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하지만 이런 제 생각은 그저 꿈에 부푼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루드릭이 오고 난 뒤로 내 생활이 완벽하게 꼬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 루드릭이 이곳에 방문한 지 하루가 지나지 않아 그는 꾸준히 내 거처에 방문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테이젤과 에드아르는 사전에 자기네들끼리 합의를 본 것인지, 오는 날이 겹치지 않았지만 루드릭은 달랐다. 다른 이들이 오는 시간이라 미리 말해도 매일 같은 시간에 내 거처를 방문했다.
처음엔 다소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어야지. 매 순간, 방해하는 루드릭의 행동에 테이젤과 에드아르의 얼굴이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에드아르는 루드릭의 꼴이 보고 싶지 않아 자신의 거처로 오라고 한 뒤 오지 않았지만 테이젤은 달랐다. 날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며 꾸준히 거처로 오는 것까진 좋은데 테이젤과 마주하는 순간 그의 평온한 가면은 금방 깨지기 일쑤였다.
차라리 테이젤도 루드릭의 행동에 넌더리 치며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한숨을 쉬어도 테이젤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루드릭을 말릴 자신이 없어 테이젤에게 간곡히 부탁해 보았지만 그 또한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루드릭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다소 치기 어린 행동이 보이는 모습에 한숨만 늘어갈 뿐이었다.
루드릭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점점 방문시간이 빨라지는 테이젤은 어김없이 자신이 정한 요일에 맞춰 내 거처의 방문을 두들겼다.
“테이젤?”
잠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마중하면 테이젤의 거센 포옹이 이어졌다. 눈으로 연신 주변을 탐색하면서도 그는 내 몸을 놓지 않았다.
“그자는 없습니까?”
“누구요?”
“누구겠습니까.”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내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기분 좋은 손길에 나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그의 가슴에 기대었다.
“카르…… 아니, 이르헨달의 황제 말입니다.”
아. 그의 말에 졸리던 눈이 번쩍 떠졌다. 어찌나 신경 쓰고 있는 건지 평소보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몸이 기분 나쁨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아직 안 왔어요.”
“하아……. 아직 안 온 겁니까.”
안 올 거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제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루드릭이 오늘 갑자기 변덕이 일어나 안 오지 않는 이상, 올 것은 뻔했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놈. 그와 만나기로 한 시간 때마다 고통받는 테이젤이 불쌍해 손을 올려 그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테이젤.”
내 부름에 그가 시선을 내리자 나는 발끝을 들어 올렸다. 짧은 입맞춤이 그의 입에 닿았다 떨어지자 그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모닝키스에요.”
“비시아.”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그가 날 껴안고 문을 닫았다. 아, 문을 안 닫고 있었구나. 밖에 서 있는 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내 넘어가 버렸다. 뭐, 어때. 내가 테이젤과 이렇고 저런 관계라는 건 이미 소문으로도 무성한걸.
“푹 주무셨습니까?”
“응, 테이젤은요?”
“당신을 만나러 가는 날인데 못 잘 리가요.”
상냥하고도 따뜻한 그의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말하면 나를 편안하게 할지 완벽하게 아는 듯한 테이젤의 행동은 완벽 그 자체였다. 그가 내 침대에 자리를 잡고 날 무릎에 앉혀주자 나는 그의 목을 껴안았던 손을 풀었다.
“작전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그의 말에 순간 몸을 멈칫했다. 아, 음, 그거.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교단이 난리가 나야 할 법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시선 끝엔 내가 있지 않았다. 그들은 나보다 더욱 화제의 중심인 그를 위한 일거리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다.
덕분에 지금 라디트도 날 만나러 못 오지 아마? 새삼스럽게 울고 있을 라디트를 생각하자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고갤 저었다.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왜죠? 분명 얼마 안 걸린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말하면 화낼 것 같은데. 테이젤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던 입술을 간신히 여는 순간이었다. 노크 하나 없이 갑작스럽게 열리는 거처의 문을 뒤로하고 루드릭이 당당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와 동시에 테이젤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도대체 밖에 있는 이들은 뭘 하는 거야. 말이 보초지, 그냥 사태를 방관하고 노는 작자들이 분명했다. 보초병이 아니라 장신구야 장신구.
“루드릭?”
당황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었지만 뻔뻔한 루드릭이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잘 잤나?”
잘 자긴 잘 잤는데요……. 불안한 느낌에 위를 올려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죽일 기세로 노려보는 테이젤의 얼굴에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망했네.
“당신이 이곳에 어쩐 일입니까.”
으르렁거리는 듯한 테이젤의 목소리에 바짝 쫄았다. 싫은 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테이젤의 모습은 에드아르이후로 처음 본 것 같은데. 이쯤 되면 다른 이들은 눈치가 있어 갈 법도 한데, 루드릭은 뻔뻔하게 문을 닫으며 웃어 보였다.
“비시아를 보러 왔다만. 무슨 문제라도?”
“오늘은 저와 비시아가 함께 있는 날입니다만.”
“그럼 그사이에 내가 한 번 꼽사리 껴 보지.”
터무니없는 루드릭의 말에 테이젤의 입에서 기가 찬 소리가 들려왔다.
“상식이 있긴 한 겁니까?”
“있었다면 전쟁을 일으켰을까?”
만만치 않은 또라이인지라, 테이젤의 막말에도 불구하고 루드릭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그 상황에서 전쟁을 운운하면 어떻게 해! 마치 싸우자는 듯이 도발하는 루드릭의 행동에 내가 기겁하며 테이젤의 손을 다급히 잡았다. 그의 허리춤에 뭐가 있는지 생각하면 오늘 내 심장이 아주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비시아를 보러 왔다. 그뿐이야.”
루드릭이 천천히 다가오자 테이젤은 더욱 강한 힘으로 날 껴안았다. 이번엔 자의적이 아니라 타의적으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자 자연스럽게 시선에서 루드릭이 사라졌다.
“비시아.”
“테, 테이젤.”
다정하게 부르는 음성에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다 좋은데 우리 이 손을 놓고 이야기하면 어떨까? 내가 입이 잘 안 움직여서 말이야.
“저자를 내쫓으십시오. 오늘은 엄연히 나와 노는 날 아닙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내 말을 들을 이였다면 애초에 오늘 방문하지도 않았겠지. 나 또한 울고 싶었다. 불편함을 숨기지 않는 테이젤과 에드아르 때문에 루드릭에게 말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루드릭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방해하진 않도록 하지. 약속할게.’
오는 것 자체가 방해임을 열변을 토하며 말해도 그의 행동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기에 오늘 또한 어김없이 찾아온 그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운우지정을 나누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만 하고 있는데 뭐 어때.”
나와 테이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루드릭이 딴지를 걸자 테이젤의 고개가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돌아갔다. 테이젤과 시선을 마주친 루드릭이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 그 순간은 그 순간 나름대로 재밌을지도.”
“도저히 못 참겠군요.”
루드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이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행동에 엉거주춤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가 내 손을 이끌었다.
“비시아, 나갑시다. 제 거처에서 이야기하도록 해요.”
다분히 화난 테이젤의 얼굴에 찍소리 한 번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오늘 테이젤과 만나기로 한 날이라, 그의 말에 순순히 따르기 위해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테이젤이 붙잡지 않은 다른 손목을 붙잡자 자연스럽게 내 발이 멈추었다.
“그럴 순 없지. 내가 왜 여기에 왔는데.”
자신만 두고 나가려는 작태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루드릭의 말은 테이젤의 신경을 긁기에는 충분했다.
“당신은 허상이나 골똘히 생각하도록 하십시오.”
“싫은데?”
두 사람의 의견이 팽배해지자 내 손목을 잡고 있는 힘 또한 점차 강해지기 시작했다. 서로 무엇을 잡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힘만 거세지자 결국 참지 못한 내가 소릴 질렀다.
“두 사람 다 그만해요!”
내 소리에 깜짝 놀란 그들이 서로가 아닌, 날 바라보자 양쪽을 번갈아 보며 소리쳤다.
“어린애도 아니고 도대체 뭐 하는 짓이에요. 둘 다 놔요.”
내 말에 둘은 다소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목을 놓았다. 잔뜩 벌게진 팔목에 울먹거리는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이를 악물며 참아 내었다. 빨간 손목을 연신 매만지며 루드릭을 올려다보았다.
“루드릭. 당신이 아무리 손님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불편해요. 제겐 테이젤도, 에드아르도 손님이에요.”
“그래서 방해 안 하는 것 아닌가. 와도 지켜만 볼 뿐, 아무런 행동도 안 하고 있고.”
루드릭은 테이젤때완 달리 가만히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방해하려고 했다면 더욱 확실하게 했을 거야. 알고 있지 않나?”
알아? 뭘?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루드릭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가령 예를 들자면…….”
“흣,”
허리를 숙인 그가 내 목을 찾아들었다. 테이젤이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쇄골 언저리를 가볍게 이로 씹자 내 입술엔 신음소리가 절로 세어나왔다.
“이렇게 말이야.”
“멈추십시오.”
그 순간 내 얼굴 가까이로 날렵한 검날이 찾아왔다. 정확히는 루드릭의 목을 겨눈 검이 언제라도 그의 목을 칠 수 있게끔 날렵한 날을 번뜩이고 있었다.
“이 이상 국교 문제로 변질되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왜 그러지? 새삼스럽게 처음도 아니면서 말이야.”
제 목에 검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 루드릭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네가 비시아를 에드아르와 함께 나눠가진 걸 모를 줄 아나?”
“그 주둥아리.”
테이젤이 날 보호하듯 껴안음과 동시에 더욱 검을 루드릭을 향해 가깝게 내렸다.
“뚫렸다고 함부로 놀리지 마십시오.”
“사실인데 뭐 어때.”
“테이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루드릭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가만히 보고 있다간 누군가 한 명 초상 치를 것 같잖아. 살벌한 분위기에 도저히 말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안한 목소리로 테이젤을 향해 소리치자 그는 몇 번이고 입술을 깨물다 간신히 고갤 돌려 날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비시아. 저 시건방진 자를 죽일 뿐입니다.”
날 향해 다정하게 말하고 있는 그는 빙그레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의 웃음이 뭘 뜻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나는 얼굴이 더욱 새파랗게 질려 재빠르게 고갤 저었다.
“그랬다간 어떻게 될지 아시잖아요. 그만해요, 테이젤.”
“비시아, 저딴 자를 감싸는 겁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나는 그가 검을 들고 있는 손을 꽉 붙잡았다.
“당신이 걱정되어서 그러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진정해요.”
“……하아. 알겠습니다.”
테이젤이 대화가 통하는 상식인이여서 다행이었다. 내 말에 긍정의 말을 내뱉는 그의 행동에 간신히 웃어보였다.
“잘게 다져도 모자랄 이지만 이만 참도록 하죠.”
그래! 그거야! 테이젤의 말에 웃음을 지으며 루드릭을 향해 고갤 돌렸다. 이제 남은 건 어르고 달래 루드릭을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비시아.”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시선이 루드릭에게 닿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지금 하고 싶어. 너랑.”너를 먹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