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우리 종족은 자신의 이름을 누가 지어 주는 것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고 어느 순간 자신의 이름을 알아차린다고 했다. 그래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단 지칭하여 부르는 것이 익숙했었다.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이름을 우리 종족은 암묵적으로 방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내게 돌연 갑자기 생겨나는 이름은 없었다. 항상 내 이름을 전생 이름으로 기억했더니 어느덧 그 이름이 진짜 내 이름으로 된 것 같았다.
이름은 인간보다 우월한 우리 종족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그자의 이름을 알게 되고, 부르면 종속 관계도 아닌데 속박되고는 했다. 별도의 다른 방법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름.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 사람과 관계를 영구적으로 맺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우린 서로에게 이름을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을 키워 준 어미에게도 가르쳐 주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평생을 믿고 함께할 이가 아니라면 이름을 꺼내는 일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나는 엄마의 갑작스러운 언급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내 이름은 왜?
“네가 염원하던 일이 아니니.”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때 그러고자 노래를 부른 적이 없잖아 있긴 했다. 물론 엄마는 그걸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고. 그랬는데 별안간 그녀의 입에서 각인의 말은 다소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꿈 이제 안 원하는데요.
“그러고 보니 엄마는 이름 가르쳐 준 사람 있어?”
엄마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재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내 부친 되는 이에 대해서 엄마는 입도 한 번 뻥긋하지 않았다. 날 때부터 없었던 사람이라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아직 살아는 있는지 궁금했다.
“그 사람 살아 있어? 그럼 혹시 그 사람이…….”
“비시아. 사랑스러운 내 딸.”
엄마는 내 뺨을 감쌌다. 한 손으로는 어깨를 쥐며 굽이쳐 흐르는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귀 뒤로 넘겼다.
“이 엄마가 그딴 작자들이 알게 내버려 둘 것 같니? 이 엄마의 이름을 아는 자는 모조리 죽였단다.”
나는 그녀의 말에 오싹해져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녀의 입으로 듣는 진실은 생각보다 잔혹했다.
“사랑을 믿지 말렴. 언제나 너의 발밑에 두어야 한단다. 그들보다 널 우선시하렴. 네가 이용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리렴.”
내게 행동은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강압적인 말은 늘 그래왔듯이 내 행동을 꽁꽁 옭아매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엄마의 말은 기묘하게 거부할 수가 없었다. 비단 엄마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한국에 있었을 때의 부모 자식 간의 느낌과는 달랐다. 그녀의 부탁 아닌 부탁을 들을 때면 머릿속이 새하얘져 간단한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휘둘려선 안 돼. 네가 그들 위에 군림하는 거야.”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타이밍 좋게 나갔던 그가 들어오자 그녀의 손 또한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딸이 내일까지 정해 준다고 하는군요.”
“엄마!”
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엄마를 다급하게 불렀지만 이미 말은 떨어진 후였다. 엄마의 말에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건 당연히 그였다.
“오, 그렇습니까! 듣던 중 기쁜 소식이군요.”
“저는 그런 게…….”
아직 때가 아니었다. 교단은 지금보다 더 안달 나야만 했다.
“딸. 엄마는 믿는단다. 알지?”
하지만 내게 엄마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녀의 앞에만 서면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결국 아무런 의견도 피력하지 못한 채 방을 빠져나왔다.
으으, 혼이 털린 기분이야. 찝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엄마의 말대로 되지 않고자 발악했는데 모든 것들이 그녀의 손바닥 아래서 놀아난 것만 같았다.
무력해진 자신을 한껏 느끼고 나오자 기분이 땅 아래로 꺼지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라면 내일 끌려나가 골라잡기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머리를 굴리고자 애를 썼으나 거처에 도착할 때까지 별달리 뾰족한 수는 생기지 않았다.
이제 익숙해진 자신의 거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도 내일이면 이별을 고해야 한다니. 또 타인에 의해 정들었던 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더 묵직한 숨이 내뱉어지는 순간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에 작은 노크 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소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은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에드아르.”
그가 어쩐 일이지? 간만에 내 거처에서 보아 반가웠지만 놀라움은 감출 수 없었다. 루드릭이 싫다며 내 거처에 아예 발길을 끊은 줄로만 알았는데.
“잘 지냈나?”
능청스럽게 내 안부를 묻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새삼스럽게 자주 보는 사이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잘 지냈죠.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내일 갑자기 결정을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벌써 퍼진 거예요?”
가볍게 고갤 끄덕이는 에드아르의 행동에 이마를 짚었다. 하여튼 이런 일에만 행동이 빠르다니까.
“사실인가?”
“……사실이에요. 저보다 한 벌 더 앞서 먼저 선수 칠 줄이야.”
투덜거리며 잊고 있었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멀뚱하게 서 있는 에드아르를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왜 갑자기 날 이렇게 빨리 보내려고 하는 걸까? 끊임없이 들어오는 압박은 있었지만 이렇게 강압적인 행동은 처음이었다. 엄마 또한 여태껏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제재를 취하는 것도 수상쩍었다. 그러고 보면 엄마의 말이 조금 모순적이기도 했다. 전엔 나로 하여금 권력을 원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말은 다소 달랐다. 뉘앙스는 비슷했지만 말에 담긴 뜻은 전혀 다른 걸 원하고 있었다.
도대체 엄만 뭘 원하는 거지? 그리고 날 이용해서 얻으려고 하는 건 또 뭐고? 연신 고갤 갸웃거렸으나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망설이고 있나?”
“그럴 리가요.”
“그럼 도대체 무얼 그렇게 고민하는 거지? 정 방법이 없다면 내 곁으로 오는 방법도 있다만. 어차피 모든 것들이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아닌가.”
“누누이 말했지만 전…….”
번복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처음? 그러고 보니 에드아르와 처음 만난 곳은 엄마가 날 집에서 떨어트린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 당시엔 아무런 생각도 없었지만 엄마는 갑자기 공간을 찢어 우거진 숲속을 안내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세계에 다니면서 마법이라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에드아르. 혹시 마법 알아요?”
“마법? 연금술을 말하는 건가?”
“아뇨. 그거 말고요. 사람이 날아다닌다거나, 허공에서 갑자기 물건이 나타나게 하는 거요.”
“그런 허무맹랑한 소린 들어본 적 없다만.”
역시. 만약 이 나라에 마법이라는 것이 있다면 한 나라의 황태자나 되는 이가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담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날 길 한복판에 떨어트릴 수 있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입술 물어뜯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 에드아르의 손을 찾아 잡았다.
“저……. 정했어요.”
“뭘 말이지?”
“가는 곳이요. 에드아르와 함께 가겠어요.”
내 말에 잠시 에드아르의 눈이 커졌다, 돌아왔다.
“갑자기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뭐지?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겠다던 네가 갑자기 정할 리 없을 텐데.”
다소 당황하던 얼굴빛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 마음을 완벽하게 간파해 낸 그의 말에 나 또한 숨기지 않고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엄마의 눈을 피해 제가 처음 나타났던 곳에 가고 싶어요.”
“처음 나타났던 곳이라면 너와 내가 만났던 곳인가?”
그의 말에 작게 고갤 끄덕이자 그는 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운 곳이군. 그곳엔 왜 가려는 거지?”
“모든 것을 시작한 곳이니, 모든 것을 마무리 지으려고요.”
“그러고 보니 깊은 산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차림새로 나타난 게 너였지.”
“네……. 그곳에 저희 집이 있거든요.”
아마도. 추측이지만.
“그런 깊은 산속에? 혼자 사는 건가?”
“아니요. 엄마랑 같이 살았을 텐데……. 정확하게 가는 길은 몰라요.”
내 말에 에드아르가 가볍게 고갤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담 같이 가야겠지. 하지만 괜찮나? 다른 이들의 반박이 심할 텐데.”
루드릭과 테이젤은 괜찮았다. 애초에 루드릭은 내 계획을 다 아는 이였고, 테이젤은 시간을 들여 설명해 준다면 납득해 줄 이였다. 다만 내가 걱정하는 이는 다른 곳에 있었다.
“에드아르는 괜찮아요?”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남을 이용할지언정, 남이 자신을 이용하는 것엔 참을 수 없어 하는 것이 그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내 욕심으로 이용하려고 하고 있었다. 기분 나쁜 건 아닐까, 하는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다.
“나야 네가 온다는 데 기쁘지 않을 수가. 이왕이면 이대로 평생 머물러줬음 좋겠다만……. 네 모습을 보니 그럴 것 같진 않군.”
그의 말에 고갤 끄덕이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에드아르의 긍정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석연치 않았다. 풀이 죽은 표정으로 갈 곳 잃은 시선을 헤매고 있자 에드아르가 드물게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릴 쓰다듬었다.
“데려가면 나야 나쁘지 않지. 가다가 마음을 바꿔 준다면 더더욱.”
장난스레 말한 그는 내 손을 슬쩍 빼고 멀어졌다.
“그럼 난 내일 갈 채비를 해 봐야겠군.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가도록 하지.”
그의 말에 나는 손을 흔들어 그를 배웅했다. 에드아르의 뒷모습을 보며 한참 동안 생각에 빠졌다.
*
다음날이 되자 어김없이 별다른 말 없이 날 찾으러 온 이들이 들이닥쳤다. 예전과 비슷한 옷을 입힌 후 그들은 다시 한 번 더 날 무방비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던져졌다.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들. 다수는 그저 흥미만을 가지고 온 이들의 모습에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에드아르를 택하겠습니다.”
이미 테이젤과 루드릭에겐 말을 해 둔 참이었다. 눈으로 그들의 안색을 살피듯 바라보던 난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별다른 내색을 표하지 않는 걸로 보아선 무탈하게 넘어갈 것 같았다.
“여신님의 고귀한 사명을 가진 비시아 님께서 고르신 선택을 축복으로 맞이해 주시길 바랍니다.”
형식적인 말이 끝나자 의례적인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상황이 매우 만족스러운 것인지 진행하는 이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럼 비시아 님과…….”
“잠깐.”
그런 그의 말을 끊는 이가 나타나자 모든 이들의 이목이 단번에 그를 향했다. 자신에게 모이는 이목을 즐기듯 가볍게 웃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도 같이하겠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돌발스런 그들의 행동에 놀라는 건 교단만이 아니었다. 동그랗게 뜬 눈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테이젤과 루드릭을 번갈아 보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다짜고짜 내 영토로 향하겠다는 건가?”
다소 언짢다는 듯이 에드아르가 투덜대자 테이젤은 가늘게 웃어 보였다.
“당신네 영토엔 관심도 없습니다.”
테이젤의 시선은 곧 내게 닿았다.
“비시아. 적어도 가는 길목까진 당신의 안위를 배려하고 싶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둘이서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완벽하게 행동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너를 먹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