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충분히 휴식을 취해 머릿속을 정리한 라디트는 사제에게 직접 자신이 못 하는
것을 알렸다.
놀란 사제가 강력하게 라디트를 말리려고 들었지만 그는 결단은 바뀌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라디트는 남자였으니까.
결국 장시간 춤을 배우는 일은 몸이 견디지 못한다는 억지스러운 병명하에 라
디트가 춤에서 제외되었다. 그녀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서라도 곧바로 다른
아이들이 섭외할 거란 생각과는 달리 다른 아이로 채워 넣는 일은 없었다.
그 덕분일까. 제 옆에 나란히 서 있던 라디트가 사라지자 약간의 허전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헉.”
춤을 추다 저도 모르게 생각한 감정에 깜짝 놀라 고개를 재빠르게 저었다. 그
귀찮은 라디트가 없어진 것에 환호를 하지 못할망정 허전하다니!
춤을 배우는 시간을 제외하면 여전히 라디트는 제 옆을 차지한 채 좀처럼 놓
을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욱 징그럽게 달라붙는 그
에게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 텐데.
어느새 그녀의 온기에 길들여진 자신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하지
말자. 춤에만 신경을 쓰는 거야.
“자, 다들 잠시 멈추세요.”
제 몸을 나름대로 열심히 흔들며 어떻게든 간신히 무용을 따라가고 있을 때였
다. 갑작스레 우리를 멈추는 사제의 말에 모든 이들의 눈이 일제히 그녀를 향
했다.
“오늘부터는 초대된 손님들과 같이하도록 하겠습니다.”
손님? 초대요?
그들의 말에 잠시 벙쪄 있을 때였다. 사제의 손짓과 함께 차례로 등장하는 이
들은 남성이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나이 지긋한 남성들이 아닌 어린 이들이
었다. 갑작스레 참여한 남자들 때문에 아이들의 입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나 또한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반겼다. 라디트만큼
수려하진 않았지만 준수하게 생긴 이들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상에, 나도 모르게 라디트와 비교하고 있잖아?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재빠
르게 저으며 제 뺨을 가볍게 쳤다. 심각하다 진짜. 아무리 만나는 남자가 한
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모든 밥의 기준이 라디트로 돌아가는 것은 큰일이 아
닐 수 없었다.
“갑작스럽겠지만, 윗분들께서 일정을 약간 변경해 주시는 덕분에 오늘부턴 파
트너와 함께할 예정입니다.”
“네에?”
아이들의 일제히 외침에도 불구하고 사제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훌륭하신 분들의 자제분이시니 여러분들의 명성에도 누가 되지 않을 것입니
다. 그러니 평소와 같이 춤에 열중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사제의 말에 술렁거림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들의 표정이 누
그러지는 데엔 한몫했다. 더군다나 외모도 그렇게 나쁘지 않으니 그녀들의 볼
엔 어느새 홍조가 살짝 번져 있었다.
이 얼마만의 다른 밥이냐. 나 또한 그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빙그
레 미소를 지었다. 잠시간의 접촉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나와
함께 하게 된 파트너를 바라보며 나는 환하게 웃었다.
우리가 남자들과 춤을 춘다는 소문은 얼마 안 가 건물 안을 돌게 되었다. 그
도 그럴 것이 오랜만에 젊은 남자를 보기 위해 춤추는 곳에 오는 사람들이 늘
정도였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아이들이 점차 늘어, 꺅꺅거리는 함성 속을 간신히 헤쳐
나가 기숙사에 도착할 때였다.
“안녕?”
“라디트?”
평소와 달리 더욱 강렬한 수업으로 인해 기진맥진해져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밖
으로 나왔을 때였다. 잔뜩 화가 난 듯한 표정의 라디트가 문 앞에 서 있다 날
향해 인사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냐고?”
하, 하고 비웃음을 소리 내던 라디트가 돌연 환하게 웃었다. 평소라면 볼 수
없었던 그의 얼굴엔 여자 라디트가 아닌 남자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오싹. 무해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 영문도 모른 채 몸을 떨었다.
으, 응?
“남성 파트너가 생겼다며?”
“어? 응…….”
그의 말에 얼떨떨하게 답하자 라디트의 얼굴에 지어진 미소가 더더욱 깊게 피
어올랐다.
“개인적으로 축하한다고 말하고 싶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한 라디트가 더욱 입가에 미소를 짙게 만들었다. 이 위험한 모습,
어디선가 본 적 있었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제 머릿속에 떠올릴락 말락 하
는 기억을 간신히 붙잡고 있을 때였다.
“나 좀 보자?”
아. 제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기억에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라디트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땐 단 한 번뿐이었다. 자신과 섹스를 하기 직전. 거기까지 생각
하자 라디트만큼이나 새파래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큰일 났다.
단순히 화내는 것보다 웃으면서 화내는 것이 더 무섭다고, 눈앞의 라디트가
딱 그 짝이었다. 덕분에 가면 안 된다고 속삭이는 이성의 말도 무시하고 순순
히 그의 손에 끌려가게 되었다.
“우리 어디 가?”
기껏 물어보았건만 라디트에겐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시선 한 번 주는 일 없
이 제 앞길만 묵묵히 가는 그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차라리 말이라도 하고 화라도 내면 그에 맞서서 뭐라 말이라도 할 텐데. 조용
한 침묵 뒤에 도대체 무엇이 벌어질지 몰라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잠깐. 내가 왜 얘한테 무서워서 벌벌 떨어야 하지?
한껏 움츠러들였던 어깨를 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에게 덜덜 떨 이유가 없
었다. 나는 그저 하라는 대로 하고, 받아들이는 대로 수긍했을 뿐이었다.
모든 것들이 자신의 의사가 아닌, 사제들에 의해 강요된 것들임을 인지하자
그를 따라 재촉하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억울하네. 애초에 남성 파트너가 생긴 것도 윗선에 있는 분들로
인해 갑작스레 결정된 것이었다. 기껏 배웠던 춤들을 다시 춰야 했기에 나라
고 마냥 좋았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이런 고충도 모른 채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라디트를 바라보고 있자
니 점점 그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이대로 끌려갈 수는 없었다. 그의 페이스에 완전히 휘말리기 전에 내가……!
“비시아.”
“어, 어?”
우습게도 내 불만은 그가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마주하는 것과 동시에 말끔하
게 사라지고 말았다.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은 자연스레 내 머릿속
에 당황스러움을 입력했다.
“즐거웠어?”
“뭘?”
“남성 파트너랑 춤춘 거.”
“아…….”
그걸 말하는 거였나.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빙그레 웃었다. 안
좋을 리 있나. 다른 디저트도 맛보고 좋았는걸.
“응.”
대답을 하고 라디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
다. 그리고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인지도.
아뿔싸.
“아, 아니 그게!”
다급하게 뒷말을 내뱉었지만 이미 라디트의 눈썹이 더욱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하하 망했다. 나는 망했다.
“아니 그게 있잖아…….”
화난 그를 달래 줘야 하는데 오히려 실수로 신경을 더 건드리는 꼴이라니. 거
기다가 하필 꺼낸 말이 긍정의 한마디였다.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는 상
황에 등골 사이에서 땀 한 줄기가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비상벨이 리듬에 맞춰 머리를 울리는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 도
망가야 한다는 신호를 열렬하게 보내고 있는 머리와는 달리 내 몸은 여전히
꽁꽁 묶인 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 옷을 입고 춤을…….”
라디트의 중얼거리는 말에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가 헉했다. 하필이면 오늘따
라 귀찮아서 갈아입지 않은 옷이 그의 눈을 자극하게 될 줄이야. 남자랑 춤을
춘다고 이렇게 독점욕을 과시하는데, 옷까지 이랬으니 터지지 않는 것이 이상
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따갑게 다가오는 라디트의 시선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으으. 그의 눈에 묘
한 마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의 눈초리를 몸으로 고스란히 받고 있으려니
없던 죄책감도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이, 이거 입으래서 입었던 거야. 알잖아. 나도 이 옷 처음 받았을 때 썩 좋
아하지 않았던 거.”
그의 말에 재빠르게 손을 휘저었다. 내 손에 감긴 하늘하늘한 천이 하늘을 투
영하며 햇살을 받아 빛났지만 시야엔 여전히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어디서부
터 이 오해를 풀어 주어야 할지, 감히 감조차 오지 않는 순간이었다.
“잘 어울리네.”
“어……?”
의외의 한마디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뭐라고…….”
“잘 어울린다고.”
평소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벗으라거나, 입지 말라고 했을 라디트의 행동과는
전혀 반대되는 행동이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
데, 너 설마.
성녀 후보군에 발탁되지 못한 자신의 신체를 비관하며 죽는다는 생각을 하자
몸을 오소소 떨었다. 라디트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갑작스레 태도를 돌변시킨
그의 행동에 적응이 가지 않아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턱을
살짝 매만지던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네 몸 굴곡이 어여쁘게 다 드러나는 옷이야. 예뻐.”
“하, 하하. 그, 그래?”
이미 벗은 거 다 본 사람이 뱉은 말치곤 너무나도 새삼스러울 수가 없었다.
“응. 그래서 더욱 질투 나.”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온 라디트의 말에 얼어붙었다. 갑작스레 자신의 본
성으로 돌아온 라디트는 적절한 거리를 두었던 거리를 천천히 좁히기 시작했
다. 어느새 높게 치켜떠 있던 그의 눈썹은 제자리로 간 지 오래였다.
“필시 다른 이들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했겠지. 그리고 나와 같은 시선으로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걸 상상하니까 화가 정말 치밀어 올라.”
“아, 아냐. 그 사람들도 정말 춤만 추러 온 사람들이라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
을 거야!”
“비시아, 네가 독심술사라도 돼?”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드물 거라고 생각하
는데. 라디트의 말에 배실 웃으며 뒤로 한 발자국 피하자 그의 눈이 가늘게
길어졌다.
“비시아.”
“응?”
“춤 어떻게 춰?”
“어떻게 추냐니…… 혹독해. 가르쳐 준 대로 박자에 맞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추는 인형과도 같지.”
“그런 거 말고.”
어느새 제게 가까이 다가온 라디트의 시선이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차이 나지 않는 키 차이였건만 막상 서로 마주 보고 있자니 그의 넓은 어깨가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가깝게? 아니면…….”
라디트는 자신의 몸을 밀어 내 몸과 자신의 몸 사이에 빈틈조차 생기지 않게
밀착시켰다. 그의 가슴에 내 가슴이 밀착되자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이렇게 밀착?”
무슨 부비부비 댄스라도 추는 줄 아세요. 그들이 바라는 것은 화려한 춤이었
다. 옷 또한 그저 야하기만 한 옷인 것 같아도, 막상 조명을 받는 순간 햇빛
이 찬란하게 부서지는 것처럼 자잘하게 빛나 입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하지만 이렇게 햇빛 한 줌 비치지 않는 어두운 복도에서 라디트가 그 큰 뜻을
알 리가 없었다.
“얼굴은?”
가만히 있던 그의 손이 스멀스멀 올라와 제 뺨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차가운 냉기가 그가 비단 즐거워서 웃는 것임이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얼마나 가까이에 있지? 손은?”
“라, 라디트.”
천천히 죄어 들어가는 그물처럼 그는 날 하나씩 구속하기 시작했다. 시선부터
가벼이 시작해, 뺨, 얼굴 그리고 몸을 완전히 옥죈 그가 입술 끝을 더욱 끌어
올렸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인 것처럼 그의 손아귀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
게 되자 두려움에 살짝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