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먹고 싶어-84화 (84/86)

84화

어색한 분위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엄마를 만나서 설득해 달라고 하긴 했지만 이건 아니지! 거기다 갑작스레 이곳에 도착하게 만든 장본인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서로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냉기가 서로의 몸을 휘감는 것만 같았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니? 그리고…….”

엄마의 시선이 나와 루드릭을 향했다. 언제 버렸는지 루드릭의 손에 있었던 카마수트라는 감쪽같이 없어진 상태였다.

“어떻게 이곳에 기척도 없이 들어올 수 있었지?”

“그, 그게요.”

어떤 미친놈이 날 이곳에 떨구었다고 실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가 엄마에게 그의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지 몰랐다. 괜히 이야기를 꺼내었다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너…….”

코를 찡그린 엄마가 내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어쩔 줄 몰라 몸을 옴짝달싹도 못 하는 사이, 그녀는 내 몸에 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그의 냄새가 나는구나. 혹시 그를 만났니?”

헉. 내 몸에 냄새라도 배인 건가? 재빠르게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았지만 아무런 향도 맡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아차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말해야 할 것이라면 조금 일찍 말해도 나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작게 고갤 주억거리자 그녀의 눈이 묘하게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도 들었겠구나.”

“엄마.”

엄마의 원망이 가득한 염원이라면 그에게 대충 들었던 참이었다. 어떤 일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만 그 원망이 얼마나 지독하면 모두를 죽이는 것이어야만 성에 차는가 싶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알았다면 이제 더 이상 날 방해하지 말고 엄마가 하는 일을 순순히 도와주렴. 이날을 위해 도대체 몇 년을 허비했는지 모르겠구나.”

다소 차분해진 엄마의 말이 이어졌다. 아까의 묘한 눈빛은 어디로 가고, 빙그레 웃고 있는 그녀의 웃음은 천사와도 같았다. 늘 어여쁘게 웃는 그녀의 미소는 항상 기묘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웃음이 편한 것은 아무래도 내가 이 웃음을 평생 보고 자라나서 그런 거겠지. 나는 그녀의 웃음에 작게 한숨지었다.

“엄마……. 죄송하지만 저는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요. 갑작스럽게 엄마의 일생일대의 소원을 말해도 제 인생을 망가트리면서까지 들어드릴 순 없어요.”

“겨우 그깟 말로 내가 여태껏 준비해 왔던 걸 버리라는 말이니?”

으음, 그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죠.

그녀의 바람에 비해 내 소원이 턱없이 허술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기 싫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여태껏 몰랐다가 이제 와서 자신이 준비한 대로 살아 달라니. 반항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직도 자식을 품 안에서만 기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보내 주지그래?”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루드릭이 갑작스레 끼어들었다. 내 어깰 감싼 그는 초면이 아닌 엄마와 시선을 그대로 견주고 있었다. 루드릭의 시선에 그녀의 미소가 일순 사라졌다.

“……황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경하드립니다.”

고갤 주억거린 엄마의 표정은 이내 표독스럽게 변했다.

“그리고 그게 우리 딸 덕분이라는 소리도 들었죠. 그럼 딸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 입 조용히 다물어 주시죠.”

교단 사람들을 향해 꼬박꼬박 부드러운 미소로 일관했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딱딱한 표정이 아닐 수 없었다. 독살스러운 그녀의 표정은 내가 그녀와 함께 살면서도 마주하지 못한 몇 안 되는 표정 중 하나였다.

“그 준비된 미래가 엉망진창이라는 것도 들었다만.”

하지만 그런 엄마의 표정에 반항하듯 루드릭 또한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네 딸의 배 속에 내 아이가 있거든.”

이게 무슨 소리야? 그의 말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방 안이 얼어붙는 듯했다.

“뭐, 뭐라고요?”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향해 외치자 그가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물론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미래예정이지만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날 향해 웃어 보였다.

“널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 마음은 항상 같다는 걸 잊으면 곤란하지.”

뭐야. 놀랬잖아. 나도 몰랐던 아이 소식에 손이 자연스레 배를 향했다. 내 배 속에 아이라니. 실감은커녕 상상조차 가질 않았다.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지금 상황에서 아일 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고로 네 뜻에 장단 맞춰줄 생각은 없어.”

“폐하의 뜻 따위 제가 알 바 아니죠.”

엄마의 말은 가차 없었다. 그를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은 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제가 준비한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허망하게 무너트릴 순 없습니다.”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녀는 시선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알겠니? 비시아. 내 사랑스러운 딸. 살아가면서 엄마 속 한 번 썩인 적 없잖니.”

그녀의 말이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살아가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들이라길래 열심히 들었던 것에 불과했다. 애초에 카마수트라를 배우는 것 외엔 그녀의 육아 방식은 자유롭기 그지없었다. 방임 교육에 가까운 그녀는 내 행동에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가끔 얼굴을 다치거나 몸에 상처를 낼 때를 제외하고선 말이다.

지구에서의 기억이 고스란히 있던 내겐 그녀의 교육은 속을 썩일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엄마의 속을 썩이려 들다니. 엄마는 많이 속상하구나. 더 이상 엄마를 괴롭게 하지 말고 이리 오렴.”

“어, 엄마.”

“이제 그만 끝내지그래.”

그녀의 말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말을 더듬는 순간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여기에 달랑 떨어트린 주 원흉이 당당하게 공중에 뜬 채로 나타났나.

“너.”

온화했던 그녀의 표정이 가면이라도 드리운 것처럼 살기를 띄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솔직히 네가 원망하던 인간은 이미 죽었잖아. 그것도 네 손으로 직접. 그런데 여기 와서 또 뭘 더 하려고 그래?”

“너, 잘도 그런 말을……!”

죽였다고? 그의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이라곤 한 번도 제대로 못 들어보았을 법한 엄마가 살인을 저질렀다니. 믿을 수 없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거기다가 효심 갸륵한 네 딸이 널 죽지 않게 해 줬는데 뭘 더 망설이는 거야? 나 같으면 해방감부터 만끽하겠어.”

“비시아가?”

엄마의 시선이 빠르게 내게 닿았다, 사라졌다.

“그래서 내 딸한테 너의 냄새가 났던 건가. 더러운 자식. 나랑 계약했으면서 이런 식으로 배신할 수 있어?”

“배신이라니, 그런 짜릿한 말은 하지 말아 줄래?”

으, 저 변태. 엄마에게도 거리낌 없이 행하는 변태적인 행동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잘생겨도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들게 만드는 저 천부적인 재능은 왜 자꾸 끌고 들어오는 거람. 루드릭의 팔 안에서 파르르 떨자 이상하다는 듯이 그가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너 따위한테 허락이라도 구하러 온 거라고 착각하면 곤란해. 그녀가 나랑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는 걸 알려 주러 온 거지.”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나도, 엄마도 몸을 멈추었다. 거침없이 힐난하는 그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엄마는 몸을 굳힌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성인인 그녀가 왜 네 말대로 행동해야 하지? 그리고 내 계약은 어디까지나 그녀를 만들어 준 것. 더 이상 이행할 명분은 없어.”

그리고 엄마를 바라보던 그가 시선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착각하지 말도록. 그녀가 하도 사정사정해서 네가 놀라지 않도록 와서 말하는 것뿐이야. 이 이상 인과율을 늘리면 너도, 그리고 나중에 널 받을 나도 곤란해져.”

“엄마, 난.”

너무 차갑게 일언하는 그를 도저히 봐줄 수가 없어서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그가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겼다.

“새로운 계약자의 소망이 끝났으니 이만.”

엄마를 향해 손을 재빠르게 뻗었지만 닿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닿지 못한 채 뻗은 손가락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어느새 우리 집으로 돌아온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나는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그의 행동이 염려되어 이것저것 사족을 붙이긴 했지만 이렇게 행동할 줄은 생각조차 못 했다.

“뭐? 난 네 소망대로 솔직하게 해 주었는걸.”

“그렇게 해 달란 적 없어요!”

“없긴. 네 소망을 그대로 이뤄 주었는데 뭐가 나쁘지? 거기다 네가 아직도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한심한 작태를 계속 봐 달라는 말은 너무 잔인하지 않아? 성인이라고 품에서 벗어난 지도 오래되었으면서 아직도 얽매이는 건 뭐지?”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말에 얽매였나?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순 없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그녀의 모습에 화가 난 것보다도 그리움이 먼저 반긴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제 그만 그녀에게서 벗어나도록 해. 이제 계약도 흐지부지되었으니 그녀도 한동안 제정신 차리고 다시 멍청한 짓을 이행하긴 힘들 테고 말이야.”

“잘 되었군.”

그 말에 루드릭이 날 조금 더 힘있게 껴안았다.

“이 지긋지긋한 나라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이제 그만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도록 해.”

루드릭과 악마의 말이 동시에 들려오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얼떨떨하게 열린 가능성의 문에 쉬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아직 완전하게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 찜찜하게 제 가슴을 두들기고 있었다.

조심스레 호흡을 내쉬었다.

“넌 어딜 가고 싶지?”

“저는…….”

그의 말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엄마에게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더 나은 선택지가 이것이었다고, 언젠가 웃으며 보여 주고 싶었다.

“다시 천막으로 가요. 가서 테이젤과 에드아르, 그리고 루드릭,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너를 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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