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에 불안해하다 이내 눈을 감았다. 정말로 피곤했던 것인지 눈을 감자 금방 수마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민망해질 정도로 빠르게 몰려오는 잠의 기운을 물리치지 못하고 나는 몸을 심연 속으로 완전하게 맡겼다.41화
그 뒤로 라디트의 행실이 잠잠해질 줄 알았다면 개뿔. 슬쩍 옆자리를 바라보
다 기가 막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정말 당연하다는 듯이 내 옆자리를 차지한 라디트 때문이었다. 평소 자신과
함께하던 애들 무리와 같이 다니지 않는 것도 모자라 제 옆에 자꾸 기어드는
라디트 덕분에 요즘 생활이 말도 아니었다.
안 그래도 내 출중한 외모로 평소에도 시선을 많이 받는 편이었는데, 라디트
까지 합세하자 미치고 팔짝 뛸 수준이었다. 덕분에 같이 다니던 친구까지 시
선을 받게 되었다. 잔뜩 어깨를 움츠리던 그녀가 내게 귓속말했다.
“야, 쟤 뭐야.”
“뭐?”
물어보는 바가 뻔했지만 모른 척 다음 수업 준비를 하고 있자 답답해진 친구
가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하며 옆구리를 찔러 대었다.
“모른 척 말고. 네 옆에 있는 라디트 말이야.”
“으음…….”
그러게 말이다. 나도 왜 옆에 있는지 의문일 따름이다. 어깨라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으나 지켜보는 시선들이 많아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찰싹 달라붙어선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처럼 팔짱까지 끼고 있으니
말 다 했지, 뭐. 멋쩍게 웃으며 대답을 회피하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친구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네…….”
“어, 어?”
의혹이 가득 찬 목소리에 순간 몸이 움츠러들었다.
설마, 밥 먹은 걸 들킨 건 아니겠지?
“언제 이렇게 친해졌어? 아니 친해진 것까진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너무한 거
아냐? 나한테 말도 안 해 주다니!”
근본 없는 그녀의 말에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면서 한시름 놓을 수 있었
다. 다행이다. 들키진 않았어. 사실 나랑 라디트가 섹스했을 거라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하겠느냐마는 말이다.
“하하, 그, 그러게.”
“언제부터 이렇게 절친이 된 거야? 응?”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절친이 되어 있던데. 대답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
다. 이렇게 말한다 한들 친구가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해 줄 리 만무했다.
“그, 글쎄. 저번 야외수업 때?”
“그 한 번만으로?”
집요하게 물어보는 그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곤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옆에 있는 탓에 옆에서 잘만 들릴 게 분명했는데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
았다. 오히려 여전히 내 팔을 옭아매듯이 꽉 붙잡아 팔짱을 끼고 있는 중이었다.
말이 좋아 팔짱이었지. 붙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라디트. 이제 곧 수업이 시작할 텐데 팔을 놓는 건 어때?”
“싫어.”
하하. 이 자식.
“그러지 말고. 너도 필기는 해야 하잖아.”
“괜찮아. 하지 않아도 다 알던 거라 충분히 복습 가능해.”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라디트에겐 말로 해선 결코 들어줄 것 같
지가 않았다. 결국 여전히 웃는 채로 스멀스멀 죄어 오는 그녀를 떨어트리기
위해 어깨를 살짝 움직였다.
하지만 꽤나 많은 힘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팔은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
이질 않았다. 강한 힘으로 억누르고 있는 라디트가 내 팔을 순순히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얘가 어색하게 왜 이래.
진땀을 흘리며 어떻게든 빼내려고 끙끙대었지만 빠져나올 기미가 보이질 않자
눈물을 감추며 포기했다. 팔에 부목 하나 댄 기분이었다. 그것도 내 몸만 한
거대한 부목.
라디트가 이렇게 치대기 시작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은 며칠째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얼음 장미 같던 애가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선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니까 처
음엔 그냥 넘기던 아이들이 수군대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뭐, 나야 수시로
디저트 같은 밥을 줘서 좋긴 한데……. 여전히 찰거머리처럼 꼭 붙어 있는 라디
트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렇게 붙어 있는 거 지치지도 않나, 얜?
“자자, 주목!”
모두를 조용하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은 말이 들리자 실내가 조용해졌다. 떠들
던 말들이 뚝 멈추자 만족한 이의 목소리가 잇따라 다시 들려왔다.
“곧 있으면 대외적으로 벌어지는 행사가 있어요.”
갑작스러운 통보에 일순 아이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까와
같이 즐거운 수다 소리가 아닌, 염려가 가득한 소리가 들리자 다시 한 번 앞
에 서 있던 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미 알고 있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 행사가 여러분 대부분의 미래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미 일정을 알고 있던 아이들도, 처음 듣는 아이들도 한데 어우러져 내는 목
소리가 시끄럽게 일렁였다. 그야말로 걱정이겠지. 자신들이 이곳에 온 이유이
기도 할 테니까 말이다.
“높으신 분들이 많이 참가하는 행사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행동과 언질에 있
어서 항상 주의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꽤나 간절함이 담긴 아이들의 이구동성에 사제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호명을 하겠어요. 이름을 불린 이들은 앞으로 나오세요.”
차례로 이름이 불려서 나가는 아이들 중에 나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운명이
달린 일인데 이미 후보가 있다니. 조금 아이러니한 체계에 의아해하면서도 일
단 앞으로 나섰다. 선망과 질투가 한데 어려 있는 시선이 내게 모여지는 순간
이었다.
으으, 부담스러운데.
앞에 나가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현기증을 일으킬 뿐이었다. 무대의 조
명을 즐기는 체질도 아니었을뿐더러 그런 강단도 없다. 하지만 이런 사정과는
다르게 최근 주목의 대상이었던 내겐 더욱더 과한 관심이 쏟아졌다.
“……그리고 라디트.”
끝으로 라디트까지 호명되자 약 12명 정도의 아이들이 앞에 서 있게 되었다.
친구가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멋쩍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줄 뿐이었
다. 호명을 끝내자 불린 아이들을 모아 다른 장소로 가기 시작했다. 널찍한
홀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사제 두 명이서 아이들을 가로로 일렬을 맞춰
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모순인가……? 뽑은 아이들이 대체적으로 내가 예쁘다고 생각했던 아
이들이었다. 순간 높으신 분들의 인형놀음이 생각났지만 이내 고개를 붕붕 저
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자기네들이 존엄하다 일컫는 성녀 후보들인데
그러겠어.
“여러분들은 관례에 따라 정해진 노래에 맞춰 춤을 춰야 합니다.”
으엑. 나 몸치인데. 자연스레 저번 생을 생각해 내며 몸을 떨었다. 심각한 몸
치, 박치였기에 춤에 가벼운 트라우마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자 옆에 있던 라디트가 의아한 눈길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행사에서 입을 복장도 있답니다.”
애초에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둔 것인지 각자에게 옷이 지급되었다. 꽤나 본격
적으로 하는 듯한 느낌에 받은 옷을 펼쳐 드는 순간이었다.
“헐…….”
받자마자 가벼운 무게와 하늘하늘한 소재에서부터 알 수 없는 불길한 기분이
들긴 했었는데, 이렇게 직격타를 맞을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펼쳐 든 옷은 빛을 그대로 투과하고 있었다. 가릴 곳은 다 가렸음에도 불구하
고 얇은 재질이 바스락거릴 때마다 천 너머에 있는 풍경이 보일 지경이었다.
아니 이걸 입고 어떻게 춤을 춘단 말이야? 입으면 보나 마나 살갗이 불투명하
게 투시될 것이 분명했다. 분명 바닥을 쓸 것 같은 긴 치마에, 긴 소매. 그리
고 몸을 다 가린 옷이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예뻐 보이라고
입은 옷은 아니라는 걸.
옷을 파악하자마자 난 재빠르게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라디
트 또한 똑같은 옷이 지급된 상태에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몸의 윤곽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옷이었다. 아무리 여리여리한 몸매와 예쁘장
한 얼굴로 여태까지 남자인 것을 숨겨 왔다고 한들, 이 옷에서만큼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을 터였다.
죽었다 다시 태어나면 모를까.
“라디트……?”
그런 그가 걱정되어 조심스레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자 라디트가 크게 휘
청였다. 놀란 내가 재빠르게 그의 몸을 붙잡자 라디트의 손아귀에 힘없이 옷
이 떨어졌다.
“사제님!”
이러다간 애 하나 잡을 것 같아 재빨리 목소리를 내었다. 내 부름에 아이들을
향해 이야기하던 사제님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리자 나는 라디트를 내게 기대
게 만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라디트가 몸이 아파서 그런 것 같은데 제가 데려다주고 올게요.”
놀라는 사제의 말에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빈혈인 것 같아요.”
얼굴색이 파리해질 대로 파랗게 질린 라디트의 얼굴은 내가 아무렇게나 내뱉
은 병명을 뒷받침해 주기에 충분했다. 내 말에 순순히 넘어간 그녀가 승낙하
자 다른 이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전히 사람이 없는 보건실에 당도하자 나는 라디트를 침대에 앉혔다. 여전히
파리한 얼굴은 천천히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괜찮아?”
그는 내 말에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우울해하는 그의 말에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못 한다고 해.”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그의 말에 가만히 고갤 저었다.
“너 그 옷 입고서 남자인 거 안 들킬 수 있어?”
“그건…….”
말하길 망설이는 라디트를 보다 저도 모르게 그의 아랫도리를 보고 가만히 고
갤 저었다. 으음, 내가 보기엔 그 옷으로 안 들키기란 너무 어려울 것 같은데.
결국 제대로 답조차 하지 못한 채 라디트의 깊은 한숨이 바닥에 떨어지자 나
는 조심스레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의 기분이 어떤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
었다. 자신이 쌓아 올렸던 모든 것들이 성별 하나 때문에 와르르 무너지는 기
분이겠지.
“……결국 이렇게 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어.”
라디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게 지금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체념하라고 하긴 했지만 정말 빠르게 체념하는 그를 향해 어떠한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말하던 그의 고통과 상실감은 생각 이상이겠지. 눈만
뻐끔거리고 있자 라디트는 빙그레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늘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집중하고
있었나 봐.”
“라디트…….”
“특히 최근에 더욱 강해졌던 것 같아.”
“응?”
그는 돌렸던 시선을 올려 날 바라보았다. 힘없이 주저앉고 있던 표정은 어디
가고, 올곧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시선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는 순
간이었다.
“널 보고 나서 말이야.”
라디트의 손이 도망치려는 내 손을 잡았다. 금방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아
프지 않게 쥔 그의 손을, 어째서인지 뿌리칠 수 없었다.
“네가 여기 있는 게 익숙해지고, 곁에 있는 게 당연해질 무렵 나도 이곳에 있
는 게 당연해지고 싶었나 봐.”
“라디트, 난…….”
그의 당연하다는 말에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라디트가 있어서 다행이지, 만
약 그마저 없었더라면 이곳은 내가 살기에 극악인 곳이었다. 하지만 그 라디
트마저 밝혀져 퇴출당한다면? 그의 존재가 불확실해진 순간 내게 이곳은 위태
로운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알아. 넌 여기 계속 있고 난 언젠가 도태되어 떠나겠지.”
그는 날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이 최대한 늦게 오길 바랄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