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먹고 싶어-68화 (68/86)

68화

“내가 필요해요?”

은근히 눈을 빛내며 물어보는 테이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말만 해요. 비시아,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들어줄게요.”

정말? 그의 말에 더욱더 빙그레 웃으며 그를 가까이 했다. 오랜만에 테이젤에게 닿는 느낌은 생소한 반응을 일으켰다.

“에드아르가 필요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입에서 ‘에드아르’가 나오기 무섭게 테이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평상시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 유명한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정없이 구겨진 얼굴은 쉽게 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보란 듯이 불만을 얼굴에 드러낸 그가 드물게 입술을 작게 움직였다.

“그가 왜 필요하단 겁니까?”

“제 꿈을 위해서요.”

“당신의 꿈?”

밥도 밥이지만 이곳에서 내 지휘를 확립해 두어야 했다. 이곳에 가만히 있다간 엄마의 계획대로 이리저리 움직이기만 하다 그 쓸모를 다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야 놀고먹자는 소원이 이뤄질 리 없는 게 분명한걸!

“네. 제가 언제까지고 여기에 신세만 질 순 없잖아요.”

“그럼 내 곁에 와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들어오는 테이젤이 내 뺨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아까보다 더욱 간절해진 그의 눈빛이 내 심장을 다소 시끄럽게 만들었다.

“저와 함께 사는 겁니다. 그깟 자에게 힘을 빌리지 말아요. 제가 당신에게 모든 지원과 전폭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저와 함께 가요, 비시아.”

그의 제안이 고마웠다. 사실 아직까지도 저를 온전하게 믿고 따라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에게 그렇게 잘해 준 적도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의 달콤한 제안에 보란 듯이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의 의견에 못 이기는 척 힘에 기대어도 일은 원활하게 풀릴 수 있을 테지만, 내가 원하는 건 아니었다. 테이젤의 힘에 기대어 그를 따라가는 순간 모든 것들이 엄마의 계획 중 일부로 변할 것만 같았다.

그녀의 계획대로 흘러가기엔 무언가 찝찝하잖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 밥이랑 잘 지낼 수 있을까? 질리지 않을 거란 보장은? 그리고 그가 나를 강압적으로 소유하려고만 들 경우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모든 것들을 한바탕 겪고 난 후였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어 매번 도망을 결심했던 터였고. 그 끝도 결국 그리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엄마의 말을 따라 왕이 되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머리를 굴려 가며 두뇌 싸움을 하는 것은 내게 맞지 않았다. 조용하고 길게 살고 싶은 내 미학과도 맞지 않고.

“말은 고마워요.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할 일?”

그의 말에 슬쩍 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나를 지킨다는 명분하에 문밖을 감시하고 있겠지. 내가 하는 말도 어쩌면 듣고 있을지도 몰랐다. 너무 많은 말을 흘릴 필욘 없을 것 같았다. 시선을 돌려 테이젤을 바라보며 길고 긴 설명 대신 그의 목을 둘렀던 팔을 풀어내었다.

“네. 그래서 에드아르가 필요하고요.”

“……비시아.”

테이젤이 나지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항상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지만 지금은 달랐다.

“저만으로는 도저히 하기 힘든 일인 건가요?”

“테이젤…….”

아쉬움이 잔뜩 담긴 말.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 최대한 자제하고자 했지만 제 손은 천천히 그의 뺨을 향하기 시작했다. 조금, 아주 조금이면 괜찮겠지?

“대신 상을 줄게요.”

“상?”

그의 입술이 조막만 하게 벌어지기 무섭게 내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틈을 벌리고 가볍게 파고 들어간 제 혀가 테이젤의 고른 치열을 훑었다. 다행히 테이젤은 피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적극적으로 내 입맞춤에 응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놀란 것처럼 내 행동에 뻣뻣하게 굳은 채 받아들일 뿐이었다. 짧디짧은 입맞춤이 끝나자 테이젤의 입에서 달콤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 마음이요.”

아쉬운 그의 마음을 달래 주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내 최후의 선택이었다. 적당한 말이나 언변으로 회유하는 건 영 자신이 없단 말이야.

“당신은 정말……. 안 본 사이에 많이 달라졌군요.”

다행히 마음에 드는 걸까. 그의 입꼬리에 미약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변했나?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이내 빙그레 따라 웃어 보였다. 변한 것인진 몰라도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자신을 다르게 만든 것은 틀림없었다.

“그럼 그를 보기 싫지만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테이젤.”

“걱정 말아요.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면 당신에게 다시 한 번 더 보답을 받아 낼 테니까요.”

그의 말에 잠시 오싹한 오한이 들었다. 밥? 밥이겠지? 밥이라면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일 터였지만 그래도 어딘가 모르게 꺼림칙했다.

뭐, 괜찮겠지?

그를 배웅하고 난 뒤에 조용한 정적이 찾아왔다. 정말로 날 외부와 차단시킬 작정인지 주변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끔 하늘을 낮게 나는 새가 지저귀다 갈 뿐 사람의 소리도, 생활 소음도 전혀 들리지 않고 있었다.

밖에 있는 사람들 진짜 사람 맞아? 테이블에서 온전히 나만을 위한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한계가 있었다. 백색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이곳은 사람이 살기엔 너무 힘든 곳이었다.

루드릭한테 잡혀 있을 때도 바깥에서 경비를 취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조용한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 수는 몇 배에 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쥐 죽은 듯이 조용하자 조각상은 아닌지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비시아!”

문이 급작스럽게 열리며 또다시 내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는 이가 나타났다. 다만 이번 이만큼은 나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라디트?”

정말 예상치 못한 이가 아닐 수 없었다. 놀란 눈은 쉬이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너 왜 아직도 안 나가고 있어? 나간다고 하지 않았어?”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질문은 수도 없이 생기고 있었다. 숨 가쁠 정도로 차오르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선 참을 수 없었다.

“그보다 너 여기 아직도 있는 거 보면 안 들킨 거야? 모습은 또 왜 그렇고? 이제 치마 안 입어도 된대?”

“진정해, 비시아. 나보다 네가 더 허둥대면 어떻게 해.”

다급한 나완 달리 라디트는 꽤 여유롭게 굴었다. 자신 있게 미소지은 그의 얼굴이 시선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 이곳에 있어도 된대.”

“뭐? 그럼 사람들이 네가 남자인 걸 안다는 소리야?”

“응.”

놀라움의 연속인 자신과는 달리 달관한 듯한 그의 태도에 사뭇 짜증이 일었다. 시원시원하게 다 말해 주면 좋을 텐데! 그가 여유롭게 굴면 굴수록, 내 몸은 초조하게만 안달 내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이 놀라지 않으셨어? 워낙 전통을 중시하시던 분들이었잖아. 반박도 거세었을 것 같은데.”

“내 가문을 듣더니 어느 정도 납득하던걸?”

그는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쳐를 취해 보였다.

“애초에 이곳에 남자로 지내면서도 주변에 잘 녹아드는 걸 점수로 크게 쳐 주셨고 말이야.”

“그렇담 다행이지만…….”

아직도 멍하기만 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그가 예상과 달리 이곳에 있을 줄이야. 적어도 그가 이곳에 남아 있다면 그건 여자의 모습으로만일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기르던 머리카락만 그대로일 뿐 모습은 온전한 남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 걸까. 라디트가 살짝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어쩌다가 남자라는 걸 들키게 된 거야?”

“그게…….”

내 말에 그가 턱을 살짝 긁적이더니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네가 그렇게 떠나고 나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어. 그나마 너와 같은 공간에서 같이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네가 납치되었다는 말까지 들리자 나도 반쯤 포기한 거지 뭐.”

“포기했다니, 뭘……?”

“그냥 대놓고 내가 남자라는 걸 밝혔어.”

“뭐?”

기어이! 평소 제게 하는 행동이 불안불안하다 싶었지만 정말로 그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무모한 그의 행동에 절로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미쳤어! 그러다가 큰일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네가 없는데 그 정도 일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느꼈나 봐.”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벼운 그의 발걸음이 평상시 그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사실 나도 말하면서 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목숨은 간신히 건지더라도 평생 어디 구석진 시골에 유폐되어서 바깥에 한 발자국도 못 딛고 그래도 죽을 때까지 산다던가.”

그는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급박한 상황을 재연하는 말과는 달리 태연자약하게 테이블에 놓인 차를 들어 비어 있는 컵에 따랐다.

“하지만 생각보다 달리 이곳도 꽤나 사정이 급하게 돌아가더라고.”

“급한 사정?”

“비시아, 네가 사라지니까 자연스레 희망이 내게로 쏟아졌는데 그마저도 내가 남자였으니 혼절할 정도로 놀라신 거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라디트가 이렇게 웃을 줄 아는 애였던가?

“내게 대기하라는 명령만 내리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더니 결국 나보고 나가지 말라고 하셨어. 다른 일로 잘해 보자던가?”

“그래서 지금 그 옷을…….”

“응. 비록 성녀엔 적합하지 않은 신체지만 그에 준하는 직급을 가진 성인이 될 수 있었어. 우리 집도 그걸 듣더니 딱히 타박하는 느낌은 아니고. 어차피 언젠가 모든 것들이 밝혀질 거였긴 했으니 그 정도로도 감지덕지한 모양이었나 봐.”

“다행이야. 네가 제일 잘 어울리던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그저 얻어걸린 사람에 불과했다. 외모가 닮았다는 말과 엄마의 소문이 아니었더라면 성녀 취급을 받기엔 턱없이 부족했을 터였다. 만약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라디트는 내가 없는 채 1등의 대로를 순탄하게 달리고 있을 터였다.

본의 아니게 그의 자리를 빼앗은 것 같아 속에서 남모를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는데. 잘되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내 말에 라디트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맞아. 내가 한 외모 하긴 했어.”

으스대는 그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억들이 추억이 되어 라디트와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새 비워진 찻잔을 채우기 위해 찻주전자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왜?”

넌지시 말을 꺼내는 라디트를 향해 시선을 올렸다. 그의 손이 찻주전자를 잡는 내 손 위에 올라와 있었던 것도 있었다. 그의 눈빛과 마주치자 라디트는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너랑 헤어지지 않고 다시 만날 수 있어 기뻐.”

예전, 얼음이라고 불리던 소문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웃음은 햇살 같았다.너를 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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