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나를 찾았다고 들었는데. 정작 찾는 이가 나보다 더 바쁠 줄이야.”
나보다 먼저 안에 들어와 반기는 이의 음성은 제법 아니꼬웠다. 아니, 이렇게까지 빨리 올 줄은 몰랐지. 라디트와 그렇게 오래 수다를 떤 것 같진 않았는데. 심퉁한 에드아르의 표정에 나는 재빠르게 웃어 보였다. 쳇. 빠르게 온다고 온 거였는데.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나저나 빨리 왔네요?”
마치 나를 기다린 것처럼.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빨리 도착할 수 없었다. 내가 나가고 그가 사람을 시켜 에드아르에게 기별을 넣는 데까지만 해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빨리 올 수 있을 줄이야. 나는 옅은 웃음에 확신을 주어 보였다.
내 미소가 짙어지자 그는 뚱한 표정을 풀어내었다.
“왜 날 찾은 거지?”
“당신이 필요해서요.”
“내가 필요해?”
놀란 듯이 말하는 그의 입은 여전히 얼떨떨해 보였다.
“테이젤이 아니라……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에드아르를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뇨. 테이젤이 아닌, 에드아르. 당신이 필요해요.”
테이젤 혼자로 끝낼 수 있는 사안이였다면 에드아르가 필요하다는 말은 애초에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재차 그의 시간을 물어보며 부르고 싶다는 수고도 들이지 않았을 터였다. 확신에 찬 내 말에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무슨 도움인지 들어나 볼까.”
“방법은 간단해요.”
정말로 간단했다. 움직일 필요도 없었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당신이 이곳에서 떠나지만 않음 돼요.”
내 말에 그의 눈이 가볍게 깜빡였다.
“정말 그거면 되는가?”
“네.”
“이곳에서 머무는 것 즈음이야 간단하긴 한데. 왜?”
“그래야 그들이 더욱 안절부절못할 테니까요.”
제멋대로 구는 그들의 뒤엔 엄마가 있을 것이 뻔했다. 그녀의 손아귀 아래서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열심히 움직이고 있을 테지. 그녀의 손아귀 아래서 벗어나기 위해선 교단이 바쁠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면 국빈인 이들이 떠나지 않고 잠정적으로 머물고 있다던가.
“지금 교단은 제가 빨리 한 사람을 택해 나가길 원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이렇게 대대적으로 공문을 내려 각 나라의 사신들을 초대한 거겠죠. 사실 그들도 꽤나 놀랬을 거예요. 기껏해야 사신이 올 줄 알았던 나라에서 각 나라의 중요인물이 왔으니까요.”
라디트에게 들은 바로는 공문엔 꼭 각 나라의 원수에 해당되는 이들이 와야 한다고 적혀 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담 테이젤과 에드아르는 내 이름을 듣고 자처해서 온 거라는 것. 그들 또한 각 나라의 황제와 황태자가 올 줄은 몰랐을 테니 그 어떤 때보다도 더욱 신경이 날카롭게 세워져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전 그들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려고 해요. 동시에 시간도 끌고요. 그 상황에서 에드아르, 당신이 필요해요. 그저 이곳에 남아 결정을 기다리겠다는 말만 해 주시면 돼요.”
나는 천천히 다가가 에드아르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등을 매만지자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제가 못 고르겠다며 시간을 끌고, 동시에 선택을 요구한 이들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난감한 상황을 이끌 수 있게 도와주세요.”
“흐음.”
나의 구구절절한 간절함을 듣고서도 여유롭게 관망하기만 하던 에드아르의 입에서 숨소리가 뱉어졌다. 간이라도 보듯, 내게 눈을 떼지 않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지?”
“자유요.”
묻기가 무섭게 그의 말에 재빨리 답했다. 자유와 동시에 그 자유를 보장해 줄 것들을 당당하게 누리고 싶었다. 솔직히 누구나의 꿈 아니겠어. 돈 많은 백수.
“그들의 속박에서 벗어나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을 거예요.”
“내가 얻을 건?”
“저예요.”
“하.”
자신만만하게 대꾸하는 내 말에 결국 에드아르가 실소를 터트렸다.
“너를 온전히 내 것으로 취하는 건 어렵다는 거군.”
정확하게 논점을 집는 테이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보통 테이젤이 말했을 법한 말을 에드아르가 하니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만 한 미모를 어디서 얻기란 쉽지 않을걸? 보기도 힘들 테고 말이야. 그 정도에 반하면 꽤 괜찮은 조건 아냐? 서로 조금씩만 양보하면 다 같이 행복할 수 있잖아.
“테이젤.”
“네?”
“그자는 허락했나?”
“아, 테이젤이라면 긍정으로 답해 주셨어요.”
“그럼 그도 여기에서 계속 머무는 건가?”
“그런 셈이죠.”
견제하는 것처럼 몇 번의 질문이 오가고 난 뒤에 에드아르의 무거운 고개가 끄덕여졌다.
“알겠다. 네 계략에 동참해 주도록 하지.”
“고마워요, 에드아르!”
그의 동의에 활짝 미소를 지었다. 둘의 지위와 상황을 생각한다면 교단 또한 쉬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을 터였다. 엄마마저도 그들을 쉽게 움직일 순 없겠지! 입술엔 자연스레 득의양양한 표정이 지어졌다.
“다만, 공짜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
뭐? 그의 말에 웃던 채로 몸을 멈추었다. 어느덧 나만큼이나 미소를 띠고 있는 그가 나를 향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가 자신의 욕심을 위해 나를 이용하는 것만큼 나도 널 내 욕심을 맘껏 부려야 수지타산이 맞지 않은가.”
몸을 완전히 일으킨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그에 자연스레 시선이 옮기자 이번엔 그가 내 턱을 잡았다. 마치 자신을 보라는 듯, 완벽하게 옭아매는 솜씨에 눈을 마주치자 그의 이마가 내 이마에 닿았다.
아. 나는 깨닫고 눈을 감았다. 제 입술을 삼키는 따뜻한 숨결에 자연스레 입술을 벌렸다. 난폭하지도, 성급하지도 입맞춤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의 입에 맞춰 호응하던 난 돌연 아랫입술로부터 느껴지는 아픔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가 다시 한 번 더 혀를 넣어 제 입안을 훑었다. 욕심껏 입천장을 유린하고 난 뒤에야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풀어 주었다.
“너의 욕심을 채울 때마다 나 또한 내 욕심을 채울 거다.”
밥을 준다는 데 내가 마다할 리 없었다. 나는 그의 말에 발끝을 들어 올려 가볍게 입을 맞췄다.
“좋아요.”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금방 결정이 날 거라고 믿었던 것관 달리 계속 결정의 순간이 미뤄지자 교단 내에서 작은 술렁임이 일기 시작했다. 결정이 나지 않는다고 빈번히 빼는 나와, 가지 않는다고 아예 자리를 잡고 있는 그들 때문이었다.
국빈들인 것만큼 교단 내는 항상 살얼음판이 아닐 수 없었다. 마땅히 시중을 들 사람이 없어 일반 신관들도 재빠르게 그 자리를 대신해야만 했다. 이렇게 되자 자연스레 불만이 하나둘 불거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못 하겠다는 원성이 대다수였지만 매일 내 거처를 번갈아 가며 찾는 테이젤과 에드아르에 대한 소리도 한 몫 단단히 하고 있었다.
교단 측 또한 나를 가만히 둘 생각이 없는 건지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라디트를 방패 삼아 거절했다. 졸지에 중간에서 의견을 조달하게 된 라디트는 요즘 두통을 호소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뒤끝이 조금 길긴 했지만 이쯤 되면 라디트도 톡톡하게 알아차렸을 듯했다. 나를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어머……. 예하께서 오늘 방문한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결국. 못 참겠는지 당사자들 중 한 명이 내 거처에 방문하고야 말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하게 찻잔에 차를 따랐다.
“허허, 제가 갑작스럽게 일정을 잡아 죄송합니다. 다만 그만큼 바쁜 일이 있거든요.”
“무엇이죠?”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자 대주교의 입에서 헛기침이 세어 나왔다.
“비시아 님. 아직 결정을 못 내리신 겁니까?”
“아아.”
그거? 나긋하게 웃어 보이며 찻잔을 검지로 만지작거렸다.
“죄송합니다. 교단의 뜻은 알지만 이게 중대사안이다 보니……. 생각보다 고르는 것이 어렵네요.”
“두 분 중에서 고르는 것인데 그마저도 어렵다니. 그거 참 곤란하군요.”
“향후 제가 머물 곳을 고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잖아요. 더군다나 여신님의 행보가 정해지는 곳이니 더욱이 신중을 기해야 함은 맞는 말이죠.”
내 말에 대주교의 입의 기침이 더욱 거세졌다.
“허어. 그래도 이제 슬슬 고르지 않으면 비시아 님의 선택만을 기다리고 계신 분들께서도 난처해 하실 겁니다. 이제 그만 그들의 난처함을 덜어 주는 건 어떠실까요.”
“그럴 리가요. 그들이 그런 말을 예하께 올리던가요?”
나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사전에 합의된 이들이라 난처해 할 리 없었지만 호들갑 떠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믿는 것이 있을수록 허풍은 크게 떠는 거랬어.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곤란하다고 말하면 다시 한 번 더 예하를 찾아뵙겠어요.”
내 말에 깜짝 놀란 그가 재빠르게 손사래 쳤다.
“어흠! 아니,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비시아 님이 나서 주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거절하진 않겠지. 더 놀려 주고 싶었지만 꽤나 당황한 대주교의 표정을 보아 그만두기로 할까. 나는 그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아직 안 오신 분도 계시기에 더욱 고르기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안 오신 분이라니……?”
“카르티잔이요. 그 나라도 후보에 있던 거 아닌가요?”
순진한 척 눈을 깜빡이며 고갤 기울였다.
“후보에 있는데 제대로 말 한 번 섞어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못한 채로 탈락하면 꽤나 원통해하실 것 같아요. 안 그런가요?”
“그렇게까진 생각하지 않으실 것 같지만…….”
“저는 여신님의 은혜를 보다 많은 이들에게 공평히 나누고 싶어요.”
그들이 내게 처음 했던 말을 토씨 하나 빠트리는 일 없이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분까지만 만나고 난 뒤에 정하도록 할게요.”
이렇게까지 말하자 그 또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잠시 잠잠해졌다.
“그렇담 저희 측에서 빨리 모셔 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응하는 그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이게 아닌데. 조금 더 펄펄 날뛸 거라고 생각했던 것관 달리 순순히 인정하는 그의 행동에 차분하던 머릿속이 조금 어긋나기 시작했다.“그곳은 아직 내전 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내전도 내전이지만, 분란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분란을 잠재우느라 바쁘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흠……. 그래도 최근 전쟁이 종전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니,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올 수 있겠죠.”
“종전요?”
전쟁이 끝났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말은 좋든 싫든 승패의 결과가 났다는 소리였다. 누가? 누가 이긴 거지? 자연스럽게 루드릭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나는 대답을 재촉했다.
“누가요? 누가 이겼나요?”
그는 내 말에 다시 한 번 더 뜸을 들였다. 턱수염을 쓰다듬는 손길이 한없이 느려 보이기만 할 때였다.
“아, 그러고 보니 더 이상 카르티잔이라고 부를 순 없겠군요.”
“네?”
“옛 이름인 이르헨달로 다시 돌아왔으니까요.”
그 말에 나는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너를 먹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