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먹고 싶어-48화 (48/86)

# 48화

자체적으로 거리를 두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형세가 급변했다. 숙소부터 비롯하여 날 이루고 있던 모든 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수업은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대신 개별적으로 선생들이 들어와 일대일 수업을 진행할 뿐이었다. 식사시간에도 모든 음식을 방 안까지 날라다 주니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편했다. 하지만 몸이 편한 것 외엔 모든 것들이 불편했다.

다짜고짜 데려온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하는 행동들에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가둬 놓을 셈이지? 여기 들어와서 대화한 거라곤 고작 이곳에 드나드는 이들과 나눈 몇 마디뿐이었다. 수업마저도 주입식으로 행해지는 이곳에서 내가 입을 뻥긋하는 건 극히 드문 기회였다.

나가려고 해도 막아 세우는 건 매한가지였다. 방 밖으로는 일절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하는 꼴이 조바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보호야. 감금이지.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는 탓에 라디트를 만나지 못한 것도 꽤나 시간이 지난 참이었다. 자연스레 허기가 제 몸을 지배하자 나는 침대에 털썩 얼굴을 묻어 버렸다.

“배고파…….”

매일매일 꾸준히 일정량을 섭취한 그간의 행적 때문일까. 저번보다도 더 빨리 당겨 오는 허기에 참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었다. 입이 즐겁긴 했지만 음식 섭취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싶을 정도로 공복은 채워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밑 빠진 독에 채운다는 느낌이 이런 거겠지?”

한숨을 푹 내쉬며 제 배를 울리는 애달픈 소리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밉상이라고 생각한 라디트가 간절하게 보고 싶은 순간이었다.

“소리?”

잔뜩 흐려진 감각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파고드는, 낯설면서도 이질적인 감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잊을 수 없었던 소리가 들려오자 이불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귓가에 들렸던 소리들이 거짓말인 것처럼 주변은 평온했다. 어두운 밤하늘과 바람에 살짝 나부끼는 커튼까지 완벽하게도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하지만 제 코에 들어오는 냄새까진 완벽하게 숨길 수 없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예민한 감각이 아니었더라면 찾아내기 힘들었겠지만, 나는 그 남들과는 다른 사람이 아니었던가. 몸에 쭈뼛, 하고 자연스레 긴장이 찾아왔다.

“밖에 누구 있어요?”

늘상 밖에서 24시간 대기하며 저를 괴롭게 만들던 이들이 오늘따라 답이 없었다. 답하는 시간이 유난히 길어지자 몸을 아리는 불안은 점점 확신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대답 대신 문이 열리며 낯선 사람이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잔뜩 어두워진 시간이 그의 모습을 완벽하게 구사해 내지 못하고 검은 인형으로 간신히 보이게끔 만들었다.

이렇게 느닷없이 갑자기 쳐들어올 줄 알았더라면 불부터 먼저 켜는 건데. 뒤늦은 후회를 하며 전등을 켜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누구세요?”

알고 싶지 않았다. 꺼지라는 말부터 버럭 내뱉고 싶었지만 예의상 차분한 음성으로 그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여느 악역들이 그렇듯이 쉬이 입을 열어 주진…….

“널 데려갈 사람.”

“네?”

“못 들었나?”

여전히 어두워 자세히 보지 못하는 이가 일순 웃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널 데려갈 것이라고 했다.”

미친놈이다. 단 몇 마디만으로 온몸에서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듯, 거부반응이 일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탭댄스를 추듯 열렬하게 울려 대는 적색경보에 재빠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절 왜요?”

“소문.”

뜬금없이 다른 말부터 내뱉는 그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문……?”

“그래. 이미 전국에 자자하게 퍼진 네 소문이 궁금해서 말이지.”

다짜고짜 내게 반말을 행세하는 그가 기분 나빴지만 제 귀를 더욱 솔깃하게 만드는 질문에 궁금증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내 소문? 무슨 소문? 주어를 빼고 애매하게 말하는 그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나는 아직 국경 한 번 넘어 본 적이 없는데 전국에 내 소문이 자자하다고?

“무슨 소문인데요?”

“…….”

그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점차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 어? 순간 당황한 내가 뒷걸음질 쳤지만 그가 다가오는 속도가 내 발걸음보다 빨랐다. 그의 얼굴의 윤곽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순간, 어둠 속에 가려진 달빛이 드러나며 그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달빛과 닮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미형의 얼굴. 새하얀 머리색과는 달리 어둠을 그대로 흡수한 듯한 눈동자가 날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눈동자가 가늘게 늘어졌다.

“그건 네가 맞는지 확신시켜 줘야 알겠지.”

“무슨…….”

말을 끝맺을 수는 없었다. 어느샌가 날아온 무언가에 뒷목을 맞는 순간 암연이 눈앞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었다.

“이 미…….”

이 미친놈이. 사람을 잘생긴 얼굴로 방심시켜 놓고 다짜고짜 당수질이냐, 하고 버럭버럭대고 싶었지만 눈앞이 자꾸 흐려지기 시작했다. 제 몸이 아닌 듯 가누지 못하는 몸은 앞으로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그의 품 안에 자연스레 안착했다. 잘생긴 웃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순식간에 비웃음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

“너희 엄마 왜 그래?”

“뭐?”

“왜 우리만 보면 입술을 꾹 다물어?”

친절히도 엄마의 안부를 묻는 친구의 불꽃 같은 패드립에 주먹을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내리치기 전에 재빠르게 다음 말을 붙이는 친구의 날카로움에 손을 멈칫했다.

어, 음……. 그러게. 안타깝게도 친구의 말에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건 지금의 내 눈으로 보아도, 지구에 있던 지식으로 보아도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나 외엔 그 어떤 이들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최소한의 필요한 말들이 아니면 그들과 어울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만약 엄마가 내게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던 카마수트라가 아니었더라면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조차 어려웠을 테니까. 때리려던 손을 은근슬쩍 친구의 머리통 위에 올려 두었다.

“나도 몰라.”

“너희 엄만데 너도 몰라?”

“모를 수도 있지. 엄마에게도 사생활은 있는걸.”

아직 어린 아기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애초에 우리 엄마라고는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인 느낌이 느껴지기도 했다. 전생의 기억을 다 가진 채로 태어나서 그런 걸지는 몰라도 그녀와의 부모 자식 간의 유대감은 예전 지구에서 느꼈던 것과는 달랐다. 물론 자신의 몸이 인간과는 다른 종족으로 태어나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그리고 나조차도 절대로 데려가지 않는 비밀의 방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궁금증을 품는 아이의 의중도 이해할 수 있었다. 불협화음을 내고 싶지 않아 그녀에게 방의 의도를 물어보진 않았지만, 나 또한 궁금했다. 비밀스러운 문은 엄마 외엔 그 누구에게도 열리지 않은 채 굳건하게 닫혀 있었기에 몰래 알아낼 수도 없었다.

도대체 그 방은 무엇일까. 유년시절 유난히 커 보였던 그 방은 접근할 수 없다는 공포감으로 내게 스산하게 보이기도 했었다. 그랬던 그 방이 딱 한 번 내가 있을 때 열린 적이 있었는데 새하얀 빛이 들어오는 틈으로 내가 본 것은…….

*

“헉!”

제 등골을 달리는 식은땀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숨이 고르게 내쉬어지지가 않았다. 기분 나쁜 꿈. 무언가 본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머릿속에서 새하얀 빛을 보았다는 것밖엔 도저히 떠올려지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온몸이 아팠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제 몸이 콕콕 쑤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픈 감정보단 꺼림칙한 감각이 제 몸을 감싼 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치 아직 꿈속을 유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어났나?”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평상시라면 내가 일어난 기척을 보이기 전까지 밖에서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깨우는 이들이었는데 언제 들어온 거지?

아직 멍한 정신을 억지로 깨우며 눈을 옆으로 돌렸을 때였다. 라디트를 제외한 장성한 남자는 없을 것이 분명한 남자청결지역인 이곳에서 남자가 보이자 동그랗게 눈을 떴다.

아직 내가 꿈속인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고에 머리를 덜그럭거리며 돌려 보았지만 난생처음 보는 얼굴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누구세요……?”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짜고짜 내 앞으로 걸어와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니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면 제가 다 아는 줄 아세요? 제대로 뜨지 못한 눈앞에 들이미는 무례함에 인상을 쓰려다가도, 이상하게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자 고개를 기울였다. 충분히 밝은 방 안에서 달처럼 밝은 머리칼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아, 아앗!”

“생각했던 것보다 둔하군.”

놀라 소리 지르는 내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그가 천천히 얼굴을 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게 누가 가까이 오랬나.

갑작스레 얼굴을 들이민 자가 누군지 알게 된 이상 이성보다 본능이 한발 앞섰다. 재빠르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벗어나기 위해 발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발이 부웅 뜨는 감각과 함께 제 몸이 멋대로 공중을 부양하기 시작했다. 몸 뒷면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을 확인하고 나서야 날 보고 있던 이에 의해 강제로 다시 눕혀진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내가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완강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눈빛엔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여긴 어디예요? 절 왜 이런 곳으로 데려온 거죠?”

“말했을 텐데.”

“언제요?”

그를 향해 사납게 쏘듯이 말하고 나서야 어젯밤 기억이 선명하게 제 머리를 내리쳤다.

“설마……. 겨우 그 소문 때문에 데려왔다고요?”

“그래.”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줘요.”

“안 돼.”

“왜요?”

“안 된다면 안 돼.”

“왜 안 되죠? 신전 사람들이 알기 전에 절 돌려보내는 것이 신상에 좋을 텐데요.”

“그 정도쯤은 각오하고 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길.”

치밀한 척하는 남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잇새 사이로 자연스럽게 치밀어 오르는 욕을 꾹꾹 눌러 담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절 데려온 목적이 뭐죠?”

“말했을 텐데. 소문을 확인하러 온 거라고.”

“그러니까 그 소문이 뭔데요? 전 아무것도 못 들었단 말이에요.”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네.”

알기라도 하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았을 터. 나만 모르는 소문에 혹해 데려왔다니. 근거도 없이 과장된 소문이면 어쩌려고 이 사람은 납치라는 중범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거지?

잔뜩 억울해진 내 표정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인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엔 명백하게도 귀찮음이 뒤섞여 있었다.

“……성녀를 취하면 이 대륙을 통일할 수 있는 황제가 될 수 있다.”

뭐라고? 무슨 헛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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