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그게 무슨…….”
카르티자. 카르티자. 이르헨델의 폐태자. 아! 그제야 모든 퍼즐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어째서 나를 납치했는지, 어째서 그런 허무맹랑한 소문을 믿고 덥석 찾아온 것인지 이해가 가길 시작했다.
내부로부터 분란을 일으킨 싹은 다름 아닌 버려진 황태자. 그였다.
“왕자님께서 널 쓸모가 다하면 보내 주신다고 했지만 날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하지만 명령은 절대적…….”
“가끔 예외도 있어 줘야지.”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명령은 절대적이라고 읊던 이가 말하기엔 너무 모순적이었다. 여전히 해사하게 웃으며 제멋대로 말하는 이의 얼굴엔 그런 걱정이라곤 하나 없어 보였지만.
“이곳은 카르티자 사람들도 지도가 있지 않으면 찾아오기 힘든 곳. 그런데 널 내보내 주면 어떻게 될까?”
못 찾겠지. 당연한 소리에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갤 갸우뚱했지만, 그의 얼굴엔 웃음이 지워지질 않았다.
“잘 생각해 봐. 왕자님의 말대로라면 소문의 널 이용할 대로 이용한 뒤에라도 보내 준다고 하셨잖아?”
“이용한다고?”
“그래. 안 그럼 널 뭐 하러 그 경계 삼엄한 곳에서 납치했겠어? 공을 들였던 것만큼 네 소문을 이용해 적들의 사기를 적절히 밟아야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턱을 붙잡았다. 상냥함이라고 하나 없는 거친 손길에 자연스레 이마에 줄이 아로새겨졌다.
“소문의 힘은 생각보다 세지. 네가 순식간에 화제가 된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을 텐데.”
가둬진 탓에 알 수 있을 리 없었지만 또 입 아프게 설명하기 싫어 가만히 있길 택했다.
“그런 네가 도망쳐서 원래 그들에게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소문이 되나요?”
“드디어 머리를 굴리는군, 아가씨?”
구닥다리 호칭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금 들뜬 표정으로 그가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교단은 소문에 편승하기 위해서라도 널 납치한 이들을 어떻게든 은폐하려고 할 거야.”
“은폐하려고 하기엔…….”
“맞아. 이미 공공연하게 네 소문을 우리가 떠벌린 후겠지.”
그의 손이 점점 내 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교단이 우릴 가만히 둘까? 이미 자신들이 부풀린 소문을 악용하려는 자들이 이런 저급한 폐태자 무리라는 걸 알고도?”
심리적으로도, 행동으로도 풍기는 위압감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떨림을 확인한 것인지 제 뺨을 강한 힘으로 내리누르던 그가 시선을 돌리며 손을 풀어 주었다.
“여길 발각당하는 건 시간문제겠지.”
“하지만……!”
이래서야 폐태자가 내게 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되어 버린다. 이곳에서 순순히 탈출하는 건 꿈도 꿀 수 없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 말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그가 날 향해 다시 고갤 돌렸다.
“그러니까 여길 영영 나가는 일은 없을 거야, 아가씨.”
이번엔 비단 고개뿐만이 아니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언제 꺼내 든 것인지 정확하게 내 목을 노리는 그의 검에 그대로 몸을 멈추었다.
“하물며 도망칠 생각도 하지 마.”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방정맞던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나이프로 폐태자의 목을 노렸던 것처럼 그 또한 똑같이 행하고 있었다.
“알아차리는 순간 죽여 버릴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검을 다시 회수했다. 제 앞에서 섬뜩하게 번뜩거리던 날붙이가 사라지자 여태까지 잊고 있었던 숨을 몰아쉬었다.
“물론 고분고분하게 있을 거라는 전제하엔 최선을 다해 보호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누가 그 말을 믿어. 방금까지 제 목숨을 위협한 자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믿을 수 있을 리가. 그의 말에 재빠르게 고개를 도리질 쳤다. 저놈은 내가 자신의 왕자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가할 시엔 가차 없이 죽일 게 분명했다. 안 믿어. 안 믿는다고!
“벌써부터 겁먹는 거야?”
“그럴 리가요.”
단연코 겁먹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신중해지는 것뿐이었다. 그는 피식 웃더니 침대에 기울였던 몸을 일으켰다.
“맥시안.”
“네?”
“필요할 땐 편하게 맥시안이라고 불러. 금방 갈 테니.”
그렇게 말하며 그는 손을 흔들곤 방에서 나갔다. 쾅 하고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읊었다.
“……맥시안.”
나는 맥시안의 맥도 꺼내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서로의 계약 조건을 이행해도 나갈 수 없다면 결국 자력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다는 건데…….”
문득 위협을 할까 생각하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나이프로 화려하게 사고를 친 적이 있지 않은가. 눈 하나 꼼짝하지 않던 그를 생각하면 다른 이들한테 가한다고 해서 씨알도 먹힐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저번처럼 몰래 탈출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늘어날 탈출 전적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개고생을 한 것만 생각하면 최대한 이 방법은 마지막으로 미뤄 두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은 착실하게 창문을 향하고 있었다. 이곳의 지리만 알아 두는 거니까! 자기 합리화를 시키며 창살이 쳐진 창문으로 손을 뻗었다.
창문을 염과 동시에 자욱한 안개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앞이 뿌예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이래서야, 주변을 확인하려고 해도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아도 평상시에 내가 맞이하는 해와는 달랐다. 늘 구름에 가려 햇살이 반쯤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자신들의 은거지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이런 곳을 선택한 것이겠지만, 사람이 살기엔 너무 기분 나쁜 곳이었다.
“그래도 은닉은 확실한가 보네.”
며칠 동안 가만히 있었던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인정할 수 없지만 교단과 테이젤, 그리고 에드아르라면 날 찾아낼 것이 분명했다. 내가 없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제일 먼저 난리 칠 이들이기도 했고.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주변은 잠잠하기 그지없었다.
“생각해 보면 여기가 나쁜 곳은 아니긴 한데…….”
밥도 하나겠다. 아이가 생길 때까지라는 제약이 붙긴 했지만 매일매일 밥을 준다면 썩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거기다가 내가 아이를 가질지도 미지수고.
사실 난 이 몸으로 태어나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생리를 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씩 걸리는 지옥불과 영영 만남조차 하지 않는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란. 어리석게도 이 몸이 그저 축복받은 몸인 줄로만 알고 기뻐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인간과 닮았지만 미세하게 생리적 구조가 다른 내가 아이를 잉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잠깐. 그럼 엄마는 날 어떻게 낳은 거지?
순간적으로 위화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늘 나에게 남들과 다르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설마 그건 이건 아니겠지? ……그럼 엄마는? 엄마도 나랑 다른 걸까?
“……다른 생각 하지 말자.”
지금 하고 있는 걱정만 하더라도 태산 같은데 여기서 걱정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닥친 것도 아니기도 하니까. 창문으론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할 것 같아 고갤 돌리자 여전히 날붙이 하나 없는 단조로운 침실이 날 맞이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날 취하면 세계를 얻을 수 있다라…….”
단순히 나와 잠자리를 가지는 것이 아닌 아이를 가지는 것이 완전한 목표라고 폐태자 스스로가 시인했다. 하지만 난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 상태. 이는 내가 보통 사람이라고 찰떡같이 믿고 있는 교단에서 만들어 낸 가짜 소문임이 분명했다.
그렇담 그들은 왜 그런 소문을 낸 걸까. 아니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여기까지 도달하곤 다시 막히자 미간을 찌푸렸다.
“으으, 머리 안 돌아가!”
어렴풋이 윤곽이 잡히긴 했지만 여전히 교단의 행동은 이해 가지 않았다. 너무 독단적이었고 폐쇄적이었다. 어떻게든 날 감싸고 도는 그들의 행동은 인위적이기만 했다.
“……그냥 여기에 있을까.”
나도 모르게 툭 하고 내뱉었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계속 참한 쌀밥 하나랑 오순도순 살고 싶다고 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선택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밥을 정하는 것. 그것이 내가 정한 내 인생의 최종 목표였다.
애당초 여태까지 만난 밥들은 다 내가 원해서 시작한 적이 없었다. 다 내 미모에 홀려서 먹어 달라 애걸복걸한 이들을 먹은 적밖에 없었지. 그래서 더더욱 한 곳에 정착도 하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러니 적어도 같이 오래오래 살 밥이라면 내가 정하고 싶었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오롯이 내 선택과 기준으로 택한 사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익숙한 이가 들어와 고갤 숙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에요?”
하지만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더 족쇄를 풀어 주곤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설마…….”
예상가는 바가 있어 말끝을 흐리자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또? 바로 어제 그 사달이 나고서도 또 나를 만나려고 하다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죄송하지만 저녁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
“그래서 오늘은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
묵묵부답인 그를 향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도 못 하는 사람한테 뭐 하는 거람. 종알종알 늘어놓는 변명에도 꿋꿋하게 날 기다리는 이를 보며 천근만근인 몸을 일으켰다.
“알겠어요. 갈게요.”
내 말에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가 벌떡 들곤 앞장서기 시작했다. 익숙한 곳에 들어서자 두 사람이 쓰기엔 여전히 과한 식탁과 그곳에 홀로 앉아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으.
조심하려고 해도 얼굴에 자연스레 새겨지는 미간의 주름을 피할 수가 없었다. 간절하게 소원 빈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본대. 나에게 그 난리를 겪었음에도 그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들어오는 날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흘겨보다 내 자리 의자를 빼 주는 이를 향해 가볍게 고갯짓하곤 착석했다. 내가 앉을 때까지 그의 시선이 닿다, 완전히 앉음과 동시에 떨어졌다.
“들지.”
아주 짧은 말 한마디와 함께 숨 막히는 식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예의상 앞에 놓인 고기를 잘라 입에 넣었지만 분위기에 압도당해 여전히 어떠한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기름진 고기의 맛을 질긴 종이의 맛으로 느끼게 만들다니. 재주라면 그것도 하나의 재주였다.
체할 것 같아 허공에 나이프질 하던 것을 멈추고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 고문 같은 시간이 언제 끝날지 그의 눈치만 살살 보던 터였다.
“……왜 자꾸 보는 거지?”
갑작스레 말을 거는 그의 말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였다.
“어, 그게…….”
재빠르게 머릴 돌리며 애써 변명할 거릴 찾느라 대답을 버벅거리자, 그가 피식거리며 포크를 접시 위에 두었다.
“왜. 내가 그리워 몸이라도 애달픈가?”
그의 개소리에 그만 마지막 식욕마저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