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먹고 싶어-49화 (49/86)

# 49화

“네?”

“소문. 알고 싶다며.”

“허…….”

뭔 뜬금없는 소리야. 어처구니가 없어 자연스레 잇새 사이로 헛바람이 나왔다.

“그 소문의 성녀가 저라고요?”

“이미 모든 대륙에서 널 보러 오겠다 벼르고 있는데 정말 모르고 있었던 건가?”

알 수 있을 리가. 나는 그날 이후로 내 방을 빠져나온 적이 없었다.

“전……. 전혀 몰랐어요. 그 사람들이 다짜고짜 절 가둬 놓고 절대로 안 내보내 줬는걸요.”

내 말에 그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앞에 있는 날 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멀리, 아득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소문의 주인공이 제가 아닌 거 아닐까요? 그런 중요한 정보를 스스로가 모를 리 없잖아요.”

“아니. 네가 맞다.”

아 그러세요…….

소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그가 확신을 가지지 못할 때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단호한 말에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잠시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세차게 고갤 저었다.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만을 믿고 절 납치하신 건 너무 큰 도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게 얼마나 큰 범죄인지는 당신도 잘 알 것 같은데요. 절 원래 있던 곳으로 순순히 데려다 놓으면 이 일은 없는 걸로 해 드릴게요.”

아이를 어르듯 말을 하는 순간 그의 눈이 매섭게 날카로워졌다.

“아직 사태파악을 못 하는 것 같은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순식간에 내 몸 위로 올라탔다. 제 몸을 억압하는 동시에 강압적인 그의 얼굴이 더욱 크게 보이자 순간적으로 압도당해 버렸다.

“넌 여기 붙잡혀 온 거라는 걸 벌써 잊은 참인가?”

“물론 그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내 말 한마디에 네 신변도 좌지우지된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반박하려는 내 말을 가로챈 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자신의 처지를 조금 더 잘 알 필요가 있겠군.”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이 옷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어? 당황해 그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걱정하지 말도록.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면 보내 줄 테니까.”

“소문이라면…….”

“그래 널 취하면 알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파고든 손이 우악스레 제 가슴을 움켜잡았다. 전희도 없이 갑작스레 등장한 손에 놀라 입술을 벌리는 순간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가로채 갔다.

제 입술을 덮는 불쾌감을 느낄 새도 없이 몸 안 깊은 곳에서부터 채워져 가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얼마만의 정기인 걸까. 군림하듯 제 입안을 정복해 나가는 혀를 기쁘게 맞이하듯이 움직일수록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간신히 달래 주는 것만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의 입술에 달라붙어 무언가를 갈구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잠시 잃었던 이성은 빠르게 제 자리를 찾아 돌아왔고, 그 순간 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만해요!”

뒤늦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의 입술을 저항했다. 이미 제 얼굴에 달아오른 홍조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선연하게 알려 주고 있음에도 사실을 거부했다.

“하, 응해 놓고 이제 와서?”

“응한 건 아니에요!”

정기를 취해야 하는 이 망할 몸 때문이지. 매번 제 몸의 습성을 저주했지만 오늘만큼이나 저주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가 보는 눈앞에서 차마 제 머리를 퍽퍽 때릴 순 없어 입술을 꽉 깨물자 가까웠던 숨소리가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어……? 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자 모로 돌렸던 고갤 천천히 앞으로 돌렸다.

“뭐, 이쯤 하면 자신이 처한 처지는 잘 알 테지.”

그는 비뚤어진 웃음을 가득 지은 채 자신의 손으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어제까지의 삶은 잊어. 이제 넌 내 것이다.”

이기적인 그의 말에 기함했다. 제멋대로 납치하더니 이제 자기 소유물이라고 지칭하는 남자의 행태가 아니꼬웠다.

“오늘만이다. 이렇게 봐주는 건. 넌 내일부터 매일 나와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이다. 아이가 생길 때까지.”

“뭐라고요?”

뭐가 생길 때까지? 생각지도 못한 존재의 언급에 화들짝 놀라자 턱을 쥔 손아귀의 힘이 조금 더 거세졌다.

“말했을 텐데. 소문이 사실인 것을 확인했을 때 비로소 놔준다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턱을 놔주었다. 어처구니없는 소리들을 잔뜩 들어 멍해진 내 표정에 만족한 것인지 그의 얼굴엔 미미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낯선 곳이니 하루쯤은 푹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

끝까지 자기 할 말만 하고 재빠르게 몸을 돌려 멀어져가는 그의 뒤통수에 자연스레 쿠션을 쥐었다 가만히 놓았다. 제 말에 내 목이 좌지우지된다는 소리가 괜히 공포심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문마저 완벽하게 닫혀 그의 모습이 방 안에서 사라진 후에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긴 도대체 어디인 걸까. 그리고 저 남자는 도대체 누구인 걸까.

제법 많은 말들을 내뱉은 것 치곤 그에게서 얻은 정보는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아, 허무맹랑한 소문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좋지 않았다. 이곳에 오래 머물수록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이 펼쳐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난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잘그락.

“어?”

움직이는 것도 잠시. 제 발목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존재에 자연스레 시선이 돌아갔다. 차갑고도 날카로운 감각.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던 감각에 눈길을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쇠고랑이 제 발목을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아…….”

또 붙잡히는 신세라니. 제 행동반경을 위해서 넉넉하게 연결되어 있는 척 묶여 있었지만 결국 침대 근처였다. 침대 다리에 단단하게 박혀 있는 것은 제아무리 힘을 주어 들어 올리려고 해도 들리지가 않았다.

그저 제 자유를 원했을 뿐인데. 돌고 돌아 결국 같은 신세라니. 결국 처음 여행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 땅을 치며 울고 싶었다.

침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나 있는 창문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내 다시 집어넣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은 역시나여서. 땅과의 아찔한 거리는 저도 모르게 생각을 접게끔 만들었다.

넉넉한 쇠줄을 잡아당겨, 발을 겨우 뻗은 후에야 닿는 문을 향해 손을 뻗어 문고리를 돌렸다. 하지만 문을 열어 당김과 동시에 마주치는 건 상쾌한 공기가 아닌 사람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

깜짝 놀라 뻘쭘하게 인사를 걸어 보았지만 무뚝뚝한 표정의 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인사에 응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손을 들어 방문 안을 가리킬 뿐이었다.

“어…… 들어가라고요?”

끝까지 입은 다문 채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모습에 어색하게 웃다가 결국 문을 닫고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람.”

어디에도 탈출할 방법이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이세계 사람들은 사람을 가둬 두는 게 예의인가? 아주 그냥 날 자유롭게 두질 못하네.

발목에 묶인 족쇄는 제 발에 딱 맞춘 것처럼 차여 있어 발에 쥐가 날만큼 발끝을 날카롭게 세워도 빠지지 않았다. 막상 이 족쇄를 빼낸다고 하더라도 이 방에서 탈출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책에서 보면 이불을 서로 엮어 밧줄로 사용하기도 하던데……. 하지만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침대 위를 덮고 있는 이불 외엔 사용할 천들이 보이질 않았다. 하물며 창문에 처져 있는 커튼조차 없어 밖이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삭막한 방 안이었다. 최소한의 가구들로만 갖춰진 곳엔 책도, 필기구도, 놀 만한 장난 거리도 없었다. 하다못해 시간을 때울 무언가라도 줘야 할 텐데. 그런 것도 없어 보이자 절망스러움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런 방구석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 얄미운 사람이 나가지 않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어도 심심하진 않을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재빠르게 고갤 저었다. 저한테 임신시키겠다는 헛소리나 일삼는 놈인데 같이 있는 게 낫다니! 심심함과 배고픔에 제 머리가 미쳐 버린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하는 일이라곤 다시 창문을 향해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는 것밖엔 없었다. 그나마 여태 보던 풍경과 색다른 시야가 제 우울한 기분을 낫게 만들었다.

“여긴 어디인 걸까.”

제가 사라진 교단은 지금쯤 어떤 상황일까. 꽁꽁 가둬 놨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지금쯤 비상사태가 내려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곳에 오는지 얼마나 걸렸는지 알 수 있다면 적어도 거리라도 가늠할 수 있을 텐데. 기절한 채로 옮겨진 탓에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그저 제 눈에 보이는 시야들이 알아차릴 수 있는 정보의 모든 것들이었다.

인공적으로 잘 꾸며진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정원의 나무에서 느닷없이 사람의 형태가 튀어나왔다. 여태까지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던 것인지 남자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이었다. 줄곧 그의 머리맡만 바라보던 내 시야에 그의 얼굴이 들어온 것은. 갑작스러운 시선의 맞춤에 놀라 눈을 제대로 두지 못한 채 허둥대자 남자는 친절히도 손을 올려 내게 흔들어 주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교차하다 재빠르게 고갤 돌려 버렸다. 보통 처음 보는 다른 사람한테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해 주던 곳이었던가? 생각보다 이곳엔 이상한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겨우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창문 바라보기도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에 오래 즐길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아까 같은 일이 생길까 봐 바깥을 보기 힘들었다.

결국 침대 위에 데굴데굴 뒹굴며 시간 죽이기를 한참, 나무문을 두들기는 작은 노크 소리가 겨우 잠에 들락 말락 하는 날 깨웠다.

예의차 문을 두드린 것이었는지 소리를 냄과 동시에 벌컥 들어오는 이는 다름 아닌 내 문을 지키던 이였다. 여전히 일관적인 표정과 입술을 열지 않는 무뚝뚝함으로 무장한 채 그는 날 향해 성큼성큼 들어왔다.

“무, 무슨 일이에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질 않아 추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짜고짜 내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내 버렸다. 잠이 깰 정도로 기함한 나완 달리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내게 가까이 몸을 기울이자 순간적으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곳을 빠져나간 이와 똑같이 음흉한 짓을 할 거라고 예상했던 내 생각과는 달리 그는 내 몸에 일절 손 하나 대지 않았다. 그저 발에 여전히 꽁꽁 잠겨있는 족쇄를 열쇨 이용해 풀어 주곤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뭐, 뭐지?

갑작스러운 해방에 멀뚱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갑작스러운 변덕으로 인한 자유? 하지만 그는 내게 손을 여전히 대지 않은 채로 바깥을 향해 손짓을 했다.

“저보고 나가라고요?”

여전히 입 한 번 뻥긋하지 않는 그가 고갤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쉽게 자유를 줄 리 만무했다. 실망감에 저도 모르게 몸에 잔뜩 들어간 긴장감이 축 빠져나갔다.

“어딜 가는데요?”

“…….”

“혹시 누군가가 절 데려오라고 하던가요?”

“…….”

무얼 하나 물어도 그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잘난 손가락을 치켜들고선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할 뿐이었다. 그 주인에 그 하인이라고. 똑같이 내가 묻는 질문에 답 하나 해 주지 않는 만행에 자연스레 입술이 실룩거렸다.

따라오라니 가 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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