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장담할 순 없었다.
누군가 날 죽이려고 했다고 하기엔 방식이 너무 교묘했다.
하는 방법도 귀찮기 짝이 없었다. 서재에 들이닥친 암살자만 해도 그랬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거였더라면 애초에 그자를 이용해 날 죽이라고 하는 게 더 빨랐을 터였다.
하지만 암살자는 나를 보는 순간 당황한 티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타겟이 없다면 조용히 돌아가면 될 텐데, 그러지 않고 날 죽이려고 한 것까지. 모든 것들이 어설프고 의심스러웠다. 한 번 떠오른 의심은 모든 것들을 수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와 똑같이 당황하던 암살자는 내가 목표가 아님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으로도 내가 타겟이 아님을 스스로 입증했고.
그럼 도대체 무엇일까.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드라마 같았다.
“아가씨, 무슨 일 있어요?”
“으, 응?”
언제 다녀온 것인지 뜨거운 물을 대야 잔뜩 들고 온 시종이 날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얼굴이 심각해 보여서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일이 터지기 전부터 내 걱정으로 전전긍긍하던 이였다. 그런 그녀에게 확실치 않은 걸 이야기해 괜한 걱정을 더 얹어 줄 필욘 없었다.
“혹시 아까 일 때문에 그래요?”
그녀에겐 적당히 둘러둔 참이었다. 내게 암살자가 검을 겨눈 것이 아니라, 우연찮게 싸우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고, 피하려다 재수 없게 피를 뒤집어쓴 것이라고 말이다.
“아냐.”
나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회피했다.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무엇이든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면 왕자가 처리해 줄 것이 분명했다. 아직 내 가치가 떨어진 것도 아닌데 그가 나를 버릴 리 없었다. 내가 허무하게 죽도록 방치하기엔 그 위험을 무릅쓰고 데려온 것이 말이 되지 않잖아?
그러고 보면……. 잠깐이지만 내가 시체를 보지 않도록 감싸 주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부드럽게 머릴 감싸 안아 내가 고갤 돌릴 수 없게 자신의 품으로 시야를 가리던 모습까지. 그날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처럼 얼굴에 확 열이 올라왔다. 이상한 사람. 묘한 곳에서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다른 이들 같았더라면 검이 사람의 몸에 박히든 목에 박히든 내가 본다는 것에 상관하지 않았을 텐데.
“아가씨 괜찮으세요?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거 맞죠?”
“정말 아니야. 괜찮아.”
그녀의 묘한 눈초리가 날 따라오고 있었지만 끝끝내 그녀와 눈을 마주치길 거부했다. 괜스레 뜨거워지는 얼굴을 무시하며 새로 떠온 물로 재빠르게 씻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 사건 덕분에 방 밖으로 나갈 의지는 한없이 제로에 가까워졌다. 내가 방 안에 얌전히 있자 시종은 무척 마음에 드는 얼굴로 날 열심히 시중들었다. 분명 내가 나가지 않아서 안전한 것보단 일할 거리가 줄어들어서 기쁜 게 분명했다. 내가 나가지 않아서 좋냐고 묻는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을 때의 기분이란. 묘한 반항심이 잠깐 일었지만 실천하는 일은 없었다. 방 밖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고 그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걸 바에야 조금 심심한 것이 나았다.
내가 머무는 방에도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날 이후로 그는 내 방문에 다시 기사들을 배치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미세하게 달랐다. 나를 감시하려는 것이 아닌, 나를 보호하는 것이 주목적이 되어 방문을 지키게 되었다.
그리고 미세한 변화는 주변적 환경에서 그치지 않았다. 다행히 나의 심심함을 알아준 것일까. 그는 그날 이후로 내 방에 올 때마다 책 한 권을 들고 들어왔다. 내가 그토록 찾아도 없었던 소설 종류로만 말이다. 그 외엔 변한 것이 없었지만.
어느덧 사건이 발생한 지 이 주라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의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주변은 너무 평온하기만 했다.
그건 정말 우연의 일치였던 걸까. 그날 밤 자신의 방을 찾아온 그에게 은근슬쩍 물어보았으나 별일 없다고만 답했을 뿐이었다. 맥시안도 마찬가지였다. 궁금증을 못 참아 결국 다시 한 번 더 불러낸 그에겐 별다른 이야기를 들을 순 없었다. 그저 왕자님께서 모르신다면 저도 모르는 일일 뿐임을 강조하며 함묵할 뿐이었다.
물론 이대로 나를 죽이는 데에 더 이상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나로선 좋은 일이었다. 안 그래도 살기 바쁜 내게 위험성이 줄어든다는 거니까. 내게 별일이 없다는 건 어쩌면 큰 축복일지도 모른다. 그랬는데…….
나는 눈만 교묘하게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뭘 보는 거지?”
“요즘 뭐 해요?”
“뭐?”
“어디 싸…….”
어디 싸돌아다니면서 싸우는 거 아니냐고 말을 하려다 참았다. 방이 너무 조용해서 가끔가끔 이곳이 여전히 전쟁지역임을 까먹고 있는단 말이야. 그렇게 따지자면 그가 전쟁터에 출전해 싸우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 터였다.
“어디, 뭐?”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그의 말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꼬리를 흐렸다.
“어디서 뭘 하는지 궁금해서요. 얼굴에 못 보던 생채기가 있길래요.”
“아…….”
내 말에 이번엔 그가 말끝을 흐렸다.
“별일 아니다.”
아 그러시구나. 그의 말에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그는 내게 숨기는 것이 너무 많았다. 내가 당한 사건도 별일 아니라고 치부하더니 이번엔 자신의 얼굴에 있는 상처마저도 별일 아니라고 일축했다. 내가 아무리 외부인이라고 한다지만. 제게 속마음은 일절 털어놓지 않는 그가 내심 얄미웠다.
“얼굴뿐만 아니라 몸에도 점점 크고 작은 상처가 늘어나는 것 같은데요.”
다시 한 번 더 상처를 지적하는 말에 그는 대답을 회피했다. 후우. 그래, 내 말을 무시하겠다면 어쩔 수 없고.
“……너.”
“네?”
“언제쯤이면 임신할 수 있지?”
“네, 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저기요. 우리 아직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아무리 그가 원하는 최종적 목표가 내가 임신하는 거라곤 했지만 뜬금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행동에 자연스레 얼굴에 열이 올라갔다.
“아, 아무리 빨라도 아직은 알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런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자신과 달리 그는 꽤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하겠지?”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난감한 자신과 달리 그의 눈빛은 내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진지한 모습에 우물쭈물하다 저도 모르게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그, 글쎄요…….”
내가 인간이 아니라서 도저히 확답만큼은 줄 수 없었다.
“이렇게 매일매일 하는데 안 할 리 없지 않은가.”
내가 계속 애매모호하게 대답을 회피하자 그는 은근슬쩍 강요하듯 내게 대답을 종용했다. 평상시 같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이룰 수 있다며 으스댔을 텐데. 아니면 될 때까지 괴롭혀 주겠다며 잠자리를 시작하거나.
“저…….”
“최대한 빨리 널 공표하고 싶다.”
“네?”
“네가 내 수중에 있다는 걸 말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내 배에 손을 대었다. 은근히 만지는 그의 손은 부드러우나 강인했다. 마치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행동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설마.
“……교단에서 절 찾고 있나요?”
드물게 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진짜로 맞춘 건가? 하지만 그의 입에선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교단은 내가 없어졌을 때부터 발칵 뒤집혀서 찾으러 다닐 것이 뻔했다. 그렇담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혹시 다른 이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라도 하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다급하게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가르쳐 줘요. 절 찾고 있는 사람이 꽤 가까워졌나요? 아니면 테이젤? 그도 아니라면 혹시 에드…… 읍.”
비스듬하게 침대에 몸을 누웠던 그가 몸을 일으켜 난폭하게 입을 맞췄다. 입을 막을 생각이 다분한 입맞춤이 제 입안을 폭풍처럼 휩쓸다 빠져나왔다.
“말이 많군.”
“……제가 말한 것들이 사실인가요?”
굴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내 모습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간만에 보는 화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회피하진 않았다.
“그들이 널 찾는다고 한들 네가 어쩔 셈이지?”
“만나야죠.”
“하.”
내 말에 그는 빈정거리듯 웃었다.
“아직도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 게 대단할 지경이군. 너는 여기에 있고 내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잡아 뒤로 넘겼다. 침대에 앉아 있었던 터라 머리를 박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불편했다. 제 허벅지를 단단하게 붙잡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은 그가 고압적으로 나를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갈 일은 영영 없을 거야.”
그는 비웃으며 내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지분거렸다. 비딱한 웃음은 마치 그를 처음 보았을 때로 시간을 되돌린 느낌이었다.
“말했을 텐데. 네가 임신할 때까지 넌 이곳에서 벗어날 수조차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는 다시 한 번 더 내 입을 덮었다. 제 입술을 덮고 억지로 입을 비틀어 열게 만들었다. 거칠게 침범한 그의 혀는 내 치열을 훑으며 혀를 낚아채었다. 말하는 것조차 봉하려는 듯 그의 혀가 옭아매며 사납게 굴었다.
그의 손이 아직 옷조차 벗지 못한 내 몸을 샅샅이 훑었다. 가슴을 훑고 지나간 그의 손이 팬티를 옆으로 젖혀 아래를 지분거렸다.
“앗……!”
그의 손가락에 몸이 익숙하게 반응하자 귓가에 낮은 웃음이 다가왔다.
“이미 내게 철저하게 길들어진 네가 도망갈 곳은 없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손가락을 하나 넣었다.
“으응!”
아직 완전히 젖지 않았지만 이내 애액을 흘려보내는 곳은 천천히 그의 손가락을 촉촉하게 물들여나갔다. 그의 손가락에 애써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아내자 그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니면 색다른 기억으로 영영 잊지 못하게 만들어 줄까.”
뭐? 그의 말에 찡그렸던 눈을 떴다. 어느새 그의 다른 손엔 야참으로 들어와 있던 과일들 중 하나인 바나나가 들려져 있었다. 설마. 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