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했던 서재는 홀로 남겨지자 갑자기 제 몸집을 부풀린 것처럼 넓어졌다. ……이곳이 이렇게 컸었나? 훑어보던 책을 책장에 도로 꽂아 넣을 때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흐음.”
정말로 자신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자 자연스레 고개가 뒤로 향했다.
모른 척하라는 말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을 거라는 제 생각과는 달리 똑같이 생긴 책꽂이에, 여타 책들과 다를 것 없는 모습의 책이 꽂혀 있을 뿐이었다.
책일 뿐인데 제자리에 잘 돌려놓기만 하면 괜찮지 않아? 그저 맥시안이 돌아오기 전까지 잠시 훑어보다가 다시 돌려놓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큰일이 생길 것도 아니고, 보지 않았다 둘러대면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이끌리듯 천천히 금지된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다 멈추었다.
만약 원하던 내용이 아니라면? 보았는데 제게 그리 쓸모 있는 내용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만에 하나 보는 모습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제 목숨은 안전치 못할 수도 있었다.
원래 위험부담에 손 안 대는 주위이긴 한데……. 눈을 돌려 다시 한 번 더 책장을 보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난 뒤라서 그런 걸까, 다른 책들이 있는 곳과는 달리 음산함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으으음.”
잠시 고민하다 이내 발걸음을 다시 돌렸다. 역시 자신이 원하는 내용이 있을지도 모를 책을 확인하는 데 너무 많은 위험부담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성한 몸으로 나가고 싶단 말이야. 괜한 짓을 벌였다가 제 발목에 다시 족쇄가 생기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그 근처로는 일절 발길도 주지 않은 채 다른 책장 사이를 전전하기 시작했다. 내심 아쉬워 자꾸 뒤를 돌아보긴 했지만 잠깐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 서재엔 소설류도 없는 걸까? 한참 전부터 찾고 있는데 도저히 보이질 않았다. 그저 딱딱하기만 한 일반 서적들 사이에서 이 잡듯 헤매고 있을 때였다. 꽤나 육중한 문이 바삐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제 고개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맥시안! 마침 잘 왔어요. 혹시…….”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춘 채로 빤히 바라보았다.
“너, 넌 누구냐!”
너야말로 누구신데요? 당황함에 그저 눈만 꿈뻑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이 당황함은 나뿐만 아니라 방금 들어온 이도 같은 심정인지 강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게 볼일이 있어 온 것 같진 않았다. 연신 고갤 돌리며 주변을 살피던 그는 다소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다시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이곳엔 너뿐인가?”
“그런데요?”
“쳇…….”
남자는 짧게 혀를 차며 고갤 옆으로 돌렸다. 누굴 저렇게 다급하게 찾는 것일까. 혹시 맥시안을 찾는 건가? 고갤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잠깐, 옷차림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옷차림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보통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게끔 코끝까지 감추는 짓을 할 리 없었다. 범죄자면 몰라도.
그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품에서 짧은 검을 하나 꺼내 들었다. 손에 검을 쥠과 동시에 나가떨어진 검집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어쩔 수 없지. 네 목이라도 들고 가야겠다!”
네? 그의 말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게 꿩 대신 닭도 아니고.
“아, 아니. 누구신데 절…….”
“죽어라!”
다짜고짜 검으로 찌르려는 그의 행동에 놀라 몸을 옆으로 틀었다. 허억. 놀란 탓에 식은땀이 자연스레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다행히 짧은 검이라 휘두르는 범위가 그리 길지 않아서 망정이었지. 까딱하면 어딘가 한 군데 베였을 뻔한 상황에 놀라 제대로 입도 열 수 없었다.
아니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할 거 아냐! 자신을 향해 무작정 달려드는 이를 향해 당황함을 숨기지 못하고 재빠르게 도망쳤다. 거기다가 다짜고짜 ‘내 목이라도’ 들고 가야겠다니. 순전히 내가 이곳에 있던 게 재수 없어서 죽이겠다는 거 아냐!
“살려 줘요!”
밖에 누군가 있길 간절히 바라며 외쳤지만 그 누구도 서재 문을 다시 열고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젠장. 생각해 보면 바깥에 아무도 없었던 탓에 저 작자가 쉬이 정문으로 들어왔겠지. 하지만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살려 줘요! 맥시안!”
지나가는 이라도 좋으니 제 목소리를 간절히 듣길 바라는 마음에 목이 터져라 연달아 불러 재꼈다.
“소용없다! 이 시간대에 여길 지나가는 이는 아무도 없어!”
이곳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시시덕대는 그의 말이 거짓말일 것 같진 않았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우연히 지나갈 수도 있지!”
이렇게 되면 방법이 없었다. 떠났던 맥시안이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거나, 혹은 이곳을 벗어나 다른 이들이 있는 곳까지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손에 닿는 것은 닥치는 대로 던지면서 그의 행동거지를 관찰했다.
이곳이 그나마 넓고 장애물이 많아서 다행이지.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칼에 찔렸을 것이 분명했다. 맥시안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마냥 그를 기다리며 이 신경전을 계속할 순 없었다. 슬슬 이 추격에도 끝이 보이고 있었다. 미세하지만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괴인의 손이 보이자 갑작스레 방향을 돌렸다.
내가 향한 곳은 서재의 문이었다. 이곳에 있으면 그에게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저 하찮은 검에 찔려서 말이다. 또다시 제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 것이라고 생각하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싫어! 더 이상의 칼빵은 싫다고!
“저게!”
간발의 차로 뻗는 그의 손을 간신히 피하고 문으로 향할 수 있었다. 재빠르게 도망치는 눈앞에 문이 점점 다가오자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살려 주세요. 제게 위험하다며 누누이 당부하고 또 당부하던 시종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흑흑 말 좀 들을걸. 나 이제 말 잘 들을게. 방 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안 할게!
“드디어 잡았다!”
“꺄악!”
길고 탐스러웠던 머리카락이 이렇게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을까. 머리카락이 낚아채이기가 무섭게 고개가 위로 올라가며 제 몸은 순식간에 무방비해졌다. 손을 뻗어 간신히 문에서 멀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잡힌 것이 문제였다.
“그만 발버둥 치고 순순히 죽어 주시지!”
“싫어!”
싫다고! 아픈 건 싫었고 죽는 건 더더욱 싫었다. 그의 손을 뿌리치기 위해 자연스레 손을 위로 올리는 순간이었다. 제 몸에 내리쬐던 빛이 무언가로 인해 사라졌다. 뭐지? 두피에 가해지는 고통을 참기 위해 들어 올렸던 고개를 가까스로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곳에서 뭘 하는 거지?”
“아…….”
눈앞엔 전혀 예상외의 인물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만큼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이. 아는 사람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저도 모르게 긴장이 탁 풀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내 뒤에서 당황한 듯한 이의 목소리가 떨떠름하게 들려왔다. 어느새 제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있던 손 또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게 말입니다…….”
“이곳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물었다.”
“히익!”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나간 검은 정확하게 내 뒤에 있는 이의 목을 겨눴다. 가벼운 바람이 일며 제 뺨을 스치고 지나가자 나는 뒤를 보던 눈동자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왕자님!”
그 순간이었다. 목이 터져라 불러도 나오지 않았던 맥시안이 그의 뒤에서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저 자식. 날 지켜 준다고 호언장담했으면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았다.
“넌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순간적으로 들리는 그의 말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어깰 들썩였다.
“그게…… 심심해서요.”
“심심?”
아니, 그게 아니라. 한심하다는 눈빛이 내게 닿자 저도 모르게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래서 책을 찾고 있었어요. 맥시안이 괜찮다고 했고요.”
자신을 보호함과 동시에 재빠르게 그의 뒤에 있는 이를 언급했다. 죽어도 혼자 죽을 순 없었다. 언제든지 지켜 준다고 한 게 누구인데. 사태를 이렇게까지 만든 것엔 응당 책임이 뒤따라야 했다. 재빠르게 책임을 부담하는 내 행동에 내 앞에 있는 이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 맥시안은 어디에 있지?”
“여기에 있습니다, 왕자님.”
그의 물음과 동시에 재빠르게 옆으로 다가선 그가 고갤 숙였다.
“그녀를 두고 어딜 갔다 온 건가?”
“급하게 전달할 상황이 있다고 하여…….”
“내가 네게 준 명령은 딱 하나였을 텐데.”
“컥……!”
그 순간이었다. 제 뒤에 뜨거운 무언가가 퍼진다 싶더니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잇따랐다. 저도 모르게 뒤로 눈을 돌리려는 순간, 그가 다른 손을 뻗어 내 머릴 자신의 품에 감싸 안았다.
“크아악!”
잇따라 들리는 괴로운 소리와 크게 휘두르는 검의 소리가 제 예민한 귀를 타고 흘러왔다. 제 등에 튀는 끈적함과 동시에 털썩이는 소리가 들리자 저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녀를 지키라고 말이야.”
“……면목 없습니다.”
넌 좀 많이 면목 없어야 해. 나는 두 번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너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허리춤에 검을 갈무리하며 내 턱을 끌어 올렸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넌 조금 더 경계할 줄 알아야 해.”
그의 말에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집이라고 안일한 태도를 취했던 자신의 불찰이기도 했다. 이곳은 끊임없이 싸움이 발발하는 곳인데. 하다못해 제 예민한 감각을 늘 기민하게 새우고 있어야 함이 옳았다.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타이밍 좋게도 나타날 수 있었는지. 궁금증에 그를 향해 물어보자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왔다.
“여긴 내 서재이다만.”
아.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납득해 입술을 다물었다.
“흐음. 이대로 밤까지 시간을 같이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그는 내 등 너머로 눈을 잠시 흘겼다 다시 날 향해 바라보았다.
“할 일이 생겨 조금 이따 즐기는 걸로 해야겠군.”
그는 그렇게 말하곤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치 토닥이듯이 부드럽게 쓰다듬는 느낌에 잔뜩 긴장해 있던 어깨가 천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맥시안.”
“네.”
그의 하명에 재빠르게 맥시안이 곁에 다가왔다.
“방에 제대로 데려다주도록.”
“……알겠습니다.”
그의 말과 동시에 그는 날 자신의 품 안에서 풀어 주었다.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은데. 가자고 재촉하는 맥시안 덕분에 어영부영하다 결국 방까지 끌려오고야 말았다.
피를 뒤집어쓴 듯한 내 뒷모습에 놀라는 시종을 뒤로하고 나는 욕탕에 들어갔다. 재빠르게 뜨거운 물로 욕조를 가득 채워 주자 스스럼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첨벙.
물 안에 들어가자 닦아 낸다고 닦은 피가 욕탕에 서서히 번지기 시작했다. 옅은 붉은색으로 변질되는 물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머, 물을 다시 갈아야겠네요.”
“그래 줄래?”
뜨거운 물을 떠 오기 위해 급히 나가는 그녀를 뒤로하고 욕탕에 몸을 기대었다. 붉은 핏물에 놀라기엔 아직 제 몸조차도 진정되지 않았던 참이었다. 물에 잠긴 손을 들자 미세하게 떨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대체 뭐였을까.”
갑작스레 나간 맥시안과, 우연히 타겟이 없는 시간에 나타난 암살자. 그리고 이 시간대에 아무도 지나갈 리 없다고 호언장담한 말을 무시하고 나타난 왕자까지. 잘 짜인 연극처럼 딱딱 맞춰 벌어지는 일은 아직까지도 자신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잠깐.”
생각을 하다 멈추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이 너무 많았다. 우연으로 가장한 일이 잠깐 사이에 도대체 몇 개나 벌어진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혹시 누군가 날 죽이려고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