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그가 나가자마자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옷은 또 언제 내린 것인지 가슴께까지 훤하게 드러나 있는 옷을 추스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흐, 또 살찔 뻔했네.”
정말 위험천만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다량의 정기를 흡입하면 살이 찐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상, 이곳에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긴 필요 이상으로 밥을 너무 많이 먹이고 있었다.
사실 배부른 감각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이 몸으로 난생처음 겪는 포화감이 어색해서 초반엔 몸서리쳤지만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이어지는 포만감은 제 몸을 익숙하게 만들었다.
때로는 본능을 강하게 이끌기도, 때로는 마약처럼 자신의 몸을 애끓게 만들어 쪽쪽 빨아들이는 것이 있었다. 그랬기에 내게 먹히고자 안달이 난 밥들을 그저 내버려 둔 것이었는데. 살이 찐다니. 내가 살이 찐다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게 먹히기 위해 안달이 났던 테이젤을 생각했다. 애처롭게 쳐다보는 그의 눈에 번번이 마음이 약해져 그를 받아들였던 지난날들을 생각한다면 결국 또 식사를 할 게 분명했다.
결국 원치 않는 잦은 식사로 인해 살이 찔 게 분명했고, 그렇게 된다면 제 유일한 강점이자 밥들을 끌기 위한 수단이었던 외모 또한 빛이 바래며 사라질 것이 틀림없었다.
“안 돼!”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배고픔이 얼마나 힘든 일임을 이미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이상 그 일을 두 번 다시 겪을 수는 없었다.
시선을 내려 제 팔과 배를 잡았다. 예전이라면 절대로 잡히지 않는 군더더기가 제 손에 미약하게나마 잡히고 있었다. 이 살들이 운동으로 빠질 살인지 알 수 없었다.
섹스처럼 격렬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살이 빠지기는커녕, 더욱 찌는 걸 보면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기도 하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더 이상은 이렇게 제 몸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여태껏 자신에게 잘 대해 준 테이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곳은 제 몸을 지키기엔 너무나도 위험한 곳이었다.
더군다나 에드아르까지. 그들의 육탄공세에 제 몸은 제대로 버티지도 못하고 무너질 것이 뻔했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아무래도 단식투쟁을 위해 이 편하면서도 불편한 곳에서 벗어날 때가 온 것 같았다.
잠옷 바람으로 나갈 순 없어 옷장을 뒤졌다. 다행히 내 옷들은 다 잘 챙겨 두었는지 자신이 처음 입었던 옷까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에드아르 쪽에서 놓고 왔을 것이 분명한 짐까지 말끔하게 정리되어 한편에 보관되어 있자 재빠르게 챙겨 들었다. 탈출 준비라고는 하지만 챙길 것은 별로 없었다. 가볍게 준비를 끝마치고 나자 제 행색은 처음 나왔을 때와 같은 행세가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다른 무언가를 챙겨가려고 해도, 주변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저번 생까지 통틀어 서바이벌 능력을 뽐내려고 해도 방 안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은 철저하게 섬겨질 이를 위해서만 마련되어 있었다. 사용인이 가져다주지 않으면 이 넓은 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철저하게 휴식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은 조금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었던 거지?
아, 계속 밥 먹는 거 아니면 자고 있었구나.
방 안을 탐색하는 것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맨발은 매끈한 대리석 위를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끼익.
조심스레 문을 열며 재빠르게 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지키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바깥엔 사람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 흔한 고용인이나 경호원조차 보이질 않자 문을 완전히 젖혔다.
“뭐야, 아무도 없어?”
혹시나 모를 마음에 애써 큰 목소리로 말을 내보았지만, 내 말에 반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딘지는 몰라도 너무나도 적막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눈떠서 오늘까지 테이젤과 에드아르, 그리고 테이젤의 신하 빼고는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긴 도대체 어디인 거지?
그 꼼꼼한 테이젤이 경비를 세워 둔다면 허술하게 둘 리 없었다. 애초에 경비원은 두는 것으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걸까. 머릿속에 잡생각이 많이 떠오르던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탈출할 곳. 제가 쓸데없이 걱정한다고 해서 말할 곳은 어디에도 없을 터였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바깥을 향해 발을 뻗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테이젤이 몸을 돌렸던 방향과는 정 반대쪽인 복도를 향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어디가 문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걸음을 내지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디든 1층이 탈출구일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일 터였다.
제가 발을 놓는 곳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어제 에드아르가 기묘하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던 것이 그제야 이해될 것 같았다.
술술 진행되는 방향에 기분마저 좋아질 것 같았다. 오랜만에 제 발로 걷는 땅의 느낌이라 더더욱 그런 걸지도 몰랐다. 여태껏 발이 땅에 붙어 있던 것보다 밥 먹느라 공중에서 둥둥 떠 있을 때가 더 많았던 착각마저 들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하지만 즐거운 기분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드디어 정문으로 보이는 마지막 고비에 도달한 동시에 나는 테이젤 말고 다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의 동물적인 반사 신경으로 몸을 운신해 기둥 뒤로 숨은 나는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문 쪽을 향해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발각되지 않은 것인지 그들은 아까와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후우.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도 잠시, 사방을 둘러보아도 정문 외엔 달리 갈 수 있는 루트가 발견되지 않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왕 다른 종족으로 변하는 거, 좀 좋은 능력 주면 어디 덧나? 남자의 정기나 빨아 먹는 능력 말고 거미줄을 뿜거나 커졌다 작아졌다 제멋대로 신체가 늘어나는 능력이라도 주셨어야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아무리 자신이 보통 인간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여자의 몸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장정 두 명을 상대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몰랐다.
잠깐, 장정 두 명?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문을 향해 바라보았다. 문 쪽에는 튼튼해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문을 따분한 표정으로 허술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의 성별이 남자임을 두 눈 똑똑히 아로새기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쩔 수 없나. 자신에게 있는 유일한 능력. 그 능력을 쓰고 싶지 않았기에 탈출을 감행하는 것이었건만, 결국 탈출하는 데에 있어서 쓰이는 것이 자신의 능력이자 왠지 모르게 힘이 쭉 빠졌다.
살찔 텐데. 잠시간의 생각이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했지만 재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다잡았다.
이는 그저 잠시 잠깐의 시간이 될 터였다. 엄마가 가르쳐 주었던 갖은 유혹의 방법을 떠올리며 제 목을 꽉 채웠던 단추를 하나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천천히 벌어지는 옷 틈 사이로 제 뽀얀 목이 유려한 선을 들어내고 깊게 파인 가슴골을 겨우 아슬아슬 보이게 만들자 단추를 푸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가. 언제가 네가 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단다.’
남자들을 유혹해도 자신이 좋아서 먹는 것임을 절대 잊지 말라던 엄마의 신신당부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제아무리 유혹을 하는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각자 사람마다의 취향이 있겠지만 무작정 온몸을 드러내고 달려드는 것보단 은밀하게 드러내고 유혹하는 것이 말도, 그리고 발정하는 것도 쉽다고 했었다. 그래 봤자 여태까지 사건에 휘둘리는 탓에 제대로 한 번 써 본 적 없었지만 말이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물도 들고 올 걸 그랬나.
제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생각했다가 이내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실험은 그때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았던가. 제 마음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건 쓰지 않는 것이 나았다.
만에 하나 잘못 사용해서 발정 난 이들을 제어할 수 없을 때 벌어질 일들을 슬쩍 상상했다가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가방에 넣어 두었던 신발까지 꺼내서 신자 차림새는 완벽해졌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 난 천천히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저기…….”
“비, 비시아 님?”
응? 날 아네? 예상외는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눈을 와락 찡그렸다. 날 안다면 일은 쉬워진다. 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기세로 눈가에 방울방울 맺히며 인상을 찡그렸다.
“도, 도와주세요……!”
“무슨 일입니까!”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내가 눈물을 보이자 재빠르게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 없이 걸어올 때의 의심은 어디로 가고, 그들은 철저하게 속아 허둥대기 시작했다.
“괴, 괴한이……!”
“괴한이요?”
“네! 괴한이 제 방에 들어와서…….”
“비시아 님 방에 들어왔다고요?”
아 정말. 그렇다니까. 자꾸 내 말을 끊는 그의 말에 살짝 흘겼다가 재빠르게 눈물 한 방울을 억지로 흘려내었다.
“네! 너무 놀라서…… 사람을 찾는데 아무도 없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런……. 걱정 마십시오. 그 사람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눈빛을 주고받더니 이내 한 명이 재빠르게 내가 왔던 쪽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어라 둘 다 안 가?
“……당신은요?”
“저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비시아 님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불필요한 친절이다. 그의 말에 입을 삐죽였다. 전혀 필요 없는데. 둘이서 같이 사라져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미리 생각해 두었던 것도 안 할 수 있었을 텐데.
힐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방의 정황을 살피러 간 이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난 뒤에서야 나는 은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촉촉한 눈가는 남아 있었지만 그 모습이 되려 지금 눈앞에 있는 이를 공략하는데 플러스 효과를 줄 터였다.
“저 알아요?”
은근하게 물어오는 말에 그는 순진무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요. 유명하신 분인걸요.”
“어머, 제가 유명해요?”
“물론이죠.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나서 비시아 님 하면 폐하의 정부……헙.”
아하. 이런 쪽으로. 내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뒤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입을 눌러 막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제아무리 뒤늦게 입을 눌러 막아도 터진 발언은 다시 수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 그런 소문이 돌 것 같긴 했지만……. 막상 두 귀로 직접 들으니 여간 착잡한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정부라……. 타인의 눈엔 갑자기 나타난 신원불명의 여자가 폐하를 꿰차고 앉았으니 그런 말을 내뱉을 만도 했다.
“……정부요.”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다른 말도 있는데! 폐하의 정인에게 제가 무슨 말실수를!”
계속해서 자신의 잘못만을 되풀이하듯 말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그를 바라보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숙한 데다가 순진하기까지. 잘 굴려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렇지만……!”
그를 향해 허리를 숙여 그를 아래에서 올려다보았다. 부러 고개를 숙인 탓이 단추를 끌러낸 곳에서 가슴골이 보이자 그의 시선이 힐끔 닿았다.
걸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