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먹고 싶어-30화 (30/86)

30화

재빠르게 다시 고개를 조아렸지만 제 가슴에 닿는 시선을 보며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내 거미줄에 걸린 먹이라는 것을. 발그랗게 달아오른 얼굴은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었다.

“아니에요. 말실수, 할 수도 있죠.”

“감사합니다!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아량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걸요.”

빙그레 웃으며 그의 어깨 위에 내 손을 둘렀다. 자연스럽게 이뤄진 스킨십에 그의 어깨가 뛰어오를 듯이 크게 움찔거렸다. 여기 오면서 볼 수 없었던 순진무구한 행동에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숙맥처럼 구는 그의 행동이 그저 나가기 위해 하던 행동에 재미를 주고 있었다.

“비, 비시아 님?”

“쉬이. 용서하는 대신 제게도 정당한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그를 살폈다. 생긴 것도 준수하고 이 정도 풋풋함은 처음 먹어 보니 색다른 메뉴로 한 번쯤은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여태까지 먹을 수 없었던 색다른 맛이 날 것만 같았다.

“대, 대, 대, 대가라니…….”

“걱정 말아요. 오늘 일은 어디에서도 발설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나머지 한 손도 그의 어깨에 올렸다. 그와 마주 보는 자세로 바뀌자 그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를 향해 한껏 가슴을 그의 가슴팍에 밀착했다. 옷 외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 가슴이 그의 가슴에 자연스레 비벼졌다.

그걸 알아차린 것일까. 그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지며 눈이 내가 아닌 가슴골을 향했다.

“물론, 당신과 제 입이 완전하게 봉해져야겠지만요.”

“읏…….”

동기부여는 간단했다. 그를 향해 살짝 도발해 주는 말과 함께 그의 머릿속 제어장치를 걸어 주던 모든 것들이 끊어졌다. 내 말을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해한 그가 내게 달려드는 데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으응……!”

그의 행동에 반응을 맞춰 주며 앓는 듯한 소리를 내자 그의 행동이 더욱 농밀해지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목을 빨아올리는 그의 입과 함께 제 가슴을 쓸어 올리는 행위에 잠시 멈추었던 포만감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살찐다. 살찌는 소리가 들린다! 역시 빨리 끝내는 게 좋겠어. 배를 채우는 감각과 함께 모골이 송연해지는 살찐다는 생각이 행동에 자꾸 브레이크를 걸게 만들었다.

아냐. 달라. 더욱 그에게 밀착하며 제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을 지워 내었다. 이 일만 제대로 넘어가면 살찌는 소리도 한동안 굿바이일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대의를 위한 잠깐의 희생 같은 살찜이었다.

“그렇게 조급해할 필요 없어요.”

아래로 자꾸만 내려가려는 그의 얼굴을 멈춰 다시 날 바라보게 만들었다. 새빨개진 앳된 얼굴이 눈을 깜빡이며 당혹스러운 눈동자로 날 바라보았다.

“하, 하지만…….”

“테이젤……, 폐하는 한동안 이곳에 나타나지 않으실 거예요.”

계속 당혹스러워하며 제 행동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처음 에드아르와 테이젤을 만났을 땐 당황했을뿐더러, 배가 고파 제대로 생각과 인지를 하지 못하고 그들을 맞이했던 탓에 배운 것의 반의반도 써먹지 못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배라면 터질 듯이 부르고 있었고 푹 잔 덕분인지 정신머리도 제대로 잡혀 있었다. 엄마에게 지긋지긋하게 배웠던 것대로 손을 움직이자 그는 밧줄에 구속된 것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어 내 행동에 모든 것을 맡기기 시작했다.

……신기해! 이렇게나 쉽게 되는 거였다니. 쉽다고 자부하던 엄마의 말을 진심으로 여길 정도로 모든 것들이 쉽게 진행되고 있었다.

내게 완전히 빠져 버린 그는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을 기세로 나를 안달 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향해 나는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덥지 않아요? 문을 조금 열고 싶은데.”

“네? 네, 네! 물론이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가 벌컥 문을 열었다. 굳게 닫혀 있었던 정문이 열리며 사이 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이스! 너무나도 쉽게 성사되는 일 처리에 순간 지금 상황을 까먹고 펄쩍 뛰려다 재빠르게 자세를 고쳤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정기를 뺌과 동시에 그를 홀리는 눈빛 또한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은근하게 보내는 눈빛에 그는 해롱해롱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오. 넋이 나가서 사람이 멈춘다는 건 그저 영화적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제 눈앞에 있는 이가 딱 그짝이었다. 그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흔들어도 그의 시선은 그저 나를 향할 뿐이었다.

“저 가요?”

내가 그렇게 좋아? 조심스레 입 밖으로 내밀어 본 말도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나에게 푹 빠진 저 가련한 중생을 여기소서.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기둥 뒤에 숨겨 두었던 짐을 들고 천천히 문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하나.

둘.

바깥을 향해 몇 걸음을 걸어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뒷걸음질 치던 발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푹 빠진 어린 양이 보이지 않고 어느덧 건물마저 보이지 않게 되자 재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드디어 탈출이다!

기쁨이 고조되어 땅 위를 폴짝폴짝 뛰게 만들었다. 자유다! 마치 전생 때 외가댁에 붙잡혀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먹던 그 생활이 끝났다는 사실이 얼굴에 함박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맛있었던 밥아 안녕! 나는 간다. 잘 있어라!

용기는 가상했다.

편한 곳에서 빠져나오고자 한 호기와 빈틈없이 철저한 행동으로 인한 계획 성공은 스스로라도 칭찬해 마땅해야 할 것이었다.

에드아르의 도움을 받아 나올 수도 있었다. 나를 무척이나 데려가고 싶어 하는 눈빛이니 잘만 꾀면 얼마든지 그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지 않았다. 애초에 테이젤과 같은 목적으로만 날 바라보고 있는 이에게 더 이상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만복으로부터 도망치는 주제에 에드아르에게 손을 벌린다는 건 호랑이를 피해 곰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렇게 무작정, 막무가내로 뛰쳐나왔는데.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곳은 내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엄마에 의해 처음 떨궈졌던 곳도 아니었고 칼빵을 맞았던 전쟁터도 아니었다. 심지어 건물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적막만이 우거진 수림을 뒤흔드는 곳이었다. 바람을 타고 일렁이는 푸른 녹음이 이곳의 고요함을 또 한 번 알려 주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너무 조용했다. 마치 그 방에서 혼자 있을 때의 연장선과도 같을 정도로 주변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 손끝에 닿는 것에 인공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또한 한 몫 단단히 하고 있었다.

탈출의 기쁨을 누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제 몸을 엄습하는 두려움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려고 하자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여길 조금만 벗어나면 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민가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어차피 도망 나온 이상, 가까운 곳에서 오래 머무를 순 없었다. 최대한 멀리, 그리고 빠르게 도망치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하지만 푸르른 수풀들만 우거진 곳에는 차마 사람이 밟아 길이 났다고 부를 만한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았다. 정말로 인적 드문 곳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감각을 무시하며 앞으로 쭉쭉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기를 한참.

여전히 원하는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땔감으로 쓰기 위한 나무를 자른 흔적을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이 인적 하나 없는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의 숲속임을.

망했다.

여태까지 거부하며 제 머리 구석으로 꾹꾹 밀어 넣었던 생각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곳을 뛰쳐나온 호기는 좋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거기까지였다. 제 눈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내가 가야 할 이정표 따위는 없었다.

“어쩌지?”

조용하게 스스로에게 되묻는 말은 그저 바람을 타고 스산하게 퍼질 뿐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애처롭게 말을 건네어 본다고 한들 그 어디에서도 답해 주는 곳은 없었다. 정말 망했네. 그냥 거기서 피둥피둥 살이 찐다고 해도 그냥 있을 걸 그랬나.

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아무리 사람의 손이 거친 적 없는 숲속이라고 해도 큰 들짐승들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는 걸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터덜터덜 힘없이 걸었다. 발이 아픈 건 아니었지만 이 자신만만한 체력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 살짝 걱정되고 있었다. 다만 다행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한동안 배고파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하아.”

무작정 옮기는 발걸음은 신체가 아닌 정신을 지치게 만들었다. 적어도 이 숲속을 벗어나고자 마음먹었던 생각은 점점 흐릿하게 변질되었다.

참 어마어마하네, 정말. 아직 저번 생에서도 제 목숨까지 살지도 못했는데 지금 역시 이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다이나믹했다.

이런 자신의 생을 한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쩜 이렇게도 운이 지지리도 없는지. 궁상맞아도 이렇게 궁상맞은 인생은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아사의 위험에서 감금, 납치, 칼빵, 하다하다 비만의 위험까지. 제가 여태까지 겪은 것들을 나열하자 스스로도 자신을 위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쌍한 나. 어쩌다 탯줄을 잘못 잡아서 이렇게 위험한 삶을 살고 있는 거니. 전생이 거지 같았으면 적어도 이번 생은 천수를 누리며 편하게 살아야지. 이게 무슨 꼴이래.

한숨을 푹 내쉬며 앞을 가리고 있는 나뭇가지를 치워 내었다. 눈앞에 드리워져 저를 방해하던 것들이 치워지자 제 눈앞을 가득 채우는 푸른 물결이 시야에 가득 담기었다.

“……와아.”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은연중에 깨끗하다, 라는 단어를 담을 법한 호수가 햇살을 담은 채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잠시 눈을 반짝이다가도 이내 표정을 실룩였다.

아무리 예쁘면 뭐 해. 주변에 사람이 없는걸. 여전히 주변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있었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자 한숨을 내쉬었다. 내 팔자가 아무리 기구하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없을 줄이야.

이쯤 되면 그때 그 문지기를 꾀어서 사랑의 도피라도 해야 했던 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아차 싶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럴 거였다면 이렇게까지 스케일 크게 일을 벌이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나마 호수 근처라 그런지 다른 곳들과는 달리 비교적 평평한 평지가 유지되고 있었다. 주위를 더 둘러볼 것도 없다고 생각된 나는 호수 근처에 세워진 돌에 다가가 기대어 앉았다.

“이제 어쩌지…….”

자신이 생각해도 대책 없이 일을 벌인 것에 대한 끝장판이었다. 바깥에 소리가 들리지 않아 한적한 곳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사람이 없는 황량한 곳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아.”

한숨밖에 나오질 않았다. 위치선정 한 번 죽여주네, 정말. 분명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쟁터 한 가운데임은 틀림없었는데 어째서 이곳에 자신이 위치하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테이젤, 이 자식. 설마 공식적으로 자신의 것임을 선포하기 위해 자기네 나라로 날 납치한 거 아냐?

그 티 없는 미소 속에 감추어진 음흉한 생각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에드아르가 씩씩대며 올 만도 했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모든 것들이 퍼즐 맞추듯 하나둘씩 짜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원흉은 테이젤 그 자식 때문이지?”

주먹을 불끈 쥐며 원망의 대상을 향해 들릴 리 없는 소원함을 말하며 분을 삭이고 있을 때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귀를 쫑긋거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그걸 놓칠 리 없었다. 산짐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희망을 가져서 나쁠 건 없었다.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서자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한층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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