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했으나 그곳을 벗어나는 순간 아직 시간이 이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짙은 밤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이 우릴 반기자 일단 각자의 천막으로 향해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눈이 감기질 않았다. 갑작스럽게 진행된 가능성들은 여전히 제 가슴을 세차게 뛰게끔 만들었다. 몸을 몇 번이고 뒤척였지만 새로운 잠자리 때문인지, 아니면 머릿속을 헝클이는 많은 생각들 때문인지 해가 뜰 때까지 결국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결국 아침 해가 뜨기 무섭게 일어난 난 그들을 불러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비시아.”
내 천막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자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테이젤이 환하게 웃었다. 태양을 같이 머금고 오기라도 한 듯이 환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귀족에겐 그리 편한 자리가 아니었을 텐데. 테이젤의 얼굴빛은 유난히 밝아 보였다.
“푹 자고 난 얼굴이 아닌데.”
상큼한 테이젤의 인사에 이어 에드아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내 얼굴을 관찰하던 그의 손이 내 뺨에 닿자 나는 어깨를 작게 들썩였다.
“이런 곳에서 잠을 자게끔 만든 원흉은 그 손 떼십시오.”
다행히 그에게 들키기 전에 테이젤이 내 어깨를 껴안으며 그를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그제야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에드아르의 눈길이 뒤에 있는 이로 향했다.
“꼭 내 탓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 않나?”
“에드아르, 테이젤!”
금방이라도 대립할 두 사람의 구도에 나는 재빠르게 양손을 뻗어 내게서 떨어트렸다. 나의 개입에 그제야 아침부터 물어뜯을 만반의 준비를 하던 이들이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어휴, 이래서야. 한숨을 푹 내쉬는 사이 루드릭마저 도착하자 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모두가 나를 향해 집중하고 있었다. 스읍, 숨을 들이켠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모여 달라고 말한 이유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어서예요. ……갈 곳을 변경하기로 했어요.”
루드릭을 제외한 두 사람의 얼굴에 일순 궁금증이 떠올랐다. 그래. 우리 집을 찾는다고 하더니 갑작스레 방향을 바꾼다는 말에 당혹스럽기도 하겠지.
“어디로?”
“중앙이요. 이 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의 중앙. 교차하는 지역으로 가고 싶어요.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살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에드아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번 일에 있어서 그의 전폭적인 지지가 아니었더라면 힘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가 아니었더라면 집은커녕 실마리도 얻지 못해 결국 교단의 뜻대로 움직였을 터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작스레 행진을 돌린다니. 교단에서 대대로 홍보한 것만큼 그의 나라에도 대대적으로 홍보되어 있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갑자기 말머리는 돌리는 순간, 그의 명예가 얼마나 실추될지 상상도 못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더 이상 에드아르에게 가만히 입을 닫고 있을 수 없었다.
“미안해요, 에드아르. 조금 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당신에겐 이래저래 폐만 끼친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고도 안절부절못한 난 재빠르게 덧붙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일단 황궁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것도 괜찮아요.”
내 말에 잠자코 있던 에드아르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다른 이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도 개의치 않고 다가온 그는 내 앞에 섰다.
헉, 설마 몸으로 갚으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몰라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그의 시선을 받아 내자 그의 손이 내게로 천천히 떨어졌다.
“미안해 할 필요 없어.”
그는 손을 내 머리에 올린 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항상 거칠게 행동하던 그에게서 보이는 의외의 섬세함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네게 졌던 빚을 갚는 것뿐이니까. 네 의견을 존중해.”
“에드아르…….”
아무래도 그는 내가 장난삼아 했던 행동들을 은연중에 고민한 것 같았다. 나는 그저 기역 저편으로 넘겨 두었던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그를 보고 있으려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마워요, 에드아르.”
“그럼 그곳에서 어떻게 살 예정이지? 나야 뭐 널 위해서라면 영토라도 내줄 수 있지만 말이야.”
나와 에드아르의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못 봐 주겠다는 듯이 난입하는 루드릭의 목소리에 산통이 와장창 깨어지자 고갤 돌렸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회를 놓칠 수 없는지 테이젤 또한 즉각 치고 들어왔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모두의 말에 동의하듯 에드아르의 말마저 허락으로 떨어지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쉽게 일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고마워요. 하지만 제가 살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영토면 충분해요.”
“그곳에선 어떻게 있으려고? 여기에 온 이유도 교단의 잣대에 움직일 수밖에 없어서이지 않나? 그곳으로 향한다고 하면 그들이 또 야단법석을 부릴 것이 자명한데.”
“아마 그들은 한동안 못 움직일 거예요.”
이의를 제기하는 에드아르의 말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밤사이에 그런 일들이 좀 있었거든요.”
암 못 움직이고 말고. 이른 아침부터 예의를 말아먹은 채 허공에서 나타난 악마는 엄마가 홀연히 사라졌음을 알렸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부재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기뻐했다. 엄마로 인해 교단에 잡혀 있던 족쇄가 풀렸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나는 고갤 작게 저었다. 그녀는 어디에서든 잘 살아갈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날 키워낸 사람이니까.
“그래도 교단이 당신을 간섭하는 일은 그대로일 텐데, 괜찮겠습니까?”
“아…….”
엄마가 사라졌다고 한들 그들이 내게 간섭하는 것을 그만둘 것 같진 않았다. 테이젤의 조심스러운 말에 나는 입을 벌렸다, 이내 확신에 찬 미소로 받아 내었다.
“그래서…… 염치없지만 하나만 더 부탁하려고 하는데. 들어주시겠어요?”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더 내게 모이는 순간이었다.
*
“비시아 님!”
교단에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멀리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날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은 흡사 악마라도 돌아온 듯한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시다니요!”
안색이 새파래진 그의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눈앞에서 침을 튀겨 가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잠시 입술도 달싹하지 않은 채 잠자코 있었다.
“설마 황태자께서 당신을 퇴짜 놓으시기라도 한 것입니까?”
본심과 함께 나오는 비아냥에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우상시하는 이들 주제에 여전히 말을 막돼먹게 하는 건 여전하네. 나는 여유롭게 고갤 가로로 저었다.
“그럴 리가요. 에드아르는 제게 오히려 상까지 하사하셨는걸요.”
“상이요?”
“네, 여기.”
나는 몸을 옆으로 비켜 그에게 뒤를 보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입이 경악으로 인해 찬찬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번쩍거릴 정도로 많은 패물이 마차마다 한가득 실려 있었다. 허세용으로 들고 온 것이긴 했지만 그의 입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이긴 했다. 이게 다 적당히 들고 가려고 했는데 말린 에드아르 탓이야.
한참을 금은보화에 눈을 떼지 못하던 그가 간신히 나를 향해 삐걱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럼 더더욱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군요. 왜 다시 돌아오신 겁니까? 황태자께서 잘 해 드린 것 같습니다만.”
“그럼요. 에드아르는 절 극진하게 대우해 주었어요.”
에드아르에겐 죄가 전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비, 비시아 님. 이건…….”
나는 사람을 불러 다른 마차도 그의 앞에 오게끔 만들었다. 그리도 다시 한 번 더 그의 얼굴은 넋이 나가기 시작했다.
“같이 동행했던 테이젤이 제게 보잘것없지만 주고 싶다며 준 것들이에요. 제 덕분에 두 나라가 피로 물들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거든요. 그 보답으로 고맙게도 각국에서 제게 상과 함께 영토를 하사해 주셨어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더듬기만 하는 그를 향해 친절히 부가설명까지 해 주었다. 이렇게 상냥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비, 비시아 님이요?”
그의 말에 고갤 끄덕였다. 그땐 살아남느라 경황이 없었는데 돌이켜 보니 그렇더라고. 그들이 날 차지하기 위해 얼떨결에 맺은 평화협정은 지금까지도 쭉 유지된 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둘이서 날 차지하려고 투닥대며 자주 얼굴을 보더니 어느새 친해진 모양이었다. 굳이 나에 대한 화제가 아니어도 둘은 사적인 모임을 가지며 친목을 다졌다고 한다.
둘이서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루드릭도 제게 황위를 찬탈할 수 있었던 것이 제 덕이라며 그들과 똑같은 보상을 주셨어요.”
나는 마지막 마차를 불러 세우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니. 대체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가 뻘뻘 대며 말을 잇질 못했다. 그의 동공은 여전히 심하게 흔들린 채로 눈앞에 놓인 재물들을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희 엄마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계신가요?”
“그, 그건.”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놀란 그가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나의 입꼬리는 더더욱 깊게 파였다.
“엄마가 여행을 떠났다는 소식은 간략하게 전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곳에 더 이상 머물 이유도 없겠군요.”
내 말에 그제야 아차 싶은 그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탐욕스러운 눈동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재물을 향하긴 했지만 그의 손은 내 손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하지만 당신은 신의 말을 전달할 사자입니다! 당신이 가신다면 신께선 매우 슬퍼하시며 백성들에게 내렸던 축복을 거둬 가실지도 모릅니다.”
“신께서 하시는 말들은 계속해서 듣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있는 곳에서요.”
“비, 비시아 님께서 있는 곳이라니.”
완전한 패닉 상태로 돌입한 그를 향해 나는 조심스레 등을 어루만졌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내 손은 그의 등을 희롱하듯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걱정 말아요. 그렇다고 교단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여태껏 받았던 은혜를 잊을 수 있겠어요.”
“비시아 님…….”
한 줄기 희망이라도 찾은 듯, 그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채찍만 주었으니 이제 당근을 줄 차례지. 나는 그를 향해 고갤 살짝 끄덕이며 시선을 맞추었다.
“당신들의 말을 전달할 수행원을 데려가도록 할게요. 그리고 신의 말씀이 저를 통해 내려올 때마다 그를 통해 이곳으로 전하겠습니다.”
“하지만,”
“어때요? 이 정도면 나쁜 조건은 아니죠?”
나는 그의 말을 자르며 강압적으로 내밀었다. 당근을 거부한다면 다시 채찍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앙상한 당근과 튼튼한 채찍 중에 쉬이 고르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제멋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곳에서 머물며 직접적으로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그곳에서도 신의 축복과 함께 전파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곳에도 신단은 있을 테니까요.”
어림도 없지. 이곳에서 머물 이유를 잔인하게 잘라 내었다.
“그리고 이 재물들은 각 나라에서 신의 축복에 감사하며 주신 것들이나 마찬가지인걸요. 이것들을 먼저 공물로 바칠 테니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재물이라는 말에 그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났다. 그제야 머리가 굴러가는 듯, 그의 눈동자가 나와 재물 사이를 두어 번 왔다 갔다 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수행원은 꼭 데려가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어지럽지도 않은지, 한참을 오가며 고민하던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가 맘을 바꿀까 봐 나는 재빠르게 동의했다.
“제가 데려갈 수행원도 이미 점찍어 두었는걸요.”
“그러십니까? 누구로 정하셨습니까?”
그의 말에 제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 입술을 훑는 동작에 그가 홀린 듯이 바라보자 나는 그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라디트요.”너를 먹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