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먹고 싶어-47화 (47/86)

# 47화

“동의를 구했다고요? 그녀에게 막무가내로 요구한 것은 아니고요?”

“그쯤 해 두십시오, 폐하. 이 이상 저를 욕보이는 것은 나아가 저희 교단에도 똑같이 항의하는 것이라 믿겠습니다.”

“하지만!”

“테이젤!”

분위기가 조금 격정적으로 달아오르자 테이젤의 이름을 다급하게 외쳤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제 본능적인 직감 때문이었다. 괜히 나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내려온 이들에게 다른 일들마저 연관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또 하나의 연결 고리가 되어 나를 얽매이게 만드는 것은 더더욱.

“조금 진정해요, 테이젤. 그래도 덕분에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었는걸요.”

“하지만, 비시아……!”

테이젤의 분노가 일순 나를 향해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위로 치켜뜬 눈썹을 뭉그러트리며 화를 낮추기에 잔뜩 애를 쓰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엔 그 어디에서도 내가 먼저 탈출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 듯, 선한 표정이 다시 돌아오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런 나와는 대조적으로 사제의 표정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저 별 것 아닐 거라는 나와 테이젤의 사이가 각별해 보이자 그녀의 안색이 더욱 원색적으로 물들어가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하지만 자신이 여태껏 내뱉은 말만큼은 물릴 생각이 없는 것인지 끝까지 입술을 꾹 다물 뿐이었다. 너무 꾹 다물고 있어 자신의 입술의 색이 사라지는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비시아…….”

나를 애달프게 바라만 보는 테이젤을 보고 있자니 옛정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나름 내게 밥도 잘 주던 이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글썽이는 강아지 같은 상으로 날 바라보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살라 버린 연민이 조금이나마 고개를 드는 느낌이었다.

어쩌자고 내게 빠져선. 우연찮은 만남을 놓기 싫어 여기까지 찾아온 그들이 나름 불쌍해져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는 순간이었다.

“……비시아, 이곳 사람들이 당신을 강제로 억압하고 있진 않습니까?”

날 끌어안듯 두 팔을 뻗어 자신의 품 안에 가둔 테이젤이 내 귓가에 나지막하게 말했다. 주변 사람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간신히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만약 이곳 사람들이 당신을 강제로 이곳에 체류하게 하는 거라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비시아, 당신을 구해 내도록 하겠습니다.”

결의에 찬 테이젤의 표정은 어딘가 모를 비장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어, 음. 그 정도까진 아닌데요…….

테이젤이 한층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여 날 껴안자 주변에선 적극적으로 반응이 이뤄지고 있었다. 경악하는 사제를 비롯하여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라디트까지. 여전히 표정을 일관적으로 굳히고 있는 에드아르를 비롯하면 갖가지 다양한 표정들이 날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사제의 경악하는 표정은 예상치 못했던 터라 조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뭐야. 평소에도 날 애지중지한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겨우 테이젤과의 포옹에 이렇게까지 크게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마치 해선 안 될 짓을 하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자 입술이 살짝 측면으로 비뚤어졌다. 내가 여기 있는 이 셋과 다 섹스한 사이라는 걸 알게 되면 난리 나겠네.

어처구니없어 표정을 씰룩이자 날 껴안고 있는 테이젤의 손아귀 힘이 더욱 거세졌다. 그제야 그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지만 그에게 대답을 할 필요성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내가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알아서 대답을 찾아내기라도 한 것인지 그의 표정엔 결연함이 묻어져 나왔다.

“역시 비시아를 데려가야겠습니다.”

“폐하!”

날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려는 것인지 단단하게 붙잡은 그의 팔이 날 든든하게 지탱했다.

“아무리 황제께서 그렇게 의견을 표하신다고 하시더라도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것은 이 이상 곤란합니다!”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것은 애초에 너희들 쪽이 먼저 아니었던가? 그녀는 정식적으로 나와 그가 보살피기로 되어 있는 바. 오히려 그대들이 그녀를 무단으로 데려간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건…… 저흰 전혀 몰랐던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아는 게 어떤가? 더군다나 내게 이렇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건, 매해 지원해 주는 공물을 더 이상 받기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시면 곤란합니다. 다만 저희 측에선 이미 그녀가 정식적으로 신녀로 등록되어 있는 바, 이 이상 저흴 곤란하게 하시면 교단의 분노를 사시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날 협박하겠다는 건가?”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침묵이 깔렸다. 무거운 공기가 몸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침을 한 번 삼킬 때였다.

“죄송합니다.”

사제는 한 번 뒤로 물러서기를 택했다. 아무리 어느 나라에도 속해 있지 않은 교단이라고 할지언정,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이의 심기를 함부로 거스르기엔 잃는 것이 너무나 컸다.

“그럴 뜻은 없었습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보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권고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사제는 사죄하기 위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의 뜻은 곧 교단의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저희 교단의 뜻이기도 하니 부디 이해해 주셨음 합니다.”

“비시아를 그렇게까지 보호하려는 이유가 뭐지?”

“그녀는 진정한 성녀 후보니까요.”

“뭐?”

이번만큼은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말에 누구보다도 입술을 먼저 뗀 건 다름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제가 뭐요?”

“……비시아 님.”

아차 싶었던 그가 뒤늦게 나를 향해 고갤 돌렸지만 이미 두 귀는 똑똑히 들은 상태였다. 단호한 내 표정을 본 그는 되돌리기 늦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때가 되면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때가 언젠데? 갑작스럽게 일어난 오늘이 아니었더라면 발언조차 하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묘하게 내게 잘해 주던 그들의 행동들이 하나둘씩 생각나자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근본 없이 잘해 주던 모든 것들이 그들의 계산된 행동이라고 생각되자 유일무이한 내 편이라고 생각 들던 이들조차 보기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때가 언제죠? 오늘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한동안은커녕 자격시험을 치를 때까진 듣지 못했을 것 같은데요.”

“오해이십니다. 저흰 비시아 님께서 모든 것들을 공부해 나아갔을 때 알려 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는 그들을 향해 이죽였다. 입으론 누가 말 못 해. 어디에도 내 편이 없다는 것만큼은 아주 잘 알게 되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역시 이곳을 나가는 것이 옳았던 것일지도 몰라.

“비시아 님. 옥체에서 남들과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신 적 없습니까?”

“제 몸이요?”

남들보다 뛰어나게 육감적인 몸인 건 알지만 별다른 차이는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종족 특유의 정기를 흡수하는 것이 일순간 생각났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설마. 성녀와 정기 흡수는 너무 안 어울리는 단어잖아.

“혹시 그녀의 엉덩이 골 위에 있는 문양을 말하는 건가?”

어? 테이젤의 말에 당황해서 고갤 돌렸다. 무슨 개소리야. 나도 모르는 내 흔적을 네가 안다고?

“어떻게 아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맞습니다. 그것이 여신의 흔적입니다.”

당황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나와는 달리 테이젤과 에드아르의 얼굴빛은 꽤나 심각해졌다. 나와 관련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만 모르는 이 상황에 기분이 나빠졌다. 뭐야, 정말 나만 빼고 다 아는 거였어? 난 우리 엄마한테도 그런 말 들은 적 없는데!

“하지만 문양이 성녀의 표식이 된다는 말은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지 않나.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순순히 믿어야 하지?”

“충분히 당황스러우실 만합니다. 잘못된 사실로 인해 남용할 것을 우려하여 알리지 않았던 것을 부디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조목조목 말하는 사제의 말에 이번만큼은 테이젤도, 에드아르도 할 말이 없는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덩달아 나 토한 할 말이 없어지자 눈만 멀뚱하게 뜰 뿐이었다. 뭐야 진짜인 거야……?

내가 그런 개쩌는 치트키를 가지고 있었다면 엄마가 말하지 않을 리 없었다. 평소에도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며 남들과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성정인 그녀가, 그런 자랑거리를 입에 올리지 않을 리 만무했다.

도대체 우리 엄마는 나에게 카마수트라 외에 무얼 주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제 머릿속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음담패설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을 뿐, 그러한 정보는 머리 한구석에 기입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를 정식적으로 데려가도 된다는 말을 받아서 오도록 하지.”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차 제대로 된 생각조차 못 하고 있을 때였다. 제 귀를 때리는 에드아르의 말에 고개를 치켜든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까지 그녀를 어딜 빼돌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그녀의 신변 보호는 늘 하고 있는 바이니 염려하지 마시길.”

사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의 시선은 내게 닿았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닿고 싶은 행동을 참고 참아 시선으로 만족한다는 듯이.

“이대로 그녀를 두고 가실 참입니까?”

“그럼 다른 방책이라도 있는가?”

“그건 오히려 제가 당신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군요. 이렇게 또 그녀를 되찾을 생각하지 않고 빠져 버릴 생각입니까?

“아니.”

그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를 완전히 독식할 수 있을 때 다시 올 것이다. 그때를 잠시 기다리는 것뿐이야.”

“그건…….”

“당신답지 않군. 일단 돌아가서 새로운 대비책을 생각하는 것이 너의 행동이지 않았나?”

에드아르의 일침에 테이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그 눈동자를 돌려 날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테이젤의 잘생긴 얼굴이 내 양심을 가차 없이 후벼 팠다. 으윽, 괴로운 내 양심.

“비시아 곧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다짐하듯 말했다.

“반드시요. 그때까지만 참고 견뎌 주세요.”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살짝 세게 쥐었다. 이렇게 잘생긴 애가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나만 믿어 달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해. 미세하지만 확연하게 돌아오는 반응에 테이젤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잡혔다.

“기다려 주길, 나의 비시아.”

그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는 걸 알아차렸을 땐 이미 떨어진 후였다. 자신만만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잡았던 손도 놓여 있었다.

여전히 잔뜩 긴장하는 사제를 뒤로하고 둘은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기듯이 몇 번이고 뒤를 돌던 이들이 완벽하게 자리를 비울 때 즈음 사제의 손이 내 팔을 향했다.

“비시아 님.”

“네?”

“가시죠.”

가다니, 어딜?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이 더욱 거세졌다.

“갑작스럽게 자리를 이탈해서 저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앞으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옆에서 보좌하겠습니다.”

“네에?”

아, 아니 그런 거 필요 없는데…….

“평소엔 비시아 님 몰래 보호하고 있었지만 이젠 더 이상 숨기지 않을 예정입니다. 저희 교단에서 중요하신 분인 만큼 안전하게 보호하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비단 그 둘을 쫓아내기 위해 했던 말이 아니라 진짜라고? 제 머릿속이 팽글팽글 돌기 시작했다. 우악스레 잡힌 손은 보기보다 힘이 세서, 웬만한 성인 남성의 근력인 나조차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나에게 자유시간이 없다니! 이 세계에서 처음 맞는 축제였다. 비록 여전히 갇혀 있는 공간에서 이뤄진다는 점이 단점이긴 하지만 축제라는 단어는 날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자, 잠깐만요! 자유시간은요?”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손에 발이 질질 끌리기 시작하자 다급해진 난 여전히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라디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라도 좀 해 봐!

하지만 라디트는 지금 목격한 모든 것들이 제 머릿속에서 과부화를 일으킨 것인지 여전히 꼼짝도 하질 않고 있었다. 멍하니. 조금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입을 헤, 벌린 채로 빤히 날 바라볼 뿐이었다.

저 멍청이! 결국 끝까지 질질 끌려가 라디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는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저 자식. 두 번 다시 믿나 봐라! 식식거리며 다짐하다가도 이내 자신의 밥을 생각해 내곤 슬쩍 고쳐먹었다.

밥 먹을 땐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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