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그렇게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들이 모두 마무리되는 듯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구와 다음 수업에 대해 한탄을 지루하게 나열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생소한 이가 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보자마자 이름을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건, 그녀가 내 뇌리에 꽤나 독특하게 박힌 탓이었다.
“라디트?”
“너.”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얼굴엔 화가 잔뜩 어려 있었다. 냉랭한 얼음꽃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감정 표현을 선연하게 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왜?”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에게 반말을 쓰자 친구가 놀란 듯이 나를 바라보았지만 라디트의 시선은 오직 나만을 향하고 있었다.
“나 좀 봐.”
“나?”
“그럼 여기서 너 말고 누가 있어?”
많이 있는데요. 당장에 제 바로 옆에 있는 친구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라디트의 행색에 지적질 하려 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강한 힘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체 없이 끌고 가기 시작했다.
친구의 당황스러운 시선도 무시한 채 라디트가 끌고 간 곳은 어느 구석진 곳이었다. 조금 좁은 골목에 들어서자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게 닿았다.
필시 무슨 할 말이 있어 날 여기까지 끌고 온 그녀였지만 둘만 마주 보고 있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잡은 팔목이 새빨개질 때까지 가만히 보아도 뻥긋거리는 그녀의 입에선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꽤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디트 쪽에서 먼저 말이 나오지 않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냐고?”
자기 혼자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가 풀어지기를 번복하던 그녀가 갑자기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난데없는 소음 공격이었다. 나는 깜짝 놀란 눈을 숨기지 못하고 동그랗게 떴다.
어후. 고막 터질 뻔했네. 그냥 말로 할 것이지 데시벨로 공격하다니. 음성이라도 곱지 않았더라면 저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을 뻔했다.
“당연히 있지!”
씩씩거리는 그녀의 콧바람이 내게 전해질 정도로 빠르게 다가왔다.
“너! 왜 안 왔어?”
“뭘?”
“내 방!”
그녀의 말에 일순 몸을 멈추었다. 내 방도 아니고 네 방? 그녀의 말에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아무리 떠올려도 그녀의 방에 가야 하는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뭐지? 무작정 개인적인 방을 언급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라디트가 순순히 밥을 준다고 했을 리도 없는데.
“내가 네 방을 왜 가야 해?
“그야 물론 나한테……!”
“너한테 뭐?”
묻는 말에 라디트의 입이 꿰매졌다. 오늘따라 자주 입이 다물어지는 그녀는 어딘가 이상했다. 제멋대로 굴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말에 확신이 없어 보였다. 아니면 부끄러워한다거나.
부끄러워해? 그녀가? 저가 처음에 라디트의 옷자락을 잡고 넘어졌던 때를 생각해 내었다. 옷이 흐트러져도 표정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던 그 얼음이? 말하는 것만으로 부끄러워한다고?
“네가…… 그…… 준다며!”
“뭐?”
평소 말의 높낮이에 있어 움직임이 없던 그녀의 말과 달리 재빠르게 말하는 통에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 내뱉은 말이 얼굴에 다다닥 붙어 제대로 해석조차 할 수 없어 기어코 다시 그녀에게 되묻게 했다.
“안 들렸어. 다시 말해 줘.”
제 말에 라디트의 얼굴이 더욱 새빨개졌다.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보는 것마저 신기하다고 놀랄 때가 엊그제였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의 표정을 전교생에게 보여 준다면 어떻게 될까.
잘 익은 사과보다도 더 빨개진 얼굴은 그녀가 라디트라는 것을 자꾸 망각하게끔 만들었다.
“네가 해 준다며!”
그녀의 갑작스러운 큰 소리는 머릿속에서 흘러가던 망상을 순간 멈추게 했다. 뭐라고?
“네가 다음 것도 하게 해 준다며!”
그러니까 도대체 뭘?
주어만 쏙 빼놓고 무작정 소리치는 그녀에 대해 미간을 찌푸리다 돌연 생각나는 것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흙탕물 속에서 약속했던 것. 그녀의 발그란 얼굴이 인상적으로 남았던 그때를 생각해 내자 경악해 미간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설마 그때 약속했던 걸 말하는 거야?”
내 말에 라디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입술을 두어 번 벙긋거리다, 이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걸 아직도 기억해?”
“당연하지!”
고개까지 크게 위아래로 끄덕이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 저도 놀라 몸을 뒤로 주춤거렸다. 깜짝이야. 벽이 없었다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도망칠 뻔했다.
저한테 밥을 준다는 기쁜 소식임이 틀림없었지만 역으로 이렇게까지 당하자 무언가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예전이라면 기뻐 팔짝 뛰기라도 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그녀가 너무나도 낯설었다.
“그, 그래?”
드디어 자신의 이유를 알아주는 날 향해 눈을 반짝이는 라디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럼 오늘 나한테 온 이유도 설마…….”
말을 하면서도 자신 스스로가 믿어지지 않아 슬쩍 눈을 다시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밥들이 저 스스로 먹히러 온다고는 하지만, 콧대 높은 라디트조차 그럴 줄은 몰랐다. 애초에 한 번 달아올랐다고 이렇게 달려들 것까진 없잖아!
“나랑 하려고?”
내 말에 다시 한 번 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젤로부터 도망친 후 처음 맞이하는 밥이었지만, 새로운 식단에 조금 대답하기가 꺼려졌다.
엄마한테 이 식단에 대해서도 배웠던가…….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도 남녀에 대한 카마수트라밖에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무리 내 외모가 남녀노소 먹혀들 외모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빨리 쓰일 줄은 아마 엄마도 몰랐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말에 혹하는 것도 잠시. 정말로 라디트로 인해 배가 채워지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편한 이곳에서 최대한 오래 머물기를 원하는 내게 그녀라는 밥은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었다. 잘못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그녀와의 관계를 들키기라도 한다면 이곳에서 쫓겨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뜻밖에 차려진 밥상에도 불구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자 입매를 올렸던 라디트의 웃음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어떻게 얼굴에 감정을 숨기고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기쁨이 사라진 그녀의 얼굴엔 실망의 빛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설마 내가 여자라서 고민하는 거야?”
울상을 짓는 라디트의 얼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아니. 나는 딱히 따지는 것 없이 맛만 좋으면 그만이긴 한데…….
“나 남자야!”
“……?”
그녀의 커다란 외침에 순간적인 정적이 휩싸였다. 드디어 쟤가 아무 말을 내뱉는 것의 절정을 배워 버리고 말았나.
내뱉는다고 해서 다 말이 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 그녀는 여전히 올곧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라니. 라디트가 남자라니. 나만큼이나 예쁘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예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쉬이 생각이 되질 않았다. 애초에 생각이 제대로 정리될 리 만무했다. 여자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이가 다짜고짜 자신을 남자라고 소개하다니. 그것도 냉혈의 꽃이라고 불리던 아이가!
“뭐……?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나 남자라고!”
여전히 철석같이 자신을 남자라고 소개하는 그녀의 말에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메워졌다.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믿으라는 말이 있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냐? 드디어 그녀가 미친 것은 아닌지, 심각한 고민조차 되기 시작했다.
곧바로 답을 주지 않자 초조해하던 그녀의 얼굴에 일순 굳은 결연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표정은 순식간에 그녀의 손이 움직이게끔 만들었다.
다급하게 자신의 옷을 잡은 그녀는 얇은 치맛단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 도대체 쟤가 뭘 하는 거지?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놀라기도 잠시, 치마 속에 있던 속바지조차 빠르게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속바지가 벗겨지면서 밋밋하면서도 새하얀 허리가 보이기 시작하자 비로소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런 걸로 섣부르게 판단하면 안 되었지만 잘록한 허리가 아니라, 일자로 내려간 그녀의 허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제 눈에 제대로 각인되게끔 했다.
그제야 사태 파악을 한 나는 그녀가 나머지 것도 벗어 던지기 전에 재빠르게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라디트!”
그녀의 이름을 외침과 동시에 허리춤을 붙잡았다. 더 이상의 것을 보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덜컥 라디트와 손을 맞붙잡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비시아.”
놀란 표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그녀와 달리 나는 표정을 미묘하게 일그러트렸다. 여기가 아무리 구석진 곳이라고 해도 함부로 구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여장을 하고 올 정도로 이유가 있다면 좀 더 주변의 시선을 살피란 말이야!
“알았어, 알았다고! 네가 남자라는 건 잘 알겠어!”
포기하듯이 라디트의 말에 동의하자 그의 입에 완전한 미소가 걸렸다.
“그럼 나랑 해 주는 거야?”
아, 젠장. 아무래도 이번 밥도 잘못 걸린 것 같았다.
“너, 너랑?”
라디트의 말에 당황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너랑 나랑? 여기서? 반짝임이 그득한 그의 눈을 보며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그는 여기가 길인 걸 까맣게 잊은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작정 이 트인 공간에서 하자는 말이 나올 수 없었다.
진정하자, 응?
“맞아. 나랑.”
하지만 해맑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의 그에게 진정이라는 것은 없는 듯했다. 흑흑, 나 아무래도 잘못 걸렸나 봐.너를 먹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