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먹고 싶어-61화 (61/86)

# 61화

얼결에 맥시안의 손에 이끌려 가게 된 곳은 커다란 홀이었다.

서재에 가기 위해 설쳤을 때 어렴풋이 본 적은 있었지만, 이곳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있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여태까지 소리만 들릴 뿐 보이지 않았던 이들이 한데 다 모인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등장하는 동시에 그들의 이목이 모두 내게로 모였다.

“왕자님. 데려왔습니다.”

제일 높은 상석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닿았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동등하게 보던 그였는데. 자리의 덕인 걸까. 어째서인지 그와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원하는 대로 데려왔으니 말을 해 보도록.”

그의 말과 동시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거세졌다.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한껏 더 날카로워졌음은 두말할 것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네가 이곳의 위치를 발각시킨 적이 있는가?”

“아니요.”

애초에 기절한 채 끌려왔는데, 이곳의 위치가 어딘지 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눈이라도 뜨고 정중하게 모셔왔더라면 억울함이라도 덜하지.

“널 찾는 이들이 교단뿐만 아니라고 들었는데.”

“추측 가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네가 잡히기 전에 일부러 단서를 남기고 온 것은 아닌가!”

“그 정도의 공작이 가능한 여유였다면 애초에 잡히질 않았겠죠.”

그렇게 말하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엔 나뿐만 아니라 그의 책임도 있었다. 상석에서 턱을 괴고 있는 그는 눈 하나 표정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다수에게 질문 공세를 당하는 것이 그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네가 하지 않았다는 증명을 해 보거라!”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순간적으로 들려오는 말에 기가 차 그를 바라보았다. 한 적이 없으니 증명할 증거도 없는 건데, 그걸 증명하라고 하다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는 그의 억지에 기가 찰 뿐이었다.

“제가 하지 않았는데 증명을 어떻게 하죠? 정 궁금하시다면 절 감시하던 이들한테 여쭤보시죠. 제가 하루 종일 뭘 했는지요.”

“네가 그들을 금품으로 매수했는지 어찌 알지?”

“이곳에 빈손으로 온 제가 가진 것이 뭐가 있다고요.”

정말 내가 이곳에서 뭘 하는 것인지 모르는 걸까. 아무런 잘못도 없는 내게 적의에 가득 찬 눈들이 향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전 갇혀 있고, 제가 이곳에서 하는 건 몇 가지 되지 않아요.”

나는 그들을 향해 가볍게 빙 둘러보았다.

“책 읽는 것. 그리고 왕자님의 밤 시중을 드는 것.”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날 이곳에 데려왔으니 이 정도 폭탄선언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어야지. 놀라고 있을 그를 상상하며 더욱더 짙게 입가를 끌어당겼다.

“매일 밤마다 왕자님을 받아내느라 체력적으로 힘든 상황에 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제가 연약한 몸으로 여러분들을 뚫고 나갔다 왔다는 건가요?”

“뭐라고?”

내 도발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 이가 앞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쯤에서 해 두도록.”

단호한 명령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려는 움직임을 막았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지?”

“하지만 왕자님! 그녀 때문에 여태까지 한 일들이 틀어지게 둘 수는 없습니다!”

억울한 듯한 그가 안타깝다는 듯이 하소연했다.

“그들이 여기에 찾아오는 건 곧 시간문제라는 걸 모르시지 않습니까!”

간절하게 말하는 그의 행동은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충신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정말로 충성한 자를 위해 간언을 해 줄 수 있는 자. 결속력이 단단하다는 말이 그저 헛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난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면 안 되나?”

“지금 뭐라고 했지?”

근처에 있던 다른 이의 날카로운 질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핫, 나 지금 너무 주제넘었던 거 아니야?

“괜찮으니 계속해.”

하지만 왕자는 날 제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의견이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을 떼어 내어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주변이 잠잠해지긴 했지만 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혼잣말 한 건데 더 하라니. 어쩌다 한 말이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게 될 줄이야. 후회해도 이미 엎지른 물은 담아 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나를 구하려고 오는 이들일 수도 있는데, 오히려 그들을 해치게 될까 잠시 고민되었다.

주저하다 전생에 관심 있었던 영화의 한 장면에 대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역으로 이용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이곳을 알고 이곳으로 들어오려고 한다면. 그들이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다 밖에서 역으로 가두면 승산 있지 않나요?”

“그게 말처럼 쉬울 거라고 생각하나?”

그의 말에 동의했다. 말과 행동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내가 아닌 그들이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이 상황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면 되는 것뿐이었다.

“이곳의 위치를 안다면 이곳에 쳐들어올 것이 분명한 거 아닌가요? 그렇다면 성벽 밖에서 매복했다가 치면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어떻게?”

“저 높다란 성벽을 무너트리거나 타고 올라가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겠죠. 유일한 통로인 문에 불을 붙이는 거예요. 문에서부터 붙은 불이 안으로 파고 들어가도록요.”

순간적으로 홀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하지만 곧이어 수군거리는 소리가 재빠르게 빈 곳을 메워가기 시작했다.

“크흠.”

내게 사사건건 물어보던 이조차 헛기침만 내뱉을 뿐,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혹시 통한 걸까……?

“하지만 네가 한 말을 어떻게 믿지? 이렇게 말해 놓고 그자들한테 역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귀띔해 줄 수도 있을 텐데.”

“그건 내가 보겠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내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나온 대답으로 모두의 이목이 모여졌다. 자연스레 돌아가는 내 고개엔 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자 놀란 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곁에서 24시간 지켜보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런 대답은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당황한 이의 말이 들려왔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쾌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날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아뇨! 아닙니다.”

“그럼 이제 됐군.”

조금은 일방적인 상황에서 모든 말이 마무리되자 더 이상의 질문은 들려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왕자가 날 보호해 주는 것 같은 뉘앙스가 풍기자 부하들도 알아차린 것인지 말을 삼가는 눈치였다.

“더 이상의 의심은 용납하지 않는다. 내가 의심이 들면 그 바로 처리할 테니 그에 대해선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도록.”

그의 단호한 말과 함께 회의가 끝났다. 나는 속속히 자기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 잡고 서 있었다. 날 데려온 맥시안마저도 날 힐끔 바라보더니 이내 등을 돌려 가기 시작했다. 잠깐! 너만큼은 날 데려다주고 가야지!

애처롭게 손을 뻗어 보았지만 이미 등을 돌린 맥시안에게 닿을 리 없었다. 평상시엔 등에 눈이 달린 것처럼 행동하더니. 오늘만큼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재빠르게 내빼는 그를 향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결국 단둘만 남은 어색한 상황이 펼쳐지자 눈을 질끈 감았다.

“……믿어 줘서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맥시안이 말하고, 그가 내 방에 와서까지 보여 주었던 신뢰를 나는 끝까지 의심하고 있었다. 마음 한편에 언제 어디서든 그가 배신하더라도 놀라지 않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를 보는 순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내 편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은 틀렸었다.

“그래.”

그의 시선이 가볍게 내게 왔다 멀어졌다.

언제부터일까. 강압적이기만 하던 그의 시선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아무도 날 믿지 않고 불신하는 장소에서, 단 한 사람만이 날 믿는 느낌은 꽤나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 사람의 곁에 있어도 괜찮다는 감정이 제 안에 한 꺼풀 감싸고 있던 무언가를 벗겨 내는 것만 같았다.

“아까도 들었겠지만, 이제 한동안은 내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내 어깨에 자연스레 올리는 손을 따라 시선이 올라갔다.

“당신 일은 어떻게 하고요?”

“한동안은 괜찮겠지. 부하들에게 맡기면 된다.”

한동안 몸에 상처가 없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쁜 일을 자처하고 있었으면서. 갑자기 사라진 일들의 행방을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나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하자 자꾸만 물어보는 것이 망설여졌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요?”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그의 앞에 똑바로 서서 바라보았다.

“어쩌면 당신을 믿었던 부하들을 등지는 행동일 수도 있는데.”

“너는 내 아이를 가질 사람이니까.”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저 말이 그가 원하는 목적을 위해 하는 말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무언가…….

제 어깨 위에 올려져 있는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말의 뜻이 달라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

그날 이후로 정말 그의 말대로 24시간 곁에 붙어 있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늘 그의 곁에 붙어 있게 된 걸로 느낀 건 그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무척이나 많다는 것이었다.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일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내가 곁에 있어 일을 많이 하지 못한다고는 했지만 내가 보기엔 달랐다. 여전히 그는 많은 일들을 감당하고 있었다. 다친 상태가 무색할 정도로 그에게 떠넘겨지는 일들은 방대하기 짝이 없었다.

“매일 이렇게 일을 하고 있는 건가요?”

“평상시엔 이보다 더 많은 편이다.”

“……안 힘들어요?”

내 말에 줄곧 서류에 꽂혀 있던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날 믿고 따라온 이들이다. 내가 고생하지 않으면 그들이 몇 배는 더 고생할 터. 그들의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지 않나.”

생각보다 정상적인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역이면 으레 나쁜 쪽으로 생각하기 십상이었는데 그를 보고 있자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 동안 그와 밀착하는 생활을 지내자 점점 나에 대한 소문도 슬그머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와 연관이 없던 일이었기에 급속도로 식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어느덧 나도 그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서류 정리를 하기 시작하면, 나는 그의 곁에 붙어 미리 준비했던 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서류에 사각거리는 깃펜 소리와, 가끔가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평화롭게 방 안에 흐를 때였다.

“왕자님!”

노크조차 잊은 이가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적이 나타났습니다!”

툭.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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