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제 피부로 느끼게 되자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
“지금 어디에 있지?”
당황해 책을 놓친 나완 달리 태연자약한 그의 목소리가 상황을 진행시켰다.
“예상대로 서쪽에서부터 진입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쪽인가…….”
가볍게 몇 마디를 더 주고받던 그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을 막았다.
전쟁터는 이제 듣기만 해도 끔찍했지만 내 말대로 하는 이들이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말 한마디에 그들의 목숨이 좌지우지된다는데 태평하게 안에서 차나 홀짝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도 따라갈게요.”
“너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빛을 바라보던 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뭐, 안 될 건 없겠지. 오려면 오던가.”
그의 말에 냉큼 뒤에 따라붙었다. 사실 솔직한 심정으론 가고 싶지 않았다. 평상시 본능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면 벌써 탈출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은 단 하나였다.
내가 착해서 문제지 뭐.
전쟁터에 가는 게 처음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떨리는 몸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거기서 칼까지 맞았는데 누가 안 무서워할 수가 있어.
마지못해 따라가긴 했지만 역시 다치긴 싫었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불안감에 저도 모르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옷깃을 붙잡자 그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손.”
어? 그의 말에 퍼뜩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날 향해 자신의 오른손을 가만히 내민 채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옷 말고, 손을 잡아.”
“아…….”
날 향해 뻗은 손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새삼스럽게 밝은 대낮에 잡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매일 밤이면 잡았던 손인데. 새삼스러운 감정에 머뭇거리며 그의 손을 잡자, 그는 자신의 곁으로 날 끌어왔다.
“뭐, 뭐……!”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가려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채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는 탓에 그의 말에 무작정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전쟁터로 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성을 미끼로 쓰는 것만큼 모든 사람들이 급하게 다른 곳으로 대피하느라 웅성거리고 있었다. 전쟁터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끔찍하게 싫어하는 피 냄새 또한 짙게 퍼지고 있었다.
어느덧 제일 높아 보이는 망루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 손을 놓아 주었다.
“여기 있어. 여기라면 적들이 오기 힘들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 뺨을 조심스레 만졌다. 묘하게 씁쓸한 손이 내 기분을 기어코 싱숭생숭하게 만들고 나서야 떨어졌다.
“맥시안.”
“네, 왕자님.”
언제부터 곁에 있었는지, 바로 하명받은 맥시안이 고갤 숙이며 나타났다. 손을 떼어 냄과 동시에 허리를 일으킨 그가 맥시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곁에 있도록.”
“하지만 저도……!”
“저번처럼 두 번의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가차 없이 맥시안의 말을 잘라 버렸다. 날카로운 눈빛은 말뿐만 아니라 그의 목까지 잘라 버릴 것처럼 서슬 퍼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부하한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덕분에 잔뜩 쫄아 있는 맥시안이 간만에 불쌍하다고 생각 들었다.
“……알겠습니다.”
맥시안의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챙겨 다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번 함정에서 메인 미끼나 다름없는 그가 전장에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재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슬쩍, 맥시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뭐. 누군 다른 이도 아니고 네가 옆에 있는 게 마음에 드는 줄 알아? 그에 질세라 나도 똑같이 그를 향해 표정을 와락 구겨 주었다.
“왜 나올 수 있다고 무리수를 둔 거야? 평소처럼 얌전히나 있을 테지.”
“내 마음이에요. 나올 수도 있지.”
“공주님은 공주님답게 안에 있는 게 좋을 텐데?”
“아까 못 들었어요? 내 마음이라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 그를 향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라고 있는 애가 이렇게 멍청할 줄이야. 한심스러운 그의 얼굴을 보고 있느니 차라리 아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더 실용적일 것 같았다.
자연스레 시선을 내리자 아래의 상황이 빤히 보이기 시작했다. 적의 손이 닿기 어려운 곳 아니랄까 봐, 한창 칼부림 중인 아래와는 간격 차가 꽤 되어 보이자 입을 꾹 다물었다.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피 냄새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과 사람을 베어 넘기는 것이 안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걱정되기도 하고요.”
내 말에 맥시안은 날 빤히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뭐야. 무시할 거면 왜 물어본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의 행동에 토라져 고갤 돌렸다. 마침 시선을 돌린 곳에서 사람이 베어 넘겨지는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그로부터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어?”
이곳 망루의 상황을 눈치챈 것인지 몇몇 이들이 이곳에 올라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애초에 작전대로라면 이곳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야 할 이들이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재빠르게 옆에 있는 이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맥시안?”
“왜 불러.”
도대체 내가 그의 어떤 심기를 건드렸다고. 아직도 삐딱하게 대답하는 그가 얄미웠지만 무시한 채 아래를 향해 재빠르게 손짓했다.
“저기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그게…….”
그의 말에 순간 멈칫했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괜찮은 걸까? 영화 같은 데서 보면 괜한 오지랖이 전쟁의 판도를 뒤집기도 하던데. 전쟁의 전 자도 모르는 내가 이 상황을 알려서 무엇 할까 싶었다.
하지만 난 도망가는 걸 택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상황에 도피하는 것이 아닌, 맞서는 선택을 한 순간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끄는 것 같아서요.”
“뭐? 네가 하라는 대로 하고 있잖아. 설마 그것도 불만이라는 거야?”
“아뇨. 이제 후퇴할 시간이 아닌가 싶어서요.”
“뭐?”
그제야 맥시안은 내가 손짓한 곳을 향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칫하면 그대로 넘어갈 정도로 아랠 향해 빤히 바라보고 난 뒤에서야 그는 재빠르게 일어섰다.
“……너 잠깐 여기에 가만히 있어.”
“네?”
나 혼자? 그의 말에 놀라 반문했다.
“혼자 잘 있을 수 있지?”
“아니, 애도 아니고. 그렇긴 한데…….”
수긍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아래를 향하기 시작했다. 재빠른 발걸음은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가 버렸다. 허망함에 눈을 한 번 굴렸다 다시 아래로 내렸다.
“……나 혼자 괜찮겠지?”
설마 저번처럼 누군가 나를 죽이려 드는 사람이 나오겠어. 여긴 제일 높은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가 직접 지정해 준 장소기도 했다. 이런 곳까지 적의 침입을 받아야 한다면 전략은 그야말로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불안함에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다가 이내 벽에 몸을 찰싹 붙였다.
혹시 모르잖아. 아주 만약에 대비하기 위해 제 몸이 보이지 않도록 동그랗게 말았다.
하지만 맥시안이 가고 난 지도 한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귀를 얼얼하게 만드는 소리들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깝게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망루를 향해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었다.
“저기 있다!”
으악! 정확히 날 집어 가리키는 이를 보고 화들짝 놀라 몸을 숨겼다. 하필 궁금해서 봐도 적한테 걸릴 줄이야! 더군다나 아까보다 한층 더 가까워진 적의 모습은 뭐였지? 설마 맥시안이 실패한 건가?
“찾았다!”
누구? 나?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던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날 향해 커다란 곰같이 생긴 이들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오지 마! 맛없어 보인단 말이야! 기세등등하게 피로 점철되어 있는 칼까지 휘두르기 시작하자 나는 반대 방향으로 뛰기 위해 몸을 돌렸다.
내가 정말 두 번 다시 전쟁의 전 자 근처에 가나 봐라!
“으아악!”
몸을 돌리기가 무섭게 등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물씬하고 피 냄새가 훅 끼쳐 오자 도망치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데쟈뷰인데. 설마……. 나는 재빠르게 고갤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너도 참. 그 잠깐 사이에 자꾸 당하는 것도 재주야, 재주.”
우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맥시안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말하는 것을 보자 나는 와락 표정을 구겼다.
“뭐야. 구해 줬는데도 왜 그런 눈빛인데?”
“제 눈빛이 뭐 어때서요?”
이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라고. 맥시안을 향해 한없이 얼굴을 찡그리며 입술을 내밀었다. 이정도의 미녀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단순히 내가 생각하던 사람이 안 와서가 아닌, 맥시안이 다시 내 옆에 섰다는 것이 내 기분을 급속도로 나쁘게 만들었다.
“그러게 누가 절 혼자 내버려 두고 가래요? 주의까지 받아 놓고선.”
“네가 너무 눈에 띈다고 생각하진 않아?”
“예쁘게 생긴 걸 어떻게 해요?”
내 말에 맥시안은 입술을 꾹 닫았다. 왜? 사실이잖아.
“……그래도 네 덕분이야.”
한껏 마음속으로 맥시안을 욕하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옆에서 들리는 말에 놀라 고개를 돌리자 평상시에 몇 없는 진지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빨리 발견하지 못했다면 작전은 실패했을 거야.”
“그렇다면…….”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미약하게 웃음을 보였다.
“방금 막 마무리하고 온 길이야.”
“그럼 아까 그들은 도대체 뭐예요?”
“으음……. 아무래도 실패할 것 같으니 너라도 데려가려고 했던 모양이었나 보지.”
그 행동으로? 눈에 새겨지듯 쿵쿵거리며 뛰어오는 검은 곰 두 마리를 생각하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누가 봐도 해치러 오는 모습이었는데.
“네 덕분에 이겼다.”
그 순간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저도 모르게 고갤 돌렸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것인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체를 밟고 내게로 다가왔다.
“아뇨. 저는 한 일이…….”
그냥 영화에서 흔하게 보일 법한 책략을 말했을 뿐인데. 그에게 직접 칭찬받는 일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이게 바로 환생 치트키? 환생의 메리트라곤 하나도 느낄 수 없었던 나에게 드디어 해 뜰 날이 찾아온 걸까?
“고맙다.”
“네? 지금 뭐라고…….”
“고마워, 비시아.”
그의 말에 순간 복잡하게 머릿속을 메우던 말들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저 사람이 나보고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믿기지 않아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조심스레 날 감싸 안았다. 그의 품에 안기고 나서도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해 눈을 깜빡거리다 맥시안과 마주쳤다.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의 맥시안의 표정을 보며 무심코 날 껴안은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와 동시에 더욱 찡그리는 맥시안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제야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를 어쩌나. 내 공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