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비시아!”
애달프게 우는 소리.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자 나는 애써 고갤 돌려 외면했다. 안 들린다. 안 들린다. 나는 들리지 않는다. 두 귀를 막고 고갤 돌렸다. 제발 자신을 찾지 못하길 바라며 웅크렸지만 그는 기어코 내가 있는 장소를 찾아내어 문을 벌컥 열었다.
“비시아!”
“어, 어어. 안녕? 잘 다녀왔어?”
“이제 그만 받아 줘!”
“뭘?”
“자꾸 이렇게 모른 척하기야? 교단에서 전달해 준 말들 말이야!”
잔뜩 울상을 지은 라디트의 말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게 왔던가?”
“비시아!”
잔뜩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는 라디트의 몰골은 처참해 보였다. 비록 겉은 멀쩡해 보였지만 표정이 잔뜩 질린 것으로 보아, 교단에서 있는 말 없는 말 다 듣고 온 것이 분명했다.
그치만 어떻게 해. 나는 그들의 명령을 순순히 듣기 싫은걸. 중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라디트가 불쌍했지만 한순간이었다. 그들의 말을 순순히 들어주려다가도, 때때로 치고 들어오는 울분이 늘 외면하게 만들었다.
아직 이 정도로 들어주면 섭하지. 그들이 내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데.
하지만 늘 나 대신 보복당하는 라디트가 불쌍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련한 얼굴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매달 듯한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들어줄까?”
“정말?”
내 말에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재빠르게 회복하는 라디트가 눈에 들어왔다.
“응. 슬슬 들어주지 않으면 교단에서 찾아올 것 같아서 말이야.”
“맞아! 내가 갔는데 벼르고 있지 뭐야. 이미 마차마저 준비했던 거 같았어.”
내 말에 재빠르게 긍정하는 라디트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럼 교단에 3년 뒤에 간다고 전해줘.”
“비시아!”
다시 한 번 더 내 이름을 크게 말하는 라디트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뭐, 뭐. 5년으로 했던 거 3년으로 줄인 게 어디야.
“나 정말 힘들어.”
자신의 처지를 강력하게 호소하는 라디트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창밖 날씨가 따사로웠다. 오랜만에 갠 날씨는 유난히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었다. 으음, 오랜만에 나가 볼까?
“비시아, 정말 이럴 거야?”
“알았어, 알았어. 그럼 이번이 마지막이야.”
“……정말?”
“응. 그리고 넌 이곳에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으니 다른 이를 한 명 더 보내 달라는 말까지 전해주면 더더욱 좋고.”
의심쩍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라디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자신 외에 전달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소식에 라디트의 눈물이 어느새 쏙 들어간 채였다. 라디트는 제 몸을 갈무리하고 재빠르게 등을 돌렸다. 혹시나 내가 말을 번복할까 싶어 몸부터 사리는 것 같았다.
“그럼 빠르게 전하고 올게!”
그 말만을 남긴 채 재빠르게 사라지는 라디트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3년은 무슨. 5년도, 10년이 지나도 그들과 교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허울만 좋던 말을 믿은 그들이 바보지.
나는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 생각했던 것처럼 햇살이 좋으니 나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꽤 시간이 흘렀다.
그저 내가 살 정도의 쥐똥만 한 영토를 원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은 내게 각자의 신분을 이용해 영지에 준하는 땅을 하나 뚝 떼어 주었다. 그게 한 사람이면 괜찮았을 텐데. 각자 그 정도에 달하는 땅을 주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애초에 혼자 살기엔 너무 큰 땅이 내 이름 밑에 달리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또한 영토를 주며 은근슬쩍 자신의 나라와 가깝게 지어 달라고 하는 통에 정신마저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그 땅만 경계선을 허물어 낸 곳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중앙에 거처를 짓지 않으면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이들을 막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비시아 님.”
내가 내려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하는 이의 모습에 살짝 고갤 끄덕였다.
“조금 있다가 나갈 거니까 마차 좀 준비해 줄래요? 멀리 나갈 건 아니고. 근처 번화가 둘러볼 정도니까 너무 거창하게 준비하진 않아도 돼요.”
“알겠습니다.”
순순히 고갤 숙이며 내 명령에 복종하는 이는 테이젤네 나라에서 온 이들이었다. 테이젤이 엄중하게 선별한 이들은 완벽한 예의와 일 처리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비밀에 붙여 주고 있었다.
응접실에서 궁둥이를 붙이기 무섭게 마차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기뻐하며 재빠르게 밖으로 나가자 크진 않지만 화려한 마차가 날 맞이하고 있었다.
“너무 과하지 않아요? 전 정말 간단한 산책 정도로 생각한 건데.”
“그렇습니까? 이게 저희가 가지고 있는 마차 중에 제일 작은 것이긴 합니다만…….”
마차나 구매에 대해서 무지했던 내가 타인에게 맡긴 잘못이었다. 다음엔 보편적인 마차를 구매하기로 마음먹으며 고갤 저었다.
“그냥 말을 타고 갈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마부를 시켜 곧바로 순한 말을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마부가 데려오는 말에 나는 조심스레 발을 걸쳤다. 일이 일단락된 후 계속 다른 이들의 등 뒤에 붙어서 이동하는 것이 싫었던 나의 선택이었다. 마차를 타면 된다고들 했지만 예전과 같은 상황이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 알아. 또 이상한 애가 갑작스레 나타나 날 다짜고짜 말에 태우고 전쟁터로 갈지 말이야.
호의무사를 붙이겠다는 이들의 말을 거절하고 나는 홀로 집 밖을 나섰다. 에드아르가 지어 준 집은 예전에 내가 갇혀 있었던 성과 비슷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집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자 번화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곳엔 그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 옥신각신 싸우며 날 한 가운데에 거주하게 만드느라 경계면까지 부순 터라 이곳을 딱히 자신의 나라로 지정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갑작스레 생긴 공터는 내가 그곳에서 살기 시작하자 사람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나라에서 세금조차 낼 돈이 없을 정도로 못 사는 이들이나, 혹은 새로운 땅에 흥미를 가지고 오는 이들까지. 제재를 가할 필요가 없어 그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어느새 마을을 하나 만들 정도의 규모에까지 이르렀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행복하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이내 그만두어 버렸다. 그저 이곳에서 행복하게 산다면 그걸로 되었다. 테이젤과 에드아르, 그리고 루드릭까지 날 도와주고 있는 마당에 세금을 걷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아 그대로 방치한 지 꽤 되었다.
자신들 마음대로 번창하는 모습을 보며 방치형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달라져 가는 마을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지, 어떤 형태로 진행되는지 다소 궁금해질 정도였다.
오늘도 기나긴 장마가 끝난 김에 번화가로 향하던 참이었다. 마침 새로운 건물도 들어섰다고 하니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가 생겼을까? 이왕이면 맛난 음식점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음식은 체험할수록 좋았다. 집에서 실력이 출중한 쉐프가 해 주는 음식도 맛있었지만 길거리에서 사 먹는 음식도 포기할 순 없었다. 자극적인 소스가 제 입맛을 자극할 때란. 자연스레 입에 침이 고이자 나는 말고삐를 당겨 걸음을 재촉했다.
“윽.”
하지만 도착과 함께 내 얼굴은 하염없이 찌푸려졌다. 이곳에 오면서 줄곧 했던 행복한 생각들이 와장창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지어지는 것은 음식점도, 가게도 아닌 신전이었다. 하얀색 기둥이 올라가는 것을 보니 절로 구역질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지? 이곳을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가 저런 건물을 보지 않아도 되어서였는데! 순간 라디트가 떠나기 전 말했던 것들을 떠올리자 표정은 더더욱 찡그려졌다.
설마. 벼르고 있던 일이 이거였던 걸까? 나는 말고삐를 돌려 재빠르게 다른 곳을 향했다. 관계자와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마주치더라도 아는 척을 전혀 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비시아 님?”
젠장. 재빠르게 튀려고 했던 내 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날 바라보는 이에 한숨을 토해 내었다. 교단에서 나는 유명인사가 된 지 오래였다. 역대급 공물을 바친 것과 더불어 교단의 뜻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자처한 성녀라는 어처구니없는 수식어로 말이다.
“비시아 님 맞으시죠?”
“하하…….”
그냥 모른 척하고 가면 좋았을 텐데. 집요하게 물어보는 이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삐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머.”
한결같이 보수적인 생각을 내게도 강요해 대던 대머리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준수하게 생긴 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랏빛 눈이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번에 여기로 파견된 세르안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저는 비시아예요.”
“알고 있습니다. 교단에서 비시아 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인걸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모습이 제법 제 심장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일순 봄바람이 이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이는 없었는데, 지금 만난 기분이었다.
“앞으로 쭉 여기 있을 예정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비시아 님을 만나라는 간곡한 부탁도 있어서요.”
“저를요?”
그제야 교단이 무슨 수를 썼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얼굴을 유독 밝힌다는 걸 그들 또한 꿰뚫어 본 모양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내 의중을 파악한 것 같아 좋았던 기분이 와락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제가 이곳에 열심히 지원을 요청한 것도 있습니다. 대륙에 평화가 깃들게 만든 비시아 님이 누군지 궁금했거든요.”
“그래요?”
참 간사하게도 그의 말에 기분이 금방 수직상선을 그었다. 날 향해 악의 없는 미소를 보이는 교단의 사람이 누가 있더라. 그저 순수한 호의로 다가서는 그가 나쁘지 않았다.
매일같이 올 것처럼 굴던 이들은 정작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자 연락이 뜸하던 참이었다. 테이젤도, 루드릭도, 에드아르도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느라 이 주일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던 참이었다.
그때마다 와서 너무 멀다며 불평을 하곤 했지만 내 뜻은 강경했다. 이곳에서 떠날 생각이 전혀 없으며, 여기서 모두를 보고 싶다는 것이 나의 고집이었다. 내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아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매번 날 보기 위해 머나먼 이곳까지 찾아오곤 했다.
하지만 마침 오늘은 아무도 없는 날이었다. 테이젤은 정치로, 에드아르는 황위를 물려받는 일로 바쁜 상태였다. 루드릭 또한 자신의 나라를 번창시키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말은 곧 나를 방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저랑 함께 집으로 가실래요? 이렇게 길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단 그편이 편할 것 같아서요.”
“영광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커다란 손이 내 여린 섬섬옥수를 잡자 나는 빙그레 웃었다.
오늘은 너를 먹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