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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먹고 싶어-77화 (77/86)

77화

그 날이 있는 직후 테이젤의 불만은 눈에 띄게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테이젤이 루드릭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도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루드릭이 그의 시간에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도 한몫했다. 처음엔 루드릭이 언제 찾아올까 전전긍긍하는 테이젤이었지만 계속해서 보이지 않자 그도 안심한 듯이 나와 함께하는 시간에 집중했다.

그럼 뭐해. 나는 작게 한숨 쉬었다.

갑작스러운 루드릭의 등장으로 꼬인 것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고 계속 쫑알거리자 내 뒤에 있던 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왜 자꾸 투덜거려?”

몰라서 묻나? 나는 등 뒤에서부터 날 껴안고 있는 루드릭을 흘겨보았다.

“당신 때문에 일이 틀어졌잖아요.”

“내가 뭘? 난 아무것도 안 했다만.”

그의 말에 답하는 대신 작게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대답을 피한 채 구시렁거리기만 하자 내 허리를 끌어당기는 손의 힘이 묘하게 강해졌다.

“설마 내가 온 것 자체만으로 문제라는 건 아니겠지?”

“안 본 사이에 독심술이라도 배운 거예요?”

어떻게 알았지? 그에게 제대로 말해준 적 없었는데 제대로 알고 있자 놀란 눈으로 루드릭을 바라보았다. 루드릭 또한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날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작은 바람이 모였다가 흩어졌다.

“단순히 내가 온 것 때문에 그런 거라면 이제 슬슬 해결될 문제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말이야 쉽지. 루드릭이 온 것으로 인해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는 상상도 못 할 것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계획하던 작전을 처음부터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무겁게 제 머리를 짓눌렀다.

“애초에 내전으로 바쁜 이가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게 제 잘못이긴 하네요. 위치부터 잘못 선정했으니까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기만큼 갑자기 가도 이상할 게 없는 자리는 없었는데. 완벽한 위치선정이라도 좋아했던 때가 엊그제였는데. 또 머리 아프게 고민해야 할 상황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제가 향하려는 장소 자체가 테이젤과 에드아르의 나라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이에요. 위치성으로도 완벽하고 허울 좋은 명목도 깔끔하죠. 그래서 그들이 초조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자 눌러 두었던 짜증이 다시 치밀어 올랐다. 한순간에 무너지게 만든 장본인을 원망의 눈초리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루드릭, 당신 때문이에요.”

“잘됐네. 나도 그 자린 마음에 들지 않아.”

“네?”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루드릭의 행동에 당황해 입을 벌렸다.

“아니면 내게 그냥 오면 되는 거 아닌가?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지?”

그가 장난치는 건가 싶어 안색을 살폈지만, 그의 얼굴엔 웃음기 하나 없었다.

“내게 오면 뭐든 다 해 준다고 했는데.”

그는 사람 혹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진심 어린 표정을 짓는 그는 내 얼굴을 손등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에 속눈썹을 파르르 떨자 그의 입가에 미약하게 미소가 자리 잡혔다.

“비시아. 내게로 와.”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달콤한 제안. 달콤하게 유혹하는 방법까지. 누가 들었다면 단박에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예전의 나였더라도 그랬을지 모르지. 나는 움직이지 않는 고갤 간신히 저었다.

“……안 돼요.”

그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기엔 욕심이 많아졌다. 많은 밥을 섭취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힐수록 더 많은 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가지 밥과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싶다던 예전 희망 사항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욕심 많아 보이는 얼굴이군.”

내 눈빛을 읽어낸 루드릭의 말에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정말로 길가 아무 자리에나 돗자리 펴고 주저앉는 건 어때요? 돈 벌리는 건 부지불식간일 것 같은데.”

내 말에 그가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았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정말 족집게가 아닐 수 없단 말이야. 분명 한국에서 점집 차리면 흥하다 못해 방송에도 나왔을 게 분명했다.

루드릭을 올려다보았다. 내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람.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있어 제일 편한 곁이 그 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를 향해 간다는 말 대신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제가 유일하게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건 루드릭, 당신뿐이에요.”

“이걸 영광스럽다고 해야 할지.”

“제 성적 관념을 일깨워 준 게 누군데요?”

오로지 필기만으로 공부했던 내게 실습으로 새로운 세계를 깨우치게 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 흘겨보자 그는 목울대를 울리며 웃었다.

“조금 후회 중이야. 이렇게까지 적응을 잘 할 줄 알았더라면 더 느긋하고 나만 알게 가르치는 건데.”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내 뺨을 감싸 쥐었다. 부드러운 리드에 그가 곧 무엇을 할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눈을 감자 더운 숨결이 곧 입술에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비시아!”

노크도 없이 벌컥 열어젖히는 문에 자연스레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무래도 날붙이 말고도 한 가지 더 제한을 두어야 할 것 같았다. 내 이름을 다급하게 외친 자는 나 말고도 다른 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잠시 몸을 멈추었다 안으로 들어왔다.

“요즘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응?”

다그치듯 행동하는 라디트의 행동에 눈을 깜빡였다. 뭐 하고 다니나니. 난 거처에 얌전히 있었는데요?

“너 소문난 거 몰라?”

“소문이라면 알고 있는데…….”

잊고 있었던 허무맹랑한 소문을 떠올리며 눈을 깜빡였지만 라디트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니, 그 소문 말고!”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발을 작게 굴렀다.

“네가 그!”

다급하게 소리치려던 라디트가 입술을 다물었다. 눈치를 보듯 입술을 뻐끔거리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이를 향하고 있었다. 라디트의 눈이 어딜 향하고 있는 것인지 알게 되자 나는 루드릭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 시선에 루드릭은 가볍게 고갤 끄덕였다.

무언의 긍정. 말을 이어나가도 된다는 행동을 취하자 그제야 라디트의 입술이 떨어졌다.

“……다른 사람들이랑 번갈아 가며 잔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그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그 소문이라면 진작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일부러 과시하듯 드러낸 것도 나라, 언제 퍼질지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네가 아무리 특별한 사람이라지만 그런 소문이 나면 평판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잖아?”

하지만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라디트에겐 내가 그저 답답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지은 라디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네 행동을 말리진 않아. 다만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마. 그들이 얼마나 고지식한지는,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라디트.”

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고마워. 하지만 괜찮아.”

세간의 소문 따윈 어떻게 흘러도 괜찮았다. 하지만 라디트는 예외였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고민되어 한걸음에 달려와 준 그가 마냥 사랑스러워 보였다. 자신의 코가 석 자일 텐데 내 걱정을 해 주는 그가 어떻게 안 예뻐 보일 수 있을까.

“나는 그저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것뿐인걸. 그리고 그 사람엔 너도 포함되어 있고.”

“어?”

내 대답에 라디트의 몸이 경직되었다.

“왜? 싫어?”

“아니, 그게…….”

생각지 못했던 답이었던 것인지 라디트의 얼굴이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초점을 잡지 못하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네가 내 곁에 있게만 해달라고 했잖아. 하지만 넌 그 이상이야. 내게 넌 특별해.”

마지막 말까지 던지자 라디트는 넉다운 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느덧 자신의 머리만큼이나 새빨개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그가 재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아, 아무튼! 이거 때문에 온 것만은 아냐.”

완전히 구워 삶아 먹기 전에 가까스로 빠져나간 라디트를 향해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조금만 더 하면 완전히 넘어오는 건데. 매번 아깝게 빠져나가는 그를 향해 입술을 축이는 순간이었다.

“비시아. 예하께서 널 부르셔.”

*

“어서 오십시오, 비시아 님.”

들어가기 싫은 문을 최대한 천천히 열자 반색하며 안에 있던 이가 먼저 인사를 건네었다.

“요즘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본의 아니게 하루하루를 바삐 지내고 있게 되었습니다.”

맞아 정말 자의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매일매일 다른 이들을 만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단 말이야. 그냥 일주일에 두세 번 테이젤과 에드아르를 만나면 될 줄 알았던 내게 고운 망른 나오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직접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어 더욱 그러실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그 또한 소문을 모르는 것은 아닌지 말 속에 뼈를 넣어 말했다. 너네가 안 모셔서 그런 거잖아. 나는 핀잔을 주듯 툴툴거리며 말했다. 내 말에 그는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엔 무게가 실려 있었다.

“비시아 님. 이제 그만 결정을 내려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마지막 후보도 만나보셨지 않습니까.”

“아아.”

꽤나 진중하게 말하는 그완 달리 내 입엔 느긋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죄송해요. 마지막 후보까지만 만나면 될 줄 알았는데, 더욱 고르기가 힘들어져서요.”

“하지만 그 때 말은…….”

“그땐 이렇게까지 고민할 줄은 몰랐던가 보죠.”

“비시아 님!”

“비시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게 다그치는 순간이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고운 미성의 소리가 들리자 내 고개가 휙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엄마?”

하도 보질 못해 돌아간 줄로만 알았던 그녀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죄송하지만 제 딸과 먼저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그렇게 하십시오. 부디 비시아 님께서 마음을 돌리길 바라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여전히 엄마의 웃음은 남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오죽하면 그가 나를 향해 성을 내던 것도 잊고 목소리를 다듬으며 시선을 돌릴까. 마법 같은 그녀의 한 마디에 그가 자리를 비키고 오로지 둘만의 시간이 남게 되자 나는 근처 있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내 행동에 그녀 또한 제일 가까운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도 못 정했니?”

“응. 생각보다 고르는 게 어려워.”

“아무나 정하는 건 어때?”

“엄마는 루드릭이 싫다며?”

“그자를 고르고 싶은 거야?”

“아니.”

정확히는 모두를 고르고 싶었지만, 그 말만큼은 입안에 두기로 했다. 엄마가 얼마나 개방적인지는 모르지만 찬찬히 공개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비시아, 내 딸. 중요한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단다. 하지만 이날만을 위해 평생을 기다렸지 않니.”

무슨 말이지? 그녀의 말에 의아해하며 고갤 돌리자 엄마가 빙그레 웃었다.

“네 본 이름 말이야. 이제 슬슬 누군가에게는 말할 때가 되지 않았니.”

그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너를 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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