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결국 제대로 정하지도 못한 채 엄마가 말한 날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고민을 해도 마땅히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녀를 따라가는 것이 마냥 좋을 거라는 판단이 서질 않았다. 엄마의 도움을 받아 빠져나간 뒤, 그녀와 따로 지낼 것 또한 생각해 보았지만 순순히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하곤 고갤 힐끔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내 방에서 서류를 한가득 챙겨와 보고 있는 그를 바라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하필 오늘인 것인지. 평상시엔 제가 와 달라고 재촉할 땐 와 주지도 않았으면서. 엄마가 오기로 한 당일에 귀신같이 찾아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설마 무언가 언질을 받은 건 아니겠지?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아, 아뇨.”
그의 말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등 뒤로 날 빤히 바라보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지만 꿋꿋하게 시선을 유지했다.
“오늘따라 안절부절못해 보이는데……. 무언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그의 말에 깜짝 놀라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평온한 듯한 그의 표정은 내가 알 수 없게끔 만들었다.
“아뇨.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기분이 변덕스럽게 왔다 갔다 할 뿐이에요.”
“무언가 할 말이 있다면 괜찮으니 그냥 말해.”
“정말이에요. 없어요.”
너한테 어떻게 말해. 어쩌면 오늘 이곳을 벗어날 수도 있다는 걸. 그의 말에 극구 부인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가면 바로 밥은 먹을 수 있을까. 최근 밥을 섭취하지 못해 기력이 상당히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 상태라면 얼마 못 가 허기짐에 바닥에 들러붙다시피 누워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당장 끼니를 해결하고 탈출한다고 한들, 엄마가 가고자 하는 여정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다 엄마가 가르쳐 주는 길 또한 알 수 없었다. 한적한 숲길에 아무렇게나 떨어트릴 땐 언제고, 갑자기 나타나 안내자 역할을 자처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내게 가야 할 길이 따로 있었다는 말조차 어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도대체 뭘까. 나는 그저 그녀에게 살아남는 방법만 반복해서 들었을 뿐이었다. 어떤 길도, 어떤 타깃도 듣지 못했다. 그저 본능에 의존하고 해결되길 바라며 길을 나아갔을 뿐인데 그녀는 그런 내 길 자체를 부정하려고 들고 있었다.
“비시아.”
“까, 깜짝이야!”
제 앞에 불쑥 나타난 그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 어깰 들썩였다. 뚱한 그의 표정이 지나치게 가깝자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무슨 일이에요?”
“너야말로 도대체 오늘 무슨 일이지? 내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그냥 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
“내게 집중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정기에 감탄할 새도 없이 그가 빈틈없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할 말 있으면 말하라고 해도 말하지 않고. 그렇다고 내게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오늘의 넌 매우 산만하군.”
마치 부주의한 행동을 한 아이같이 혼나는 꼴이 되자 입술을 삐죽하니 내밀었다. 어떻게 해, 그럼. 고민이 안 될 수가 없는데.
“그럼…… 언제까지 내게 집중을 할 수 없는지 볼까.”
“네? 그게 무슨…….”
그렇게 말하며 그는 서류를 묶었던 얇은 천을 들고 와 제 눈을 둘렀다. 빠르게 사라져가는 빛에 당황해 허둥거려 보았지만 이미 끈은 여러 번 둥둥 감긴 채 야무지게 제 머리 뒤로 묶였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이라니. 나를 느껴야 한다고 말했을 텐데.”
앞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재빠르게 고갤 돌렸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 때문일까. 갑작스러운 고개 회전을 이해하지 못한 몸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자 다급하게 손을 앞으로 뻗었다.
“정말이지, 번거롭게 하는군.”
내뻗은 손을 낚아채는 손길과 목소리의 익숙함이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손목을 돌려 날 붙잡은 그의 손을 재빨리 잡았다.
“그럼 풀어 주실 거죠?”
“그럴 리가.”
들뜬 그의 목소리는 보이지 않아도 웃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는 한술 더 떠 내 손목에 눈과 마찬가지로 끈을 둘러 묶어 내었다.
“네 집중이 온전히 나에게 온다면 생각해 보도록 하지.”
“지금 집중하고 있어요.”
“그래? 그럼 한 번 볼까…….”
그렇게 말하며 말캉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닿았다. 그리 크지 않은 면적을 가진 것이 제 입술을 벌리며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곧 무엇인지 깨닫고 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밥을 주는 연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엄마가 오기 전까지 밥을 섭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입술은 그렇게 오랫동안 닿지 않았다. 가볍게 할짝댄 그의 혀가 빠져나가자 아쉬움에 저도 모르게 고갤 앞으로 내미는 순간이었다.
“꺄악!”
갑작스러운 균형 쏠림에 저도 모르게 놀라 소리쳤다. 무릎 아래에 손을 넣고 들어 올리는 그의 행동에 놀라 손을 버둥거려 보았지만, 묶인 손은 전혀 지지대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불안함과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공포감이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다. 손을 앞으로 내저어 휘적거리다 무언가 잡히자 떨어질세라 재빠르게 낚아채었다.
“무서운가?”
그걸 말이라고! 그의 말에 재빠르게 고갤 끄덕이자 그가 낮게 웃으며 날 내려놓았다. 엉덩이에 닿는 폭신한 느낌이 침대 위라는 것을 깨닫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됐지? 밥 먹을 거니까 풀어 줘!
“무서움 말고 다른 걸 느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는 엉뚱한 말만 하며 날 풀어 줄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흠칫. 소리 소문 없이 갑자기 귓가에 닿는 뜨거운 숨결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하필이면 예민한 제 귓가를 핥는 그의 행동에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눈이 보이지 않아 예민해진 감각이 모조리 귀에 쏠리는 기분이었다. 귓불을 자근자근 깨물다 핥는 소리는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내게 전달되었다.
“그, 그만…….”
그를 밀쳐내고 싶었으나 몸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피하려고 몸을 빼내었으나 집착적으로 따라와 귀를 핥는 통에 연신 애꿎은 이불만 꽉 말아 쥘 뿐이었다. 귓가에 외설적으로 들리는 물기 어린 소리는 그 어떤 때보다 자신을 흥분상태에 밀어 넣기 충분했다.
“아직 멀었어.”
귓가에 나지막하게 그의 목소리가 들리며 혀가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멀어진 열기에 몸을 파르르 떨었으나 아까완 달리 절 감싸는 손길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곧바로 손길이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예상과 달리 그의 손은 제게 오지 않고 있었다.
어디로 간 거지? 두 귀를 쫑긋 세워도 행방이 묘연한 그를 찾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고개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앗!”
얇은 천째로 가슴을 베어 무는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 허벅지를 일으켰다. 자리에 일어나려고 했지만 어느새 허벅지를 단단히 누르고 있는 그의 팔뚝이 앉은 자세를 유지하게끔 만들었다.
“읏……흐응.”
하늘하늘한 슬립 외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탓에 그의 타액에 옷이 녹아가듯 몸에 착 달라붙었다. 그가 건들기도 전에 이미 일어선 정점을 마음껏 혀로 희롱하며 가슴을 자신의 입안으로 탐스럽게 삼켰다.
보이지 않으니 평소보다 느끼는 감각의 배는 느끼는 것만 같았다. 묶인 손을 들어 그의 목을 찾아 밀어내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저항하면 할수록, 반항하듯 그는 강도 높여 날 괴롭힐 뿐이었다.
밀착하는 그의 힘에 이기지 못해 침대에 눕자 그의 몸도 자연스레 내 위로 타고 올라와 허벅지를 양손으로 단단히 그러쥐었다.
“아직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나?”
그럴 리가. 그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까부터 제 머릿속엔 그가 주는 쾌감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평소보다 배로 느껴지는 감각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허벅지를 그러쥐고 양옆으로 벌리고 있는 이 자세마저도 치욕스럽다기보단 두려움과 기대 반으로 범벅되어 있는 상태였다.
“내가 있을 땐 다른 생각하지 마.”
자기도 나 신경 안 쓰고 서류만 보고 있었으면서.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간만에 먹는 밥에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알았으니 이제 이거 풀어주면 안 돼요?”
“안 돼.”
욕심껏 그를 붙잡아 먹고 싶다는 생각은 단호하게 내리쳐졌다. 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는 이 손 덕분에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이라도 보면 다음에 무엇을 할지 예측할 수 있었지만, 지금으로썬 전혀 그럴 수가 없었다.
“말했잖아. 네 집중이 내게 온전히 온다면 생각해 본다고.”
“지금 하고 있는 걸요.”
“안 느껴져.”
아, 그러세요. 그의 말에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미려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그의 것에 숨도 삼킬 새 없이 입술을 다물었다. 예고도 없이 감각적으로 밀치고 단번에 들어오는 것은 허리를 가볍게 휘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는 손이 허공에서 불안하게 떨자 내 손목을 가볍게 그러쥐는 것이 있었다.
“내게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머릿속에 담아 두지조차도 마.”
그렇게 말하며 그는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손으론 여전히 내 손목을 붙잡은 채로 허벅지를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묶여 있는 손으로 인해 풍만한 가슴이 한껏 모여졌다. 보이지 않는다는 감각이 평소보다 더욱 아찔하게 다가오게 만들었다.
평상시라면 들리질 않은 소리가 유난스레 제 귓가에 다가왔다. 눈이 보이지 않아 제 허벅지를 여러 번 다잡는 그의 손길 하나하나가 민감하게 다가왔다. 작지만 헐떡이는 그의 숨소리와 밑에서 찰박이는 소리는 예민하게 달아올라 있는 촉감을 더욱 증폭시켜 주었다.
좁은 길을 가르는 그의 것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강하게 안을 짓누르는 듯한 그의 행동에 눈을 질끈 감았다. 발끝이 오그라들며 헐떡이는 숨과 함께 그의 손아귀 안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그의 손을 꽉 잡았을 때, 그 또한 얼마 가지 않아 내 안에 파정했다.
숨을 헐떡이며 입술을 달싹이자 그가 내 손을 묶은 끈을 풀어 주었다. 해방감과 함께 조금은 어색함에 손목을 붙잡자 그의 체중이 내 몸에 실렸다.
“눈을 뜨는 너의 동공에 언제나 내가 보여야 해.”
그가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쓸며 눈에 씌어 놓은 끈을 풀어 주기 위해 뒤로 가져갈 때였다.
쾅쾅쾅! 거세게 내려치는 노크 소리에 저도 모르게 그의 품 안에 기어 들어갔다. 뭐야. 무슨 소리야?
“무슨 일이지?”
이 상황을 방해받아 화가 난 것인지 그의 음성이 불편할 정도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곁에서 듣기만 해도 알 수 있건만, 바깥에 있는 이는 전혀 모르는 것인지 여전히 다급한 행동만큼이나 다급한 말로 이어갔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 어리둥절해진 내가 더듬거리며 그의 어깨를 붙잡는 순간이었다.
“적이 급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