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먹고 싶어-33화 (33/86)

33화

“하아.”

탄식에 가까운 한숨이 방을 크게 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와 친해질 방법이 없었다. 애초에 그 일을 통해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게 하려고 해도 전혀 빈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빈틈을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선 일단 우리는 대화가 필요했다. 서로를 알고 마음을 열어갈 그런 대화. 하지만 어떻게?

“하아아.”

다시 한 번 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걘 아무리 봐도 날 싫어하는 게 너무 티가 난단 말이야. 저렇게 몸으로 드러내어서 적대감을 표현하는 애가 나랑 잘도 대화를 해주겠다.

물론 나 말고도 그녀가 사람들 대하는 태도는 한결같았다. 자신이 같이 다니는 극소수의 애들을 제외하고는 대꾸조차 해 주지 않는 것이 일상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어제 그녀의 행동은 유독 나한테만 날을 날카롭게 세우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헉 설마. 내가 자신의 정기를 빼앗아 먹으려는 생각을 들켜 버린 건 아니겠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앉았다. 에이, 설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 어떤 보통의 인간이 미쳤다고 정기를 먹는다는 상상을 하겠는가.

그저 자신이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분명했다. 그냥 단순히 첫 만남이 불쾌함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내게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그녀와 친해질 방법을 궁리하기 위해 턱을 괴는 순간이었다.

“너 뭐 해?”

“나?”

“그래. 아까 전부터 쭉 지켜봤는데 혼자서 한숨 쉬고 혼자서 난리 치고. 안절부절못하지 못하고 행동하는 게 아주 그냥 코미디가 따로 없던걸?”

젠장. 너무 깊이 고민하는 덕에 옆에 친구가 있다는 걸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괜찮아, 더 해. 보는 맛이 있으니까.”

뭐 그런 게 한두 번이니, 라고 작게 말한 친구가 다시 제가 보던 책으로 눈을 돌렸다. 민망함에 뒤통수를 긁적이며 목을 가다듬었다. 격하게 생각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제 위치로 돌아와 이번엔 제대로 턱을 괴었다. 느긋하고 편안한 자세로 다시 생각에 잠기는 것도 잠시, 금방이라도 방법을 떠올릴 것 같았던 자신감과는 달리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자 당황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떻게? 무슨 방법을 써서 친해져야 하지?

생각해 보니 이번 생에선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애초에 주는 사랑조차도 버거워 도망친 판에 친해지기 위해 노력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내가 전생에서 애들이랑 어떻게 교류했었더라. 제 머리를 이 잡듯 뒤집어도 딱히 쓸만한 정보는 떠오르지 않았다. 같은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먹을 것에 환장하여 돌아다녔다는 것 외에는.

“친구야.”

“응?”

가만히 부르는 소리에 그녀가 책에서 시선을 떼어 날 바라보았다.

“너 라디트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

“친구야.”

내 말에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날 흉내 내며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내가 걜 좋아하는 걸 알고 있다면 지금쯤 나는 너의 친구가 아니라 걔의 친구이지 않을까.”

정확하게 논점을 집어 말하는 그녀의 말에 입술을 삐죽였다.

“정말 몰라? 걔도 나만큼 유명하잖아.”

“넌 네 입으로 그렇게 유명하다고 말하고 싶어?”

그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때. 사실인걸.

“몰라, 난. 걘 은근히 자기랑 관련된 사적인 내용은 남한테 말 안 하더라.”

“정말 아무것도 몰라? 자주 먹는 거라든가, 자주 마시는 거. 뭐 그런 것들 있잖아.”

“글쎄. 그렇게까지 알아내서 걔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걸?”

“엥, 왜?”

그녀의 말에 의아함을 표했다. 왜지? 나만큼은 아니지만 그렇게 예쁜 아이에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물론 그녀의 성격이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예쁜 아이들은 뭘 해도 괜찮은 법칙 같은 게 있지 않던가?

“왜, 너도 봤었잖아. 걔 성격 안 좋은 거.”

“그렇긴 하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열심히 동감했다. 성격이 좀 지랄 맞긴 했지. 차갑게 응수하던 라디트의 모습은 결코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거 때문에 처음에 외모 때문에 혹해서 다가갔던 애들도 이제 학을 떼던데. 그냥 걸어 다니는 관상용 장식 취급하는 거지.”

“그럼 그 주변 친구들한테 정보를 얻는 건…….”

“그만둬. 다 자기 같은 애들만 고른 건지 걔네도 하는 행동은 라디트랑 비슷하대.”

하나같이 맞는 말들만 하는 그녀의 말에 빈번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본 것과 남들이 본 것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인지 평가도 하나같이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밥을 포기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래도. 혹시나 그래도 뭐 아는 거 없어?”

끈질기게 물어보는 말에 친구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친구야. 미안하지만 내가 걔한테 별로 관심이 없어.”

단호한 그녀의 말에 울상을 지었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이렇게 도움이 되지 않을 줄이야. 제 협소한 인간관계에 한숨을 푹푹 내쉬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원래 이럴 땐 유일무이한 단짝 친구가 세상 모든 남자들의 정보는 꿰뚫고 있지 않았나? 적어도 내가 읽었던 인터넷소설책엔 그랬던 것 같았는데.

결국 제대로 된 방법 하나 없이 원점으로 돌아오자 몸을 무너트렸다. 아, 망했다. 전생까지 기억하고 있으면 뭐 해. 쓸 만한 정보들이 하나도 없는걸. 역시 인생은 다 거짓과 부정의 연속이었어…….

“그런데 너 갑자기 라디트는 왜?”

“어?”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어둠 속으로 감추었던 눈을 돌려 바라보았다.

“너도 걔한테 딱히 관심이 없었던 거 아냐? 어제까지만 해도 이름조차 잘 기억하지 못했잖아.”

“아, 그게…….”

순순히 대답하려다가도 일순 떠오르는 생각에 싱긋이 웃음으로 일관했다.

왜긴 왜야. 먹고 살아야 하니까지.

***

아무런 계획도, 방법도 없던 내게 생각보다 기회는 빠르게 다가왔다. 날씨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갑작스레 잡힌 야외 실습은 운명적이게도 나와 라디트를 한 팀으로 엮어 주었다.

실내 수업도 귀찮았건만, 야외 수업이라니. 햇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평소 같으면 별의별 핑계를 다 대어서라도 수업을 듣지 않았겠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드디어! 걔가 내 옆에 있어!

금방이라도 환호성을 지르며 난리 법석을 떨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입매를 올렸다.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하늘이 내게 밥을 먹으라고 내려 준 둘도 없는 기회!

“잘 부탁해요.”

최대한 붙임성 있게 말을 건 나완 달리 그녀는 여전히 대꾸조차 없었다. 은근슬쩍 팔이라도 붙잡지 않았더라면 초반부터 닥쳐오는 한계에 줄행랑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배고프세요? 툭하면 말을 먹게?

“이렇게 같은 조가 된 것도 인연인데, 과거 일은 잊고 같이 잘해 봐요. 네?”

연이은 냉랭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팔에 억지로 팔짱을 끼었다. 질색하는 눈초리가 나에게 닿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활짝 웃으며 절대 놓지 않을 거라는 의지를 내비쳤다.

사실 억지로 몸을 맞대면서 들어오는 정기에 조금씩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매우 적은 소량이긴 했지만 들어오는 게 어디야.

“그럼 사제님이 가르쳐 주신 약초를 찾으러 가 볼까요?”

그 어떤 말에도 대꾸하지 않는 그녀를 어르고 달래어 끌고 가기 시작했다. 마치 메신저에서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읽고 나가 버리는 조원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제 목이 간신히 축여 가고 있다는 점에서 간신히 방긋방긋 웃어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명백하게 ‘나는 하기 싫다’의 모습을 보이는 그녀를 끌고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원이 실시간으로 탈주하는 듯한 느낌에 이가 까득까득 갈리는 기분이었지만 그마저도 꾹 참아 내었다.

하하. 참자. 잠아. 이런 사소한 불편함 따위, 배가 뚫렸을 때의 상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런 기분은 오랜만에 느끼고 좋은걸. 신선하기도 하고. 다시 전생 때의 대학생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아주 좋았다.

“우리 열심히 해서 좋은 점수 받아요!”

대답을 받는 것은 이제 바라지도 않았기에 혼자서 파이팅을 외치곤 그녀를 다시 끌고 가려는 순간이었다.

“이것 좀 놓지그래?”

제 손을 치는 그녀의 행동에 순간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몸을 간신히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몸만 둔 채 영혼이 탈주한 줄 알았던 그녀가 씨근덕대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만 좀 잡아당길 순 없어? 억척스럽게 행동하는 너랑 달리 난 연약하단 말이야.”

이게 진짜. 밥투정을 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무던히도 꾹꾹 제 성질을 누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제 노력을 가뿐히도 무시하는 그녀의 행동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말할 줄 아네요?”

“뭐?”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탈출을 감행했던 조원을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난 또 대답도 안 하기에 말을 못 하나 싶었죠.”

“바보 아냐? 전에 대답한 적 있었던 거 까먹었어?”

“사람 사정이 어떻게 급변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당신이 갑자기 말 좀 못하는 멍청이가 될 수도 있잖아요?”

제 말에 기가 막힌 건지 라디트가 황당하다는 듯이 눈을 날카롭게 세웠다.

“됐어. 필요 없고 따로 다니자.”

한껏 날카로워진 그녀의 눈이 날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네가 싫어.”

“난 좋은데.”

그녀가 황당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말에 대신 어깨를 으쓱여 주었다. 진짜인걸. 배가 곯다 보니 이런저런 상황 따져 가며 들이댈 정도로 사치스러운 감각 따윈 잊은 지 오래였다.

“아무튼! 난 네가 싫으니까 따로 다녀. 네 망상 가득한 우정 놀이에 어울려 줄 생각 없으니까.”

“그럼 어쩔 수 없죠…… 사제님한테 말하는 수밖에.”

제 말에 기세등등하게 등을 돌리려던 라디트의 몸이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눈에 도드라지는 그녀의 행동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이런 방법까지 쓰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모든 것은 라디트가 자초한 화였다.

그녀를 잠시 조사해 본 결과 많은 정보를 얻어 낼 순 없었지만, 매번 우수한 성적을 받고 있었다는 것만큼을 게시판에 붙여진 등수를 보고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성적에 무척 신경을 쓰는 그녀가 자신의 성적에 누가 되는 일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은근한 눈길로 바라보며 조심스레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제가 사제님한테 가서 팀원이 개별적으로 행동한다고 말할…….”

“가! 간다고!”

씩씩거리며 몸을 다시 내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그녀는 내가 가려고 했던 방향으로 먼저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렇게 혼자서 잘 걸을 수 있으면서. 쿵쿵대며 멀어지던 그녀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이던 찰나 자신이 처음 마음먹었던 본분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차! 친해지기로 했으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이람!

제 머리를 콩콩 쳐 대며 말을 주워 담기 위해 손짓 발짓을 해 보았으나 시간이 되돌아가는 기적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라디트가 고갤 돌려 환하게 웃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눈앞엔 그저 성난 라디트가 번뜩이는 눈으로 주위를 매섭게 살펴보고 있을 뿐이었다.

망했다.너를 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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