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먹고 싶어-63화 (63/86)

# 63화

한 번의 전쟁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내 인상은 변하게 되었다.

왕자를 노리는 요망한 요부에서 어쩌면 정말로 소문의 신녀일 수도 있다는 인상으로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변한 것이 전혀 없는데 말이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과론적으론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다. 덕분에 날 시중드는 사람들을 제외하고서도 퍽 친근하게 구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평소엔 명령이 아니면 무시하기 일쑤던 이들이 호감을 가지고 친절하게 접근해 왔다.

하지만 상황은 마냥 좋은 편은 아니었다. 왕자가 거처로 삼던 성을 미끼로 쓴 탓에 안은 황폐화되다 못해 거의 폐가 직전의 수준에 이르렀다. 덕분에 그곳이 수리될 때까지 급하게 다른 거처로 옮기게 되었다.

거처는 생각보다 멀었다. 밝혀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요새라 자주 애용하고 있었는데, 발각된 김에 아주 멀리 옮길 심산인 모양이었다. 나와 그를 태운 마차는 오랫동안 움직이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바로 안내받은 방에 짐을 두며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흠. 예전 방보다 좀 작네. 생각보다 좁은 방에 크기도 작아진 듯한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앉혔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섰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나?

어렸을 적 엄마와 단둘이 살던 시절을 떠올리면 엄청나게 커다란 방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전의 방에 비해 작을 뿐이었지, 평범한 사람들에 비하면 이런 화려한 방은 꿈도 꿀 수 없는 장소였다.

무서운 적응력. 그에게 잡혀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익숙해진 몸을 쓰다듬으며 부르르 떨었다. 좋지 않아. 자꾸만 내가 목표했던 구수한 쌀밥과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추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재빠르게 손을 내렸다.

“아뇨. 그냥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어요.”

내 말에 그는 자연스레 내 곁으로 다가왔다.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도록. 당분간은 여기서 머무를 예정이다. 경비가 좀 허술할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신의 어깨에 두른 망토를 벗어 내 어깨에 둘러 주었다. 정말 추워서 그런 거 아닌데. 하지만 이미 벗어서 내게 둘러 준 그를 향해 아니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고갤 끄덕이며 제 몸에 망토를 여몄다.

그의 망토가 내 몸을 가릴 정도로 제 몸을 두르고 나서야 그는 만족스러운 듯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의 행동에 자연스레 나 또한 옆에 쪼르르 다가가 앉았다. 내 행동에 그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큼흠, 목을 다듬으며 내가 더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곁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이제 24시간 같이 붙어 있을 필요는 없게 되었군. 부하들이 널 믿고 있으니 말이야.”

“그렇네요.”

그의 말에 반색하며 대답했다. 그와 같이 다니면서 지루하진 않았지만 은근 힘들었던 참이었다. 그의 살인적인 스케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조차 지치게 만들었다.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잠이나 좀 잘까. 시간을 때우느라 자던 낮잠이 얼마나 꿀맛 같았는지 알고 난 뒤부터 계속 염원해 오던 소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환한 표정과는 달리 뚱한 그의 표정이 피부에 닿았다.

“그냥 내 명령으로 곁에 하루 종일 두도록 할까.”

“네?”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농담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놀라 떨어진 내 몸을 다시 가까이 끌어당겼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살 떨리게 하는 건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내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의 곁에 붙었다.

요즘 따라 그의 행동이 이상했다. 안 하던 말을 하는가 하면, 내게 상냥하게 대하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상하게 접촉은 자주하면서 밤일은 꽤 줄어든 상태였다.

“곁에 계속 있겠다간 자꾸 이상한 말이 나와 버릴 것 같군.”

“어디 가요?”

설마 오늘도 그냥 가는 건 아니겠지? 나는 은근한 손짓으로 망토를 풀며 그의 곁에 다가갔다. 평소대로라면 이 시간엔 그와 한참 식사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안 그래도 최근 밥 먹을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 아쉬운 마음이라 오늘 밤을 잔뜩 기대하던 중이었는데.

그는 내 말에 힐끔 쳐다보다 이내 다시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동안 바빠서 같이 있기 힘들 것 같아.”

“네? 하지만 그럼…….”

내 밥은? 충격적인 소식이나 다름없는 말에 침대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안 돼. 내 밥! 충격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오늘만을 기다렸는데 밥을 먹질 못한다니. 이곳에서 자신만 먹을 수 있도록 한정 지었으면서, 적장 자신을 먹지 못하게 하는 기만 행위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찬찬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저 작게 숨을 뱉은 것인지, 한숨을 내뱉은 것인지 모를 바람으로 머리카락을 간질은 그가 날 향해 허릴 숙였다.

가벼운 입맞춤. 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이며 그의 혀가 입술을 달싹이게 만들었다. 조금의 틈도 놓칠 수 없었던 난, 그의 목에 팔을 둘러 그를 단단히 옥죄었으나 곧 그는 입술을 떼어 내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

그의 말에 입술을 샐쭉하니 내밀었다. 그냥 이대로 덮쳐 버릴까. 그의 알 수 없는 눈을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팔을 풀어내었다. 디저트를 줬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지 뭐.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그는 생각보다 자주 들르지 않았다. 내게 밥을 주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바쁜 나날은 계속되어 침실에 걸음조차 하지 않는 날이 잦았다.

“내 밥…….”

결국 오늘 밤도 혼자가 되자 너른 침대 위를 하염없이 뒹굴거렸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냥 그때 덮치는 거였는데! 흑흑. 불쌍한 내 인생.

“맛난 거 먹고 싶다.”

그렇게 말하며 침대 끄트머리로 몸을 굴렸다.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 슬픈 제 감정을 간신히 달래 주던 참이었다.

“딸!”

쿠당탕! 갑작스러운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서려다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아, 아야야…….”

꽤나 볼썽사납게 떨어졌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아픈 제 머리를 감싸 쥐고선 울상을 지었다. 그나저나 잠깐, 딸? 따알?

고개를 재빠르게 들어 올리자 은은한 등불 사이로 여자의 모습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위로 찬찬히 시선을 올릴수록 명백한 엄마의 모습이 드러나자 놀라 소리쳤다.

“엄마?”

“그래, 우리 딸. 엄마야. 보고 싶었단다.”

보고 싶었다는 그녀의 말에 저도 모르게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왔다. 모녀간의 정 따윈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만으로 이렇게 기뻐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보면 모양이다.

“엄마아!”

그녀를 애타게 부르짖으며 품게 안겨 들었다. 코를 찌르는 익숙한 단내와 함께 부드러운 살에 제 얼굴이 파묻히자 그녀는 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너도 내가 보고 싶었구나.”

“응응.”

정말이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랐다. 내게 왜 카마수트라만 가르쳤는지에 대해 일장연설을 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미안하지만 우리에게 긴말할 시간이 없단다.”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이 기회야.”

그녀의 의중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랑 함께 여기서 도망치자, 딸.”

“뭐?”

갑작스러운 말에 순간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놀라 큰소리쳤다. 내 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가 재빠르게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쉿! 기쁜 건 알지만 너무 소리가 크잖니.”

“하지만 엄마. 어떻게…….”

어떻게 탈출할 거냐고 물어보다 말문이 막혔다. 잠깐, 그러고 보니 엄마는 여길 또 어떻게 들어온 거지?

날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내 질문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묘한 미소 지었다.

“엄마가 누구겠니. 하찮은 밥들에게 당할 것 같아?”

아, 그렇구나……. 새삼 그녀의 노련함에 감탄하다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실력을 제일 먼저 전수해 주었어야 했던 거 아냐?

다소 갑작스러운 그녀의 제안에 나는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최근 그가 내게 밥을 주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이곳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다소 황당한 조건이었던 ‘임신’도 그의 입에서 쏙 들어갔고 말이다.

이대로라면 구수한 보리밥은 아니어도 따끈하게 갓 지은 쌀밥 정도는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내전을 생각하면 그마저도 고민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엄마. 난…….”

“하지만은 없단다. 그곳에 떨어트리면 내 계획대로 잘 흘러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오산이야.”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딸.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

돌아가자니, 무엇을? 그녀의 말이 좀 이상했다.

“이번엔 엄마의 지시대로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녀의 마음속을 알 수가 없었다. 항상 뜻 모를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엄마는 유달리 더했다.

똑똑.

“헉!”

바깥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직 엄마가 있는데! 어디에 그녀를 숨겨야 할지 몰랐다.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엄마를 재빠르게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곧 다른 감시병들이 오는 모양인가 보구나.”

“엄마……?”

그녀의 말에 의문을 품다 이내 깨달았다. 그녀가 자신의 몸을 이용해 남자들을 꿰어 낸 것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전히 육감적인 그녀의 몸매는 매우 빼어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가볍게 내 뺨에 손을 얹었다.

“잘 생각해 보렴, 딸. 내일 올 때까지 갈 채비를 마쳐 놓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반대쪽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엄마를 실망시키지 말렴.”

태연하게도 문으로 나가는 그녀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까지 시선 한 번 떼지 못하고 그녀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도대체 뭘까.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엄마는 제가 여태껏 원했던 탈출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녀의 말을 재빠르게 들었을 테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다시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이 아닌 왕자였다. 드디어 원하던 밥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향해 반갑게 인사할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그의 말에 아까 있었던 일을 말할까 하다 이내 꾹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를 그에게 고발할 수는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 있고, 그녀에게서 모녀간의 정을 별달리 느낄 수 없었다고 한들 이곳에서 그녀는 내게 엄마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결국 난 그에게 끝끝내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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