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대답을 하지 않으면 네 상황이 불리해질 텐데.”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그의 말에 우물쭈물 입술을 열었다.
“그게……. 기다리고 있었어요.”
“누구를?”
그의 말에 시선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곳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물어보는 거지?
“이곳에 올 사람이 당신 말고 더 있어요?”
“나를 기다렸다고?”
“네.”
내 말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녁을 잘못 먹었나?”
그건 제가 아까 전에 하고 싶었던 말이고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꽤나 가늘어졌다. 미심쩍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대로 도드라진 그의 얼굴이 꽤나 얄밉게 보였다.
“어제만 해도 날 찌르려던 이가 날 기다린다라. 차라리 도망치는 중이었다는 말이 더 신빙성 있군.”
그의 말에 침묵했다. 사실 나도 스스로 진실을 토해 내는 편이 오히려 그에게 오해를 안 살 것 같긴 했어. 하지만 이미 말은 내뱉어진 후였다. 그의 말에 어정쩡한 침묵으로 일관하자 그가 점차 내게 다가왔다.
문을 닫고 내게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의 눈동자에 자연스레 내가 담겼다. 안타깝게도 내가 뒷걸음질 치는 것보다 그의 발걸음이 더욱 빨랐다. 그의 시야에서 내가 사라지기도 전에 그는 내 뺨에 손을 대었다.
“……아냐, 오히려 잘 되었군. 질질 끄는 건 질색이어서 말이야.”
“네? 읍.”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자신의 입을 내 입술에 맞추었다. 가볍게 한 번 맞추곤 혀를 내어 농밀하게 입을 맞춰 갔다. 자꾸만 파고드는 그의 키스에 도망치듯 계속 뒷걸음질했다. 하지만 그는 날 놓아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내 고개를 잡고 더욱 파고들 뿐이었다.
툭. 발끝에 침대가 걸려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자 그는 내 허리를 잡고 날 침대 위로 기울였다. 발까지 완전히 침대 위로 올려진 후에야 그는 길고 길었던 입맞춤을 끝냈다.
“어차피 너도 기다렸다고 하니 기대에 부응해야 하지 않겠나?”
젠장. 그 말을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그의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처음도 아닌데 수줍음을 타는 건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걸쳐진 옷 위에 손을 얹었다. 쓸어 올리듯이 허벅지에서부터 찬찬히 올라오는 그의 손에 부드러운 옷이 끌려 올라갔다. 어느덧 그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엔 옷 대신 새하얀 속살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추위에 저도 모르게 살짝 떨었다.
“흥미롭군.”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 가슴팍에 달려 있는 리본을 풀어내었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의 간단한 손짓 몇 번으로 리본이 풀어진 옷은 그대로 제 하얀 나신을 드러나게 만들었다.
“저번에 살짝 맛보았을 때 이미 알고 있었지만 꽤나 예쁜 몸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드러난 가슴을 살짝 움켜잡았다.
“이 몸을 그들이 그렇게 탐내었나?”
“흐읏…….”
“예쁜 몸이라면 주변에 얼마든지 많이 있었을 텐데.”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말하는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부드럽게 가슴을 움켜쥔 그가 엄지로 도드라진 정점을 가볍게 톡톡 건드렸다.
“……그 이야긴 그만하기로 했었잖아요.”
“그랬던가?”
그는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다시 한 번 더 내 입술에 제 입술을 올렸다.
“기억이 잘 안 나는걸.”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 입술을 삼켰다. 대답조차 할 수 없도록 강하게 밀고 들어온 혀가 내벽을 훑듯이 핥아 올렸다. 여전히 엄지로 가볍게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꾹 하고 밀어 올리듯 누를 때마다 몸을 흠칫 떨며 옆 시트를 잡았다.
침대에 앉았던 몸이 점차 그의 무게에 짓눌려 눕혀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양 가슴을 잡고, 다리 사이에 제 다리를 놓을 즈음엔 어느새 반듯하게 제 몸이 눕혀져 있었다.
“……그럼 기억 안 나는 대로 있어 주세요.”
다시 한 번 더 키스하려는 그의 입을 막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면 앞서 말했던 이야기마저 잊어 달라는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 넌지시 던졌다. 제 이야기를 들은 그의 입이 비뚜룸하게 올라갔다.
“그건 싫어.”
“무슨 그런……으응.”
가슴으로부터 미끄러지는 그의 손이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었다.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오므리려 했지만 단단하게 버티고 있는 그의 두 다리가 못하게 막았다. 거침없는 그의 손이 제 중심 부분에 닿자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모르는 것 같은데 부끄러워하는 널 보는 게 꽤나 재밌거든.”
그게 무슨 변태 같은 소리야.
그의 말에 적잖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는 이들도 아니고, 다른 이들과 한 식사를 왜 우리 둘만의 식사에서 이야기하는 건데? 그에 부끄럼타는 모습이 좋다니. 진정으로 미친 것이 아님 변태가 분명했다.
“여색에 빠져 서로 칼부림까지 했던 몸이라는데, 조금 궁금해져야 말이지.”
“……으응.”
그의 손이 천천히 내 중심을 비비며 점차 다가왔다. 제 약점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벌려진 틈을 타고 주변을 마찰시키듯 손가락을 비벼 대었다. 검지로 쓸어내리듯 클리토리스를 비비던 손은 점차 그 면적을 넓혀가며 속도를 더해 갔다. 전체적으로 자극을 주는 것 같으면서도 클리토리스 중점적으로 문지르는 그의 행동에 기분은 순식간에 고양되기 시작했다.
“……네 몸이 얼마나 천상의 맛일지도 궁금하고.”
그렇게 말하며 미끄러지듯 손가락을 하나 집어넣었다. 이미 흥분으로 인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윤활제가 흐르고 있는 곳은 이물감 없이 그의 세 번째 손가락을 잘 받아 물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자신이 어딜 만지면 잘 느낄지 아는 듯한 행색이었다. 성감대가 어디고, 심지어 성감대가 아닌 곳까지 찾아내어 개발하는 느낌마저 들고 있었다.
이래서야 내가 밥 먹는 체면이 서질 않는데. 헐떡임에 숨이 가빠지면서도 손을 올려 그의 셔츠 자락을 잡았다. 순간 그의 눈길이 내 손에 닿았지만 이내 피식 웃곤 내 행동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어떤 짓을 할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게 꽤나 자신을 도발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나는 그의 행동에 응하듯 손을 아래로 미끄러트렸다. 답답할 정도로 꽉 채워져 있는 셔츠의 단추를 톡톡 풀려는 순간이었다.
“흐, 으응!”
단추를 풀려던 손이 미끄러져 허공을 가볍게 돌았다. 상하 운동을 시작한 손가락이 꽤나 깊은 곳까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긴 손가락을 십분 이용해 질벽을 공략해 나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상하 운동만 하는 것이 아닌 한쪽 내벽을 마찰시키듯 문지르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뭐 하는 거지? 어서 풀지 않고.”
“그러려면…… 흐읏.”
그의 말에 분해 말을 하려다가도 절로 새어 나오는 신음에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손가락이라도 멈추던가. 단추를 풀려고 해도 제 안을 꾹꾹 누르면서 마찰하는 그의 손가락이 자꾸 집중력을 흐트러지게 했다.
고양된 기분은 점차 그의 손가락을 따라 자연스레 다리를 벌리게끔 만들었다. 그 또한 한쪽 허벅지를 잡아 다리를 올리곤 자신의 손가락이 더욱더 안으로 파고들 수 있도록 속도를 더해 갔다.
어느새 삽입되는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나면서도 간신히 그의 셔츠를 다 풀어내자 그의 눈이 내게 닿았다.
“잘 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삽입했던 손가락을 빼내었다. 그의 손가락과 함께 긴 여운이 질척이듯 빠지는 느낌이 들자 자연스레 들뜬 숨을 뱉었다.
그는 바지 버클을 풀어 자신의 것을 드러냈다. 몸에 달라붙는 셔츠는 어느새 벗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것 위에 올렸다. 제 손바닥 아래에 뜨겁게 뛰는 맥박이 느껴지자 순간 놀랐지만 천천히 그의 것을 제 손으로 감싸 쥐어 보았다.
어떻게 하면 됐더라? 활자로는 많이 접했던 거였지만 실전은 처음이었다. 늘 자신의 욕망에 달아올라 내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메인 디쉬를 선보여 주는 덕택에 제대로 해 볼 기회가 없었다. 데일 듯한 뜨거움을 애써 무시하며 그의 기둥을 훑듯이 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보았다.
“……설마 처음인 건가?”
그의 말에 잘못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새빨개진 얼굴이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를 띠게 만들었다.
“경험은 많은데 이건 처음이라…….”
낮게 웃으며 그가 내 턱을 끌어당겨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들이 얼마나 널 귀하게 대했는지 어느 정도는 알겠군.”
으음 글쎄……. 귀하게 가두긴 했었지.
그는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띤 채로 날 끌어안았다. 깜짝 놀라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붙잡자 그의 얼굴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어설픈 즐거움도 맛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나를 달랑 들어 내 중심에 자신의 성기를 가져다 대었다. 손바닥으로부터 느꼈던 익숙한 열기가 닿자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의 몸에 꼭 붙어 있듯 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자 귓가에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자가 이렇게나 자주 웃던 사람이었던가. 평소엔 그렇게 접하기 힘들던 여러 면모를 보는 것 같아 두근거리던 것도 잠시, 갑자기 자신의 몸을 내려 삽입하는 감각에 자연스레 허리를 휘었다.
“으응!”
달뜬 신음을 흘리며 그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엉덩이를 거칠게 쥔 손이 쉬지 않고 나를 들어 올려 다시 아래로 내려 박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힘든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그의 손에 주체 없이 흘러갈 뿐이었다.
무릎을 세워 간신히 몸의 균형을 맞추어도 그의 손아귀 힘에 몸이 내려갈 즈음이면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제 안에 모양을 새기듯 안으로 파고드는 그의 것을 느끼기에 바빴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겨 허리를 돌리려 하면 그의 손이 꽉 죄어 더욱 강한 힘으로 박아 대었다. 마치 내게 여유가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그 여유마저 없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하. 그들이 널 두고 싸운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군.”
혼잣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뱉으며 그는 몸을 기울였다. 자연스레 내 등이 침대에 닿자 그는 본격적으로 박기 시작했다. 한쪽 허벅지를 손으로 들어 올려 벌리게 만든 후 그 공간을 자신의 몸으로 빈틈없이 채워 넣었다.
“아, 으응, 읏.”
살 맞부딪치는 소리가 야하게 울려 퍼졌다. 뒤로 빼던 몸을 다소 강하게 안으로 밀어 넣은 탓에 제 안에 그가 아로새겨질 것만 같았다. 이미 더 이상 들어올 곳도 없건만. 단단하게 곧추선 그의 것이 계속해서 강렬하게 박아 대고 있었다. 머리를 아찔하게 흔드는 느낌에 고개를 젖히며 오므리려 했지만 여전히 그의 거대한 몸이 가로막고 있었다.
“하읏!”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들어오는 힘에 결국 허리를 바르르 떨었다. 미처 아랫입으로 토해 내지 못한 강렬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입을 통해서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절정과 함께 자연스럽게 들어 올려지는 몸을 붙잡고 더욱 거세게 자신의 것을 안에 박아 넣었다.
“아, 잠깐…… 제발!”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로 그에게 애원했다. 그의 얼굴을 감싸고 들뜬 신음을 내뱉으며 고갤 저었지만 그는 말 대신 내 허벅지를 쥔 손에 힘을 더했을 뿐이었다. 절정으로 달아오른 내벽이 한층 더 예민하게 날 몰아가기 시작했다. 바삐 움직이는 허릿짓에 저도 모르게 양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찰박이는 소리가 제 귓가에 몽롱하게 들려올 무렵, 그가 내 어깨에 이를 박았다. 마치 늑대가 자신의 표식을 남기듯 깨묾과 동시에 파정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간신히 눈을 감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