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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먹고 싶어-82화 (82/86)

82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맥락도 없이 갑작스레 중얼거리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조차 힘들었다.

“제가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이곳에서 출생한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런 거 말고.”

그는 잠깐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흥미로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전혀 못 들었나 봐? 네 아버지 쪽도?”

아버지? 그의 입에서 전혀 들을 수 없었던 단어를 듣자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면서 아버지라는 단어는 내게 없는 단어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이곳에 이방인들이 못 들어오는 것도 있었지만, 육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남자를 들이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필요 없는 존재는 있으나 마나라던가. 그런 이유로 나 말고도 다른 아이들의 집에도 아버지라는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태어날 때부터 없는 것에 익숙해져서 물어볼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왕이면 친부의 생사 정도는 확인할 수 있음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그완 얼마나 닮았는지 호기심이 드는 것도 있긴 했다.

“……아버지에 대해 알아요?”

내 말에 그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가리켰다.

“그거 나거든.”

“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아, 정확히는 나보단 나의…….”

“으아아!”

그의 말에 나올 단어에 기겁하며 그의 입을 재빠르게 막았다.

“알려 달랬더니 무, 무슨 이상한 소릴 하는 거예요!”

“뭐 어때. 사실인걸.”

그는 내 손을 치워 내고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역시 이상한 놈이 틀림없어. 나는 그를 상대하는 대신 재빠르게 고갤 돌렸다.

“루드릭! 어디 있어요! 루드릭!”

밖에 있을 그를 생각하며 한 번 더 세차게 그를 불렀다.

“루드릭!”

“방 밖에 있는 이를 부르는 거라면 소용없을 거야. 방해될까 봐 내가 미리 손을 써 뒀거든.”

뭐라고? 황당한 얼굴로 다시 고갤 돌려 그를 바라보자 빙그레 웃는 얼굴과 마주쳤다. 그를 무시한 채 다시 한 번 그를 부르려다 그만두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거짓말을 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이런 위급한 상황마저 도움을 주지 않는 루드릭이 원망스러워 마음속으로 잘근잘근 씹어 대었다.

“……원하는 게 뭐죠?”

결국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자 정면으로 돌파하는 걸 택했다.

“말했잖아. 널 보고 싶었다고.”

“그게 끝이에요?”

그 말에 그는 스산한 웃음을 보였다. 기분 나쁘게 찢어지는 입꼬리를 보자 자연스레 불쾌함이 마음속에서 일렁였다.

“상황이 하도 재밌게 굴러가야 말이지. 도저히 그냥 지켜보기엔 아깝더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렸을 때 널 보면 엄마 말이라곤 곧 죽어도 따르는 아이였단 말이지. 그런데 커서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다는 게 참 새삼스러워.”

내 유년시절을 잘 알고 있다는 투로 말하는 그의 말과는 달리 내 머릿속은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그를 한 번이라도 보기는커녕 어렸을 적 그와 함께한 기억은 단 하나도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억은 꽤나 구체적이었다.

마치 보기라도 한 듯이 내 어린 시절에 대해 한참 주절거리며 늘어놓던 그가 날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궁금하지 않아? 너에 대한 것들이. 네가 무엇인지 말이야.”

“엄마랑 같은 신체라면 이미 알고 있어요.”

“아니. 너는 조금 특별해. 저주를 받고 태어났거든.”

“저주?”

또. 나랑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던 단어가 갑작스레 나오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저주라니. 여태껏 살아오면서 저주라고 느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다 불현듯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그 저주가 일정 정기 이상 먹으면 살이 찌는 건 아니겠죠?”

“아, 맞아. 그런 것도 있었지.”

이게 정말. 그렇게 따지면 엄마가 왜 여태껏 말을 해 주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원래 없는 능력이었으니 그녀 또한 몰랐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있지만 넌 네 이름 자체가 저주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 이름이 저주라니. 거짓말하지 말아요. 엄마는 오히려 제 이름을 이용해 한 자리 단단히 꿰차길 원하셨어요.”

“내가 네게 거짓말을 해서 뭘 얻겠어.”

머릿속이 과부하 걸려 고장 나기 직전이었다. 자꾸만 들어오는 충격적인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변명 아닌 변명만 내뱉자 그의 눈이 가늘게 늘어졌다.

“네 엄마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어. 단지 그 자리가 피로 얼룩지는 자리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뿐이지. 네 이름을 걸고 한 사람과 평생의 약속을 맺으면 대륙을 얻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게 저주예요?”

저주이기보단 축복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그의 곁들이는 말이 치고 들어왔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지. 달콤함은 그때뿐이야. 얻는 순간 온갖 재앙이 들이닥쳐 멸망하는 건 시간문제니까.”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황당한 저주였다. 판타지 소설책에서나 들어 볼 법한 오글거리는 저주라니. 그것도 그걸 부탁한 게 우리 엄마라니!

“그런 저주를 왜 저한테 건 거예요?”

“네 엄마가 원했으니까.”

“엄마가요?”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 되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애초에 엄마가 그런 부탁을 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엄마는 나를 이용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거기다가 엄마가 원한 저주를 내가 발휘할 수 있도록 권한을 넘겨 준 것인지 이해 가질 않았다.

“엄마는…….”

왜? 여태까지 하던 엄마의 행동과 괴리감이 생기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권력을 원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럴 리가. 분명히 살의를 가지고 저주를 걸어 달라 부탁했는걸.”

그걸 들어 달라고 해서 다 들어주냐? 황당함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당신은 엄마의 그런 부탁을 들어준 거예요? 왜?”

“왜긴. 재밌잖아.”

아, 네……. 물어본 내가 잘못이었다. 오롯이 재미만을 따지며 시시덕거리는 이에게 뭘 물어보고 있는지. 물어보느라 소비한 힘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그들이 네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성녀라고 떠받드는 게 어지간히 웃겨야지. 우릴 보면 퇴치해야 한다, 악마다, 하고 손가락질하면서 말이야.”

그의 말에 네네, 하며 넘겨듣다 순간 몸을 멈추었다. 악마?

“……당신 설마 악마예요?”

“이제야 눈치챈 거야? 역시 지능이 모자라게 태어난 건가.”

“그럼 우리 엄마랑 계약에 응해서…….”

“맞아. 너 정말 하나도 몰라? 네 엄마가 안 가르쳐 주었나?”

가르쳐 주었으면 물어봤겠어? 당연한 말에 그를 노려보자 그는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래, 모를 수도 있지. 네 종족은 정확히 말하면 마녀야. 우리와 계약하기에 최상의 조건으로 태어나지. 너네 엄마도 별다를 바 없었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발바닥으로 바닥을 비볐다. 그와 동시에 여태까지 보이지 않았던 마법진이 그의 발짓 몇 번에 방 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크게 나타났다.

“이, 이게 뭐예요?”

“네 엄마가 날 소환한 마법진이다.”

그는 으스대며 말했다.

“어느 날 소환에 응해 눈을 떴더니 지금 네 엄마가 울분에 가득 찬 얼굴로 내게 세상을 멸망시켜 달라고 빌더군.”

“그런 허무맹랑한 소문을 들어준 거예요?”

그의 말에 황당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언제 적 유행하던 소원이야?

“아니, 그것보다 왜 하필 나예요? 내게 저주를 걸 필욘 없잖아요!”

그는 내 말에 검지를 살짝 흔들었다.

“소원이 너무 크잖아. 그런 건 계약한 자가 죽어도 가능할까 말까 한 문제라서 말이야. 그런데 그럼 리스크가 너무 크게 되니…… 세대를 나눠 저주를 반으로 줄여 준 거지.”

여태 웃으면서 말하던 그가 뚝, 멈추었다. 새빨간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는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미 효력을 발동되었어. 네가 매개체긴 하지만 말이야.”

“……만약 이루지 않으면요?”

“뭐?”

아무리 효력이 발동되어도 내가 매개체라면 말이 달라진다. 엄마와 이 정신 나간 악마가 바라도 내가 도망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그 소원을 원하지 않아 도망치면 어쩔 거죠?”

“하하. 그렇게 된다면 거기서 끝날 뿐이야.”

자신에게 불리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악마는 큰 소리로 쾌활하게 웃어 재꼈다.

“물론, 대가를 충족시키지 못한 너희 엄마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죽겠지만.”

그의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가 죽는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내 인생을 설계하며 귀찮게 하고 있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활을 하고 싶었을 뿐, 그녀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가 내게 이상한 것만 가르친다고 한들 엄마는 엄마였다.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차지한 그녀의 행동이 그저 거짓말이라고 믿기엔 어려웠다. 성인이 될 때까지 꾸준히 내게 사랑을 준 엄마의 행동을 그저 거짓이라고 믿기엔……. 거기까지 생각하고 고개를 저었다.

역시 엄마를 죽이면서까지 그럴 순 없었다.

“……엄마가 죽지 않는 방법은 없어요?”

“너무 까다로운 거 아냐? 그런 귀찮은 건 생각 안 해 봤는데.”

자기 일이 아니라고 너무 안일하게 구는 그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엄마를 구하기 위해서 그녀의 말을 듣기엔 내 인생이 너무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펼쳐질 일에서 도망을 치는 순간 그녀의 목숨이 위험했다.

그러던 순간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제 입술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럼 저랑 계약해요.”

그는 내 말에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멍하니 몇 초간 바라보던 그는 이내 큰 소리로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만들어 낸 매개체인 너와 계약을 하자고?”

스스로가 말하면서도 웃긴 것인지 그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배를 잡고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웃는 그를 향해 나는 뻔뻔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래요. 엄마가 죽지 않는 걸로 저와 계약해요.”

“그럼 넌 나한테 뭘 줄 수 있는데?”

“……유흥거리?”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평생을 이 잘난 얼굴로 믿고 살아온 무일푼인 내겐 재물도 권력도 아무것도 없었다.

“웃기는군. 고작 인간을 흉내 내는 네가 무슨 유흥거리를 줄 수 있다는 거지?”

“저요. 저를 드릴게요.”

“넌 원래 내 것이다만?”

“제 삶을 드릴게요. 원한다면 이름도 드릴 수 있어요.”

“이를 어쩌나. 향락과 쾌락을 즐긴다곤 하지만 너를 책임지는 건 내 취향이 아닌데.”

겸사겸사 저주도 넘겨 줄 생각이었는데 매몰차게 거절하는 말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그에게 줄 것이 생각나질 않았다. 이렇게 예쁜 얼굴도 소용이 없다면 뭘 줘야 하지?

한참을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순간마저도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줄곧 배웠던 카마수트라밖에 없었다.

“그럼 제 곁에 있으시던가요. 쾌락을 즐긴다면 그걸 구경시켜 줄 자신은 있어요.”

“결국 너만 원하는 걸 다 이루고 즐기겠다?”

그래. 내 말이 가당치도 않겠지. 하지만 이런 내 예상과는 달리 그는 웃으면서도 묘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심심하진 않겠어.”

뭐? 갑작스레 드는 실낱같은 희망에 재빠르게 고갤 올렸다.

“네 행동은 이미 잘 보고 있었어. 구경하기에 나쁘지 않더군.”

“그, 그럼 협상 완료예요?”

“네가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뭐에요, 그게.”

바람 빠지는 소리에 뺨을 실룩대자 그는 으스대며 내 몸을 손으로 훑듯이 아래로 내렸다.

“아니면 너도 네 엄마처럼 확실하게 계약하던지.”

확실하게 계약하는 방법?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다른 손으로 내 뺨을 감싸 쥐었다.

“알잖아. 몸으로 계약하는 방법.”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이 은밀하게 허리춤에 가져 가졌다.너를 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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