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헛소리 마세요.”
도저히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에 정색하며 포크를 내려놓아 버렸다. 금방이라도 불경죄로 목이 댕강 잘릴 것 같았지만, 도저히 그런 말을 듣고만 있을 순 없었다.
하지만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는 대신 입가를 가리며 낮게 웃는 것을 택했다.
“헛소리가 아닐 텐데. 아, 아직은 참을 만한 건가?”
저게 진짜.
“계속 그런 이야기만 하실 거라면 전 이만 일어나겠어요.”
더 이상 그의 저급한 말장난에 장단 맞춰 주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서기 위해 엉덩이를 쭉 내빼는 순간 그가 다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네가 그들과 잠자리를 같이 한 거 다 알고 있어.”
“……네?”
그의 말이 귓가에 스치는 순간, 그대로 몸을 굳혔다.
“너만 알 거라고 생각했나?”
알고 있다니, 무엇을? 머릿속을 열심히 돌려 보아도 그가 알 만한 이들은 없었다. 설마. 여태까지 맛있게 식사한 이들의 머릿속을 잠깐 돌아다녔지만 이내 고갤 붕붕 저었다. 저 사람이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 누구도 안 적이 없었다. 라디트도, 교단도 내 지난날의 행적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에드아르와 테이젤마저도 서로의 일에 대해선 제대로 알고 있지 않는 눈치였었다. 그런 사실을 이제 겨우 안, 서로 안면만 알고 있는 폐태자가 알 리 만무했다.
“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정말 그렇게 시치미 뗄 생각인가?”
“시치미 떼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는 내 모습에 그가 잠시 멈추었다. 낮게 숨을 흘리며 턱을 매만지던 그의 눈이 불안하게 떨리는 내 눈과 마주쳤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라시트의 황자와…….”
“그, 그만!”
그의 입에서 에드아르의 신분이 나오는 순간 그의 말을 멈추게 할 수밖에 없었다. 놀라움과 경악에 얼굴을 물들일 새도 없이 먼저 나온 소리가 그의 말을 끊게 했다. 갑작스런 흥분으로 인해 호흡이 가빠졌다. 잇새로 나오는 숨이 가슴을 거칠게 오르내리게 만들었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어요?”
“뭘?”
모른 척, 미소 지은 채 날 바라보고 있는 그가 그렇게 잔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자신만이 아는 사실이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만난 지 겨우 며칠밖에 되지 않은 이에게 발각되었다. 낱낱이 밝혀진 사실들이 제 얼굴에 열기를 더하고 있었다.
“지금 말하신 것들 말이에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글쎄?”
그는 날 약 올리듯 빙그레 웃어 보였다. 저게 진짜.
“음지에 있으면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오는 편이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으쓱였다.
“뭐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편이지만.”
어이가 없어서. 주변에서 들리는 소문이라니. 그럴 리 없었다. 나랑 잤던 당사자들도 모르던 일을 제삼자인 그가 알 방법은 없었다.
아님 설마……. 머릿속에 테이젤과 에드아르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상상을 했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 둘 다 끔찍하게 집착이 심했다. 서로 날 두고서 전쟁평화협정을 맺을 정도였으니 알 만하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도저히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정보가 왜 음지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그중 하나가 저에 대한 이야기라는 건가요?”
“그렇지.”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내 의문에 확실함을 더했다.
“……다른 건요?”
“다른 건 뭘 말하는 거지?”
“……아니, 아니에요.”
나에 대한 소식을 알고 있다면, 실체 또한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아직 자신에게 호의적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불확실한 이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드러낼 필욘 없었다. 어중간하게 말을 끊은 채로 입을 꾹 다물자 그 또한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다면 할 일이 있어 먼저 나가도록 하지.”
“할 일?”
그를 향해 동그랗게 눈을 뜬 채로 바라보았다. 회피하던 시선이 다시 그를 향해 닿자 그의 입술이 미약하지만 호선을 그었다.
“네가 원하니 오늘 밤 정도는 잠자리를 가져 줘야 하지 않겠나.”
아무래도 오늘 음식이 상한 것이 분명했다.
“아닌데요?”
다시 한 번 더 얼굴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가는 걸 느끼며 그의 말을 전면 부정했다. 어쩐지 음식을 먹고 싶지 않더라니. 그가 오늘따라 유독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상한 음식이 올라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
다시 한 번 더 물어보는 그를 향해 단호하게 고갤 저었다.
“네.”
“그렇군…….”
그가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럼 오늘 갈 거니 준비해.”
순간 표정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마저 잊고 딱딱하게 굳은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식탁에서 벗어나 성큼성큼 열려 있는 문을 넘어간 지 오래였다.
“하아.”
여전히 만찬이 가득 차려진 곳에 홀로 남겨졌지만 도저히 다시 식기를 들고 싶지 않았다. 간신히 혼자가 된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먹고 싶지 않다니. 눈앞에 있는 윤기 자르르한 음식들을 보며 눈물을 머금었다. 언젠가 내가 또다시 맛나게 먹어 줄게……!
나이프를 드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자연스레 뒤를 따라오는 이를 향해 시선을 주자 그가 앞서가기 시작했다. 인도하는 대로 내 방에 들어서자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없던 이들이 날 맞이하고 있었다.
“누구세요?”
순간 내가 잘못 들어온 건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내가 있던 방이 분명했다. 눈을 깜빡거린 채 바라보고 있자 그들이 날 향해 가볍게 고갤 숙였다.
“명에 따라 아가씨를 씻겨 드리러 왔습니다.”
“네?”
“이미 욕탕에 물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식기 전에 얼른 가시죠.”
“아니 잠깐만요. 무슨 명령이요?”
“오늘 밤을 같이 보낼 거니 철저하게 준비하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미친. 할 일이 있다더니 이거였어? 경악으로 벌어지는 입술을 제대로 다물지 못해 빤히 바라보자 그들이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자, 잠깐만요!”
“죄송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하루 종일 때 빼고 광내도 부족한데 몇 시간 뒤에 오신다고 하니 모든 것들을 빨리 끝마쳐야 합니다.”
애처로운 내 항의는 씨알도 먹히지 않은 채 그들에게 양팔을 붙잡혔다. 이끄는 대로 붙들려 욕실로 끌려갔다. 간만에 보는 욕조에 순간적으로 화색이 돌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강제가 아닌 강제로 옷이 벗겨지고 욕조 안에 들어가자 여러 사람의 손이 내 몸에 닿기 시작했다.
엄마 이후로 벗은 내 몸에 손을 댄 건 오롯이 밥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다수의 손이 내 몸에 닿자 어색함에 몸이 절로 굳어 갔다. 하지만 어색함을 느낄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고 하더니 정말로 없었던 것인지, 속전속결로 해낸 그들은 물에 몸을 담근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재빠르게 날 꺼내었다.
한 사람은 몸에 향유를, 한 사람은 머리를, 한 사람은 장신구 및 옷을 각자 담당하며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리에 가만히 앉아 그들이 하는 대로 멀뚱멀뚱하게 당하는 것뿐이었다.
“후우.”
얼마나 지났을까 뿌듯한 한숨과 함께 마지막 이의 손이 내 몸을 떠나갔다.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그들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뿌듯해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한 사람이 내 앞에 거울을 내밀었다. 꾸민 듯 꾸미지 않은 청초한 모습이 거울에 닿자 저도 모르게 신기한 표정으로 거울을 빤히 바라보았다.
“와아…….”
“아가씨의 본판이 너무 좋아서 별로 꾸미지 않은 편이 더 나을 것 같았어요.”
거울 속엔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십분 활용한 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얼굴에 가볍게 얹은 입술색과 볼터치가 혈기를 더하고 있었다. 몸을 감싸는 벨벳의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 만에 꾸며 보는 건지. 축제 때 스스로를 가꿨을 때 이후로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남이 꾸며 주는 감각이 생각보다 기분이 좋아 후엔 온순하게 제 몸을 맡겼었다. 이렇게 보란 듯이 결과물까지 좋자 절로 기분이 고조되었다.
“분명 왕자님도 아가씨를 보면 좋아하실 거예요.”
“옷을 벗길 땐 가슴팍에 리본 하나만 당기시면 돼요.”
아.
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 새삼 감탄하고 있던 것도 잠시, 그녀들의 말에 순식간에 기분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잊고 있었다. 이 모든 행동들이 누굴 위한 것이었는지. 뽀송뽀송한 기분이 순식간에 눅눅해지는 것만 같았다. 기껏 예쁘게 꾸미고 제일 처음 하는 행동이 식사라니. 슬슬 배가 고파오던 차라 식사는 하고 싶었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이왕이면 조금 더 다른 걸 하고 싶었는데.
“곧 오실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끝까지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그들마저 퇴장하자마자 작게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렇게 꾸미곤 하는 일이 결국 방 안에 갇혀 기다리는 것뿐이라니. 기껏 예쁘게 정돈된 머리가 망가지든 말든 상관없이 침대에 누워 버렸다. 차라리 허영심이라도 만족될 수 있도록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음 좋을 텐데. 이렇게 예쁘게 꾸며진 외모를 그에게만 보여 줘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밖에 사람이 있겠지?”
늘 밖에서 지키는 사람들이 존재했으니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정확히 지키는 것인지 감시인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벌떡 몸을 일으켜 문고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주 잠시만 다녀오는 거야. 잠깐 나가서 바람도 좀 쐬고, 사람들한테 자랑도 하고 오는 거야.
그렇게 다짐하며 문고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돌리지 않았는데도 문고리가 자연스럽게 돌아가더니 문이 열렸다.
“…….”
“…….”
어쩜 이렇게 타이밍도 기가 막힐 수가 있는 건지. 내 방에 들어오려던 그가 문을 열자마자 대뜸 보이는 날 향해 흠칫 몸을 굳혔다.
“……뭘 하고 있던 거지?”
“그, 그게요.”
“설마 도망치려고 했던 건가?”
“아뇨!”
“그럼 왜 문에 기대고 있는 거지?”
그의 말에 그저 입술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말해. 내 지금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어 자랑하고 싶어 나가고 싶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