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먹고 싶어-69화 (69/86)

69화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를 오랜만에 다시 보아 반가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때에 제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괘씸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테이젤과 에드아드와는 달리 친구로서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라디트의 눈동자는 그런 것 같지 않았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 녹아 있는 나는 쉽게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비시아. 기억해?”

“어? 뭘?”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거.”

그의 말에 숨을 들이켰다.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어? 것보다 꽤나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저 내 향기에 휩쓸려 한순간 이뤄진 감정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라디트는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걱정 마. 네 기분도 그러길 바라며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마치 꿰뚫어 보는 그의 말에 난처해진 시선을 옆으로 돌려 버렸다. 뭐야. 뭐지? 혼란한 머릿속이 쉽게 진정되질 않았다. 아무래도 저건 라디트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달관한 듯이 행동할 리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라디트는 날 보자마자 주체하지 못하고 껴안고, 한참 동안 떨어지지 않을 기세로 굴어야 한단 말이야.

“하지만 내 마음만큼은 멋대로 굴 거야.”

“어, 응?”

생각하기 무섭게 자신의 멋대로 한다는 라디트의 말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역시 이 녀석.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거 아냐? 놀란 나완 달리 싱글벙글한 라디트는 느긋한 자세를 취했다.

“여전히 널 좋아하는 마음도 그대로일 거라고.”

결국 그가 말하는 것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반대로 기울어지는 분위기에 나는 차를 들이켰다.

“라디트.”

“왜?”

그의 이름을 먼저 불렀으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섣불리 무슨 말을 옮겨야 할지도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난 그냥 나 살고자 한 일이었는데.

“새삼스러워?”

갑작스레 들리는 그의 말에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 마음이 단순한 치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라디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에 분노하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을 텐데. 무엇이 라디트를 변하게 한 거지? 테이젤은 내가 안 본 사이에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달랐다. 제일 많이 달라진 것은 내가 아니라 라디트였다.

“나 다 알고 있어. 네가 그 두 분에게 무슨 존재인지, 그들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말이야.”

라디트는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예전처럼 널 독점하려는 욕심까진 가지지 않을게. 그저 곁에 계속 같이 잇고 싶은 마음뿐이야. 날 곁에 두어 줘, 비시아.”

어떻게 안 거지? 그들이 날 찾아왔을 때? 날 보는 시선을 보고?

“오늘은 이 말을 하러 왔어. 시간이 별로 안 나기도 하고. 이제 막 자리를 잡은 탓에 정신없이 바쁘거든.”

거기까지 말하고 라디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찻잔엔 어느새 그가 다 마시고 난 뒤의 온기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라디트, 잠깐만. 난 더 이야기 하고 싶은 게…….”

“걱정 마. 난 어디로 가질 않아. 네가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린 계속 이야기할 시간이 많을 거야.”

라디트가 빙그레 웃었다. 남자로 돌아와도 된다면 길었던 머리카락을 잘라도 될 법한데 그는 연신 귓가에 머리카락을 꽂으면서도 긴 머리카락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젠 정말 네 곁에서 멀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

일순, 내가 여자라고 착각했을 때의 라디트를 보는 것 같자 눈을 깜빡였다. 나와 같은 옷을 입고, 나와 같이 행동하는 그녀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을 세 번쯤 깜빡였을 땐 다시 속을 알 수 없는 능글구렁이가 되어 있었다.

“다음에 또 봐.”

결국 라디트의 인사에 제대로 답도 하지 못한 채 어영부영 지나고야 말았다. 멀어지는 라디트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한 채 문이 닫히는 걸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 그렇게 오랫동안 있었나?”

어쩐지 혼자 부영한 느낌이었다. 혼자 시간여행이라도 하고 온 듯한 느낌이었다. 루드릭과 함께한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바깥에선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라디트가 저렇게 된 건 기쁜 일이야. 거기다가 잘하면 내 편이 될 사람이 또 한 명 더 늘었다는 것이기도 했다. 나쁠 것은 없었다. 그저 갑자기 모든 것을 달관한 듯한 라디트의 표정이 걸릴 뿐.

라디트를 끝으로 더 이상 나를 만나러 오는 이는 없었다. 오랜만에 같이 학문을 배우던 동창을 보니 다른 친구도 만나고 싶었지만 그녀까지 찾아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다시 갇혀 쳇바퀴 같은 삶이 지속되었다. 그저 언젠가 소식이 올 테이젤과 에드아르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빨리 온다던 그의 말과는 달리 테이젤의 소식은 영 들리지 않았다. 어느덧 내가 이 방의 구조에 구석에 뭐가 있는지조차 다 외우게 생겼지만 그는 여전히 오질 않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이렇게 늦는 거지? 나는 이제 마시지 않으면 허전한 찻잔을 들었다 티테이블에 쾅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지?”

“누구?”

맞은편에서 얌전히 티타임에 응하던 라디트가 물었다. 화가 나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는 나완 달리 우아하게 소리조차 내지 않고 내려놓는 폼이 어느 여염집 아가씨나 다름없었다.

“테이젤 말이야.”

“그는 왜 기다리는 건데?”

그의 말에 아차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아직 라디트에겐 내 작전을 설명해 주지 않은 참이었다.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함인데 라디트한테 어떻게 말해. 차마 나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작전을 펼치고 있어,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게 있어. 그가 내 부탁으로 가져올 게 있었거든.”

정확히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지만.

“으음. 그라면 아마 내일 올걸?”

“정말?”

라디트의 말에 눈이 동그래져 티 테이블에 양손을 올렸다.

“어떻게 알아?”

내가 없는 사이에 나도 없는 신기라도 생긴 거 아냐? 모르는 사이에 워낙 많이 바뀐 라디트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라디트는 그저 웃을 뿐, 차를 홀짝이며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응? 라디트. 말해 봐. 어떻게 아는 건데?”

“그건 내일 되면 알아.”

내일? 내일에 무슨 날이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내일 딱히 스케줄이 잡혀 있지 않았다. 무슨 스케줄이 있었더라면 교단에서 사람이 오늘 아침부터 들들 볶았을 텐데 말이야.

궁금해 하는 나완 달리 여유로운 라디트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여유롭게 구는 태도가 슬슬 묘하게 신경을 긁고 있단 말이지. 언제나 내게 안달을 내던 모습만 보았던 라디트라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오래 떨어져 있었던 테이젤과 에드아르도 같았는데 왜 너만 달라지는 건데, 응? 사춘기야 뭐야?

“라디트.”

오기가 생긴 난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라디트의 시선이 빤히 닿자 나는 그의 허벅지에 제 궁둥이를 붙이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가르쳐 줘. 뭐야? 어떻게 알아? 내일 뭘 하는데?”

유혹하듯이 행동하자 그의 눈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거란 말이야. 평상시 라디트의 반응으로 돌아오자 간만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가르쳐 줄 거지?”

“미안하지만 안 돼.”

단호한 라디트의 말에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는 탓에 나는 꽤나 추하게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야만 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벙찐 표정으로 라디트를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라디트에게 내 유혹이 먹히지 않았다는 거야?

“내일이면 알게 될 거야.”

내일까지 못 기다리겠으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거 아냐. 다소 심술이 난 나완 달리 라디트의 얼굴은 점점 제 머리색과 비슷해져만 갔다. 결국 이곳에 있으면 안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인지 라디트는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미안. 내일 봐!”

갑작스러운 라디트의 퇴장에 벙찐 나는 한동안 멍하니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뭐지 정말? 유혹은 왜 또 안 통한 거야?

*

결국 제대로 된 정보 하나 얻지 못한 채 내일이 되고 말았다. 해가 뜨기 무섭게 눈을 떴지만 달리 변하는 것은 없었다.

“내일 도대체 뭘 안다는 거야?”

투털대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라디트의 말을 믿어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언젠가 올 테이젤을 기다리며 간단한 치장을 하기 위해 욕실로 발걸음을 향하는 순간이었다.

“비시아 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죄송하지만 조금만 협조해 주세요.”

“네, 네? 무슨 일인데요?”

“잠깐이시면 됩니다.”

난데없이 침입한 이들은 내게 자초지종도 설명해 주지 않은 채 강압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미처 허락할 새도 없이 날 씻겨 광낸 후 본격적으로 옷 입히기 놀이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예전 이들의 도움을 받았을 땐 아름다움이 도드라질 수 있도록 화려하게 꾸몄다면, 이번엔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모를 경건한 스타일로 꾸미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구는 행동엔 화가 났지만 예뻐지는 것에 대해선 딱히 반대를 하지 않는 터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이렇게 꾸미면 어디로 간다는 소린데. 어딜 데려가려고 이렇게 꾸미는 거지?

“비시아 님. 저희를 따라오세요.”

치장이 끝난 후, 나를 향해 지나치게 고개를 숙이는 이들을 따라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이곳에 오기 위해 향했던 건물을 몇 개나 스쳐 지나간 후에야 제일 커다란 건물 하나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사람들의 이목이 한데 집중되자 나는 그곳이 예전 무대의 장소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비단 교단 사람들만 모인 것이 아니었다. 예전 축제 때처럼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비시아.”

“테이젤?”

누구보다도 날 먼저 발견한 이의 입에서 내 이름이 자연스레 나오자 그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한테 바로 온다던 그가 이곳에 있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어서 오렴, 내 딸.”

그리고 엄마마저 발견하자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너를 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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