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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먹고 싶어-32화 (32/86)

32화

기구한 제 인생이 절로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괜찮지만 점점 심해지면 초반에 겪었던 증상을 그대로 겪게 될지도 몰랐다.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어 삶마저 포기하고 싶게 만들었던 고통을 생각하자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너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너 지금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거 알지? 아까부터 눈이 너무 무서워.”

“아, 미, 미안…….”

아까 그만둔다는 것이 아직까지도 제 눈을 뒤집어 까며 남자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머쓱하게 제 눈을 살짝 깜빡였다.

“넌 예쁜 애가 가끔 이상할 정도로 눈을 뒤집어 까더라.”

“그, 그래?”

거 남자 좀 찾아보려고 눈 좀 뒤집을 수 있지. 너도 살고 싶어서 필사적인 마음이 되어 봐. 이런 얼굴이 나올 수밖에 없을걸.

하지만 찾는 것에도 슬슬 한계가 오고 있었다. 이곳에 오자마자 찾았지만 며칠 동안 남자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있었다. 교수로 보이는 이들은 몇몇 있었지만 그마저도 정기를 빨아먹기도 미안한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들뿐이었다.

아무리 지금의 처지가 가릴 상황이 아니라고는 한다지만 할아버지는 싫었다. 연세 지긋하신 이들의 정기를 빼앗아 먹다가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흐윽…….”

생각하니 정말 웃기면서도 슬픈 코미디가 아닐 수 없었다. 정기를 뺏어 먹는다고 무작정 찾아갔다가 복상사로 그만 죽어 버리는 밥이라니. 그렇게 비실비실한 밥은 역시 줘도 사양이었다.

“너 진짜 오늘 좀 이상한데…….”

옆에서 실실 쪼개면서 우는 날 향해 친구가 뒷걸음질 쳤다.

“너 어디 아파?”

하다 하다 자신의 친구를 미친년 취급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가만히 저어 주었다. 네 친구에게 남자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면 가만히 있어 주렴, 친우여.

“헉, 수업시간 얼마 안 남았어. 빨리 가자!”

힘이 없는 제 팔을 잡은 그녀가 앞장서서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팔 힘에 따라 힘없이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 얇은 팔에서 어쩜 그리도 힘이 샘솟는지 억척같이 끌고 가는 그녀의 힘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휘청거리는 두 다리는 여전히 제대로 스텝조차 밟지 못하고 땅에 질질 끌리기 일쑤였다.

친구야, 내가 힘이 없거든. 조금만 천천히…….

“컥.”

그럼 그렇지. 미처 말도 하기 전에 힘없이 질질 끌려가는 내 몸을 못 버틴 손이 미끄러짐과 동시에 발부리에 무언가 부딪쳐 앞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꺅, 비시아!”

제 손을 놓친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입으로 손을 모았다. 아니, 놀래지만 말고 그 손으로 잡아 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그녀가 내 손을 잡아 주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힘이라곤 전혀 없는 내 몸에서 초인적인 능력이 발휘되어 용수철처럼 서는 일도 없었다.

다치면 아프다!

바닥에 완전히 부딪히기 직전, 간신히 작동한 머리가 손을 앞으로 내질러 무언가를 잡게 만들었다.

손에 잡히는 것을 무작정 잡은 덕분에 내 뾰족한 턱과 바닥이 마주치는 사태는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부드럽고 얇은 천의 조각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 너…….”

친구의 옷자락일 줄 알았으나 그녀는 옆에서 당황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흔들리는 눈동자가 지금 상황이 명백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왜? 뭐? 왜 날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데……?

“이것 좀 놓지그래?”

위에서부터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내 목이 자연스레 좀 더 위로 꺾였다. 제 시야에 담기는 햇살과 함께 차갑기 짝이 없는 얼굴과 마주하게 되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 예쁜 애다.

저만큼은 아니지만 예쁘장한 모습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얼굴을 익힌 아이였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얼굴만큼이나 차가워 보이는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자신이 인자하고 자애로운 상의 아름다운 미를 뽐내고 있다면 저 아인 나와 정반대의 미를 가지고 있었다. 차갑고 냉랭하게 얼어붙은 호수 위에 앉아 있는 한 마리의 고고한 백조 같달까.

애초에 자신이 허락한 이들 외에는 접근하지 말라는 오라를 풍기고 다니는 탓에 워낙 말을 붙이기 힘든 것도 있었다.

“그게…….”

입을 벌리려다 제 몸을 채우는 기묘한 감각에 그대로 멈추었다. 제 손에서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이 감각은 분명 익숙한 것이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헛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감각은 제가 생각하는 것이 맞았다.

배가 차오르는 감각.

간신히 허기를 채우는 정도의 감각이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이 감각을 잊을 리 없었다. 이 감각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던가.

“뭐 해. 안 놓아?”

“아.”

제 생각에 빠진 탓에 옷자락을 놓는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 머쓱해하며 재빠르게 옷자락을 놓으며 일어서자 앞에 있던 이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돌렸다.

아. 안 돼!

“잠깐만!”

놓칠 수 없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내려지는 단 한 줄기의 빛이 될지도 모르는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제멋대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잡은 팔을 타고 다시 한 번 더 정기가 몸에 이입되자 단순히 자신이 허투루 생각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확실했다. 내 눈앞에 있는 이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틀림없는 자신의 주 밥인 정기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뭐야? 안 그래도 바쁜데. 지각하려면 너 혼자서 해.”

차갑게 내 손을 쳐 버리며 다시 제 무리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는 이를 향해 나는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비시아, 비시아! 괜찮아?”

옆에서 계속 방관하기만 하던 친구가 겨우 내 곁에 와서 어깨를 흔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곳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제 손에는 아직까지도 미약하지만 정기가 남아 있었다.

“너 갑자기 라디트한테 왜 그랬어? 평소엔 눈길만 주고 말더니.”

“……라디트.”

그러고 보니 이름이 그랬었지. 제 가슴을 강하게 치는 듯한 느낌에 한동안 이름만을 달싹였다. 라디트. 이름보다 중요한 건, 그녀가 여자라는 점이었다.

어째서 여자인데 허기가 채워진 거지? 갑작스러운 정보 교란으로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여자한테도 정기를 뺏을 수 있었나? 의아해하며 옆에 있던 친구의 손을 잡았지만 그 어떤 감각도 이끌어지지 않고 있었다.

“비시아? 오늘 너 정말 왜 그래?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자신의 손을 잡은 채 멍하니 있는 날 결국 걱정하기 시작하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높은 곳에 위치한 시계를 보자 나는 재빠르게 앞으로 몸을 틀었다.

“아, 아냐. 빨리 가자. 지각하겠다.”

그녀의 손을 맞잡은 채로 이번엔 제가 그녀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비실거리던 내가 강한 힘으로 당기는 것에 놀란 그녀가 잠시 탄성을 자아내었지만, 곧 시계를 본 것인지 군말 없이 내 발걸음에 맞춰 가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교실에 도착함과 동시에 오늘 교육을 담당하실 사제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자리에 착석한 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라디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 오늘도 자애로운 여신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시작하는 여사제님의 말과 함께 나는 라디트를 향해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왤까.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왜 그녀한테서 정기를 먹을 수 있었던 걸까. 이곳에서 마주친 여자만 수백 명에 달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에게서도 정기를 얻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죽하면 이곳을 탈주해서 다시 테이젤에게 돌아갈까, 라는 생각도 잠시 해 볼 정도였다.

이곳에서 정기를 얻는다는 건 기적조차 바라지 못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혹시나 싶어 수업 시간 동안 계속 엄마에게 배웠던 것들을 꺼내고 또 꺼내었다. 머릿속에 가득한 남자들에 대한 처세술을 생각해 냈지만, 그 어디에도 여자에게 정기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결국 수업이 끝날 때까지 생각해 내지 못하자 머리가 터질 것 같음을 깨닫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으으!”

정말 모르겠다! 괴성을 지르는 내 행동에 결국 친구가 혀를 차며 내 옆을 벗어났다. 남들이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래! 그냥 쟤가 특이한 케이스겠지!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으로 족할 정도였다. 지금의 내게 그녀는 내 삶에서 발견한 빛과 소금 같은 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이곳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산다는 방법도 있었지만 여기처럼 신분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쉽게 살 수 있는 곳은 또 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편한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일하지 않고 돈을 벌지 않아도 쉽게 먹고 잘 수 있는 곳. 거기다가 남정네들의 질척질척한 시선을 받아도 되지 않는다니. 밥을 먹는 행위는 좋았지만 잘못 엮이면 어떻게 되는지 충분히 배운 나로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딱 한 가지였다.

“저기…….”

“뭐야?”

그녀의 앞에 다가서자마자 무작정 친절하게 웃으면서 말을 건네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얼굴에 뱉어지는 침보다 못한 쌀쌀함이었다.

거, 너무 쌀쌀맞으시네.

“아까 돌부리에 채서 불가피하게 옷을 잡았던 사람인데…….”

“근데 뭐?”

“수업 시간 동안 계속 생각해 봤는데, 너무 미안해서요. 괜찮다면 시간을 내어서 따로 사과드리고 싶은 마음에 왔어요.”

그녀는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올려 날 바라보았다.

“지금 해.”

“네?”

“지금 여기서 하라고.”

이 새끼……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래도 이왕이면 맛있는 거라도 대접해 주면서 사과하고 싶어요. 오해가 있다면 풀고 싶고요.”

맛난 걸 먹이면 제아무리 흉포한 성격을 가진 이라고 한들 한결 성격이 누그러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녀와 지속적으로 접촉해야 하는 나로선 그녀에게 비단 사과만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친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내 맘 잘 알지? 하고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모질게 말하는 그녀의 앞에서 잘도 방긋방긋 웃으면서 말하자 그녀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헉. 드디어 내 예쁨이 먹혀드는 건가……!

“응, 싫어.”

비죽이는 미소를 입에 올린 그녀가 차갑게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래도 이번 상대는 만만치 않은 강적인 것 같았다.

너를 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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