당황하게 되고, 말도 꼬이고 혀도 꼬이고 입도 꼬였다.
“아, 아뇨. 따, 딱히 궁금한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눌한 말투에 평소와 다른 존칭을 사용했지만 그녀는 그런 것과 상관없다는 듯, 아니면 그녀 역시 그런 걸 생각할 만큼의 여유는 없다는 듯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후로는 내일하게 될 일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듣고 몇 가지 정도의 잡담을 나눴다. 지금까지 해본 일들과 그에 따른 느낌점 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주말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갔다. 센류인은 일종의 휴양시설인 관계로 평일보단 공휴일, 주말에 더 바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말엔 토, 일요일 모두 출근을 하고 월~금요일 중에 하루나 이틀정도를 비번으로 정해서 쉬게 된다고.
“조만간 토베씨도 비번날짜를 정해야 할 테니까 스케줄 같은 걸 고려해서 미리 생각해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마츠다씨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아, 토베씨 이번 주말에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거 에요?” 방금 생각났다는 것 같은 말투로 마츠다씨가 물었다. 나는 딱히 생각해 놓은 것이 없었기에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마츠다씨는 기쁘게 웃으면서 그렇다면 함께 식사를 하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그 얘기에 내가 그래도 되겠냐고 묻자, 마츠다씨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물론이에요, 하지만 이번에도 신 메뉴개발 같은 일이라 그렇게 까지 맛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요.” 라며 말이다. 말이 끝날 때쯤엔, 자신이 없다는 게 좀 부끄럽다는 듯 웃었지만 평소 마츠다씨의 실력을 아는 만큼 다 겸손으로 들리고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주말의 식사약속을 잡고 나서 얼마간 소소한 이야기로 잡담을 나누다가 어느새 자정이 다 되어있었다. “어머, 벌써 이런 시간이 되었네요.” “그러게요.” 마츠다씨의 말에 웃으며 대답하였다. “토베씨와 이야기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가는 지도 몰랐어요.” 그녀는 베시시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저도 참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그런 식으로 몇 마디주고 받은 뒤 마츠다씨가 작별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가려하였다.
내가 그녀에게 바래다주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고맙지만 바로 요 앞인걸요, 뭘.”하며 웃으며 방을 나섰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아 문앞에서 그녀를 배웅했다. 복도 끝의 코너 부분에서 마츠다씨는 나를 돌아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작게 손을 흔들었고 그에 따라 나도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였다. 그녀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 다시 방에 들어와 문을 잠갔다. 컵이나 방석 등을 간단하게 치우고 소등을 한 후 침대에 누웠다.
그제야 슬슬 피로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그런 피로감보다도 방금까지 마츠다씨와 나누웠던 대화나 그런 것들에서 오는 기쁨이나 즐거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이불을 끌어당기고 잠을 청하는데 방안에서 평소와는 다르게 카모밀레의 향기가 은은하게 감돌았다.
알람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맡에 있는 시계를 보니까 다섯 시 반.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역시 힘든 것 같다.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세면장으로 밍기적거리면서 기어갔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고 거울을 보면서 깔끔하게 면도를 했다. 학생 때는 귀찮음에 적당하게 정리만하고 다니는 수준이었지만, 서비스업에 종사하게 되고 나서는 하나하나 청결해야하고 단정함을 잃으면 안 되니까. 입에 칫솔을 물고 이를 닦다가 문득 어젯밤 꿈이 생각나서 얼굴이 붉어졌다.
뭔지는 기억이 정확히 나지는 않지만 꿈속에서 입을 이용해서 굉장한 일을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츠다씨의 냄새가 나는 방에서 잔 탓일까 아침의 묵직함도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고…….
꿈 내용이 기억 안 나는 것이 이렇게까지 안타까웠던 적도 드문 것 같다.
몸을 씻고 옷을 적당히 걸치고 조리실로 향했다. 어제 마츠다씨가 조리실에 있는 탈의실에서 조리복으로 갈아입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주긴 하였지만 업무시간직전에 사복으로 돌아다닌 것이 약간 민망해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조리실은 대연회장 부근에 있는 단층건물이었다. 그중에서 조리2부라고 쓰여 있는 푯말을 보여 그쪽으로 들어갔다. 몇몇 선배직원들이 보이고 옆에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야채 따위가 즐비해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츠다씨가 내일 들어오라고 이야기 했던 1조리실로 들어갔다. 15평정도 되어 보이는 방의 벽면이 거대한 업소용 냉장고로 둘러져 있었다.
방의 바닥이나 벽면은 깨끗하게 닦여진 하얀색 타일들로 깔려있었고 방의 가운데에는 거대한 주방용 테이블 두 개가 붙어있고 그 반대쪽에 앞치마를 두른 조리복차림의 마츠다씨가 서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마츠다씨가 반갑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내가 가벼운 인사를 건네자 그 인사를 받은 마츠다씨가 비닐에 싸인 조리복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눈대중으로 빌려온거라 사이즈가 잘 맞을지는 모르겠네요.”
세탁소에 맡겼던 것처럼 깨끗한 조리복을 받아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탈의실의 게스트로커에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1조리실로 돌아왔다.
“왠걸요. 거의 맞춘 것처럼 딱 맞는데요?”
어느 정도는 크거나 작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입어보니까 정말 내 옷처럼 딱 맞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마츠다씨에게 감사함을 전하자 마츠다씨는 웃으며 받아주었다.
“정말요? 다행이네요.”하고 말이다.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어제 꿈이 점점 더 기억나는 거 같아 조금 위험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것보다는 좀 더 비릿하고 요염한 미소였는데…….
“갑자기 조리부로 불러서 미안해요. 원래는 따로 도와주는 친구가 있었는데 집에 일이 생겼다고 그저께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거든요. 팀에 남은 인원으로 이리저리 돌려막아봤는데 그걸 메우느라 어제 정신이 없었어요.”
“아니에요. 저야 앞으로도 이것저것 더 배워봐야 할 텐데요.”
“그렇게 생각해주니까 너무 고맙네요. 그럼 오늘도 힘차게 한번 해봐요, 일단 아침시간에는 정식류의 메인을 주로 맡을 거예요. 재료손질이나 이것저것 그때그때 도와주시면 엄청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마츠다씨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날은 정말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