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으으, 왜 이렇게 무거워. 제 눈꺼풀을 찌르는 햇살이 따사로워 흐릿했던 정신도 어느새 또렷하게 자각이 되었지만 몸만큼은 아니었다. 여전히 눈 하나 깜빡일 수 없는 채로 이불의 부드러운 감각만을 느낄 뿐이었다.
마치 이불이 자의를 가져 자신을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제 몸을 빨아 당기는 느낌은 아무리 질 좋은 천의 재질이라고 한들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무겁다고 여기는 건 자신의 몸뿐만이 아니었다. 제 몸을 은근하게 누르는 무게 또한 한 몫 단단히 하고 있었다.
자고 있는 저에게 곧장 해를 가하지 않는 이의 행동에 무서울 것은 없었으나 귀찮았다. 아직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는데 제게 정기를 먹이고 있는 것 또한 이유 중 하나였다.
눈 뜨자마자 밥이 입으로 절로 떠먹여진다는 건 이런 느낌인가요. 이맛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그리 편한 느낌은 아니었다.
뭐지? 전날 아무리 피곤하고 괴로운 날을 보냈다고 해도 자고 난 다음 날이면 멀쩡해지던 제 몸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과식을 해서 정신을 잃었던 것을 제외하면…….
과식!
그제야 제 눈이 번쩍 뜨였다. 자기 전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비단 한 사람뿐만 아니라 연달아 계속했던 것을 생각하자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깜짝 놀라 눈을 뜨자 마침 제게 끊임없이 정기를 주입하던 이의 입술이 막 볼에 닿던 차였다. 놀라 눈을 깜빡이자 그가 입술을 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잘 잤어요, 비시아?”
잘 잤냐고? 너희들이 하도 달려드는데 잘 잘 수가 있겠니? 하지만 거먼 속마음과는 달리 제 얼굴은 순진하게 위아래로 주억거려졌다. 그대로 뻗어서 바닥난 휴식을 취하느라 그가 오는 것도 제대로 못 봤으니 조금 미안해졌달까.
순순히 끄덕이는 내 고갯짓에 테이젤의 얼굴이 환해졌다.
“마치고 돌아와 제가 불러도 못 일어나시더군요.”
불렀어? 제 기억을 샅샅이 훑어도 그가 부른 기억은 전혀 나질 않았다. 이 몸이 되면서 잠귀가 예민해져 있었는데, 저를 부르는 소리도 못들을 줄이야. 자신이 얼마나 피곤했는지 다시 한 번 더 복습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가 얼마나 거칠게 안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미안해서 깨우질 못했기도 했지만요.”
테이젤이 내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내 노고를 알아주는 밥의 기특한 마음에 순순히 따라 같이 미소를 지어 줬다.
괜찮아. 비단 너 때문만은 아니거든.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 넣은 에드아르의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붕붕 저으며 지워 버렸다.
“이 어여쁜 눈동자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제 외모가 워낙 예뻐서 아침부터 찬양하는 그의 말에 무관심하게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저도 처음 거울을 봤을 땐 이게 제 얼굴이 맞나 볼 때마다 놀라곤 했으니, 이제 겨우 자신의 얼굴을 보는 테이젤이 적응 못 하는 것도 이해되었다.
이럴 때만큼은 참 이 종족으로 태어났다는 생각이 잘 드는데 말이야. 식사가 힘든 것 뺀다면.
“테이젤은 잘 잤어요?”
제 눈꺼풀 위에 입 맞추는 그에게서 살짝 등을 빼며 말했다. 더 이상의 정기 주입은 사양하고 싶었다.
“푹 숙면을 취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이 언제 또 눈만 감은 채 안 뜰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저요?”
“네. 비시아, 당신이요.”
테이젤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웬만한 인간들보다 신체 능력치가 뛰어난 자신이 쉽게 쓰러질 리 없었다.
아. 물론 그 사건은 논외고.
“아무래도 잘 먹여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험한 일을 당하면서 몸이 허약해진 것이 틀림없어요.”
맛난 거? 맛난 거라면 대환영이지! 그의 말에 반색하며 얼굴을 환하게 들어 올리자 그의 미소가 은근하게 깊어졌다.
“물론 저와 밤을 같이 지내기 위해서라도 말이지만요.”
그의 말에 이유 모를 오싹함이 제 몸을 빠르게 훑었다. 또 먹히려고? 아무래도 이 밥은 날 너무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분명 추운 날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몸에 오한이 들자 제 몸을 감싸기 위해 팔을 재빠르게 들어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응?
제 팔을 감싸는 손의 감각이 이상했다. 비단 제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 자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닿는 피부가 여느 때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뭐지? 제 팔을 껴안듯 옭아매어 보았지만 미묘함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쓰다듬은 제 팔 아랜 비단결같이 고운 피부만이 느껴질 뿐이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뭔가, 뭔가가 이상했다. 좀 더 미묘하고 좀 더 복잡한, 알 수 없는 무거움이 느껴졌다.
‘무거워? 내 팔이?’
순간적으로 제가 생각해 놓고도 이해할 수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제 종족이 살찐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우리 종족은 먹는 기준부터 다르지 않았던가. 여태까지 커 오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심지어 마음껏 먹어도 이렇게 호리호리한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정기를 취하지 않는 이상 허기짐이 사라지지 않는 독특한 신체구조 때문에 초반에 자신이 얼마나 힘들어했던가. 물론 지금은 밥들이 스스로 떠먹여 달라 난리도 아니지만.
손을 내려 제 몸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균형 잡힌 몸매임은 분명했지만 이 불쾌한 기분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이 몸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감각. 이 느낌은…….
“나 살쪘어……?”
충격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쉽게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미묘한 감각이 제게 경악을 안겨다 주고 있었다.
기겁하며 눈을 아래로 내렸다. 제 손에 만져지는 것은 탄탄한 피부가 아닌 야들야들해져 말랑해진 피부였다.
미친. 저도 모르게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르는 욕지거리를 간신히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밥을 많이 먹었다고 한들 살이 찌다니요.
아니, 원래 그게 맞긴 하지만 내가 처먹은 건 남자의 정기인데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비시아?”
경악스러워 새파랗게 질린 제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 것인지 테이젤이 다시 한 번 더 뺨에 잔 입맞춤을 했다. 으악, 밥! 그의 행동에 기겁하며 나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테, 테이젤!”
“왜 그럽니까. 비시아?”
“그, 그게…….”
의아한 듯이 바라보는 테이젤을 향해 느닷없이 우리 섹스하지 말아요. 나 금식 기간이야. 라고 말하는 미친년이 될 수는 없었다.
지금 와서 뒤늦게 상황을 토로하고자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우리 종족에 대해 설명을 한다고 한들, 섹스와 정기로 인해 살이 쪘다는 또 어떻게 납득시킬 수가 있는 건지. 이해는커녕 그가 오해하지 않게 애를 써야 할 그 먼 미래들이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계속 내가 어물쩡거리며 대답하길 회피하자 테이젤의 은근한 눈빛이 닿았다.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그의 말에 갑작스러운 희망이 들어 재빠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를 사랑하는 밥이 드디어 속마음마저 간파해 버린 것일까. 아니면 표정? 어디든 희망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의 말에 감격하며 굳혔던 표정을 간신히 피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상냥하게 하겠습니다.”
엥? 그의 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사이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깊숙이 들어가는 혀 대신 가볍게 맞추는 입술이 촉촉하게 닿았다, 떨어졌다.
“당신의 몸이 너무 달콤해 어제도 정신을 놓고 거칠게 당신을 탐한 저라 믿기 힘드실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절대로 그러지 않겠습니다. 약속드릴 수 있어요.”
아니 그만 좀 먹이라고. 이렇게까지 열성적인 밥은 또 처음이었다. 무슨 얼굴만 보면 먹히려고 난리를 쳐 정말. 이렇게까지 하면 자신의 기운이 빠진다는 것 또한 은연중에 느낄 텐데.
어찌 되었든 이 남자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게 아니라 테이젤. 우리 조금만 시간을 들였다가…….”
“조금만, 아주 조금만요.”
하지만 이미 단단히도 자기 생각에 빠져 버린 그의 생각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해도 봐주지 않겠다는 듯 그 또한 강인하게 굴었다.
거기다가 제 행동이 미지근한 것도 있었다. 정기가 들어와 제 몸을 채운다는 사실만 빼면, 이 감각은 평소 연인들이 나누는 사랑과 똑같았다.
나를 향해 사랑스러움과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행동을 하는 그를 냉철하게 거절할 정도로 싫은 건 아니었다. 사실, 살찐다는 사실만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면 나는 또 못 이기는 척 넘어갔을 것이 분명했다.
생각하느라 잠시간 가만히 있자 테이젤이 미소를 지었다. 무언의 허락이라고도 생각하는 걸까 그가 내 입술을 부드럽게 덮더니 이내 볼을 상냥하게 감싸 쥐었다.
“사랑해요.”
이렇게 자신을 좋아해 달라고 있는 애교 없는 애교를 잔뜩 부려가며 꼬리를 흔드는데 그 누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그 또한 상당히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이였다.
만약 내가 에드아르를 먼저 발견하지 못했으면 그를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볼을 감싼 손이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목을 쓰다듬다 자연스레 어깨를 향하자 천천히 눈을 떴다. 에메랄드를 닮은 눈에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이 반사되자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 수 있었다.
안 돼! 그의 페이스에 말려 또다시 일을 치를 것 같은 상황에 도달하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늘어날 제 살을 위해서라도 강하게 마음을 먹어 그에게 확실하게 제 의사를 전하고자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기침하셨습니까, 폐하.”
구세주!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어제와 같은 목소리가 이번엔 들어오지 않고 조용히 바깥에서 울리자 테이젤의 행동이 멈추었다.
“또…….”
테이젤은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고 내 목에서 중얼거렸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이 상황을 방해받는 것 자체가 짜증 나는 것인지 내 어깨를 잡은 그의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래. 무슨 일이지?”
겨우 내 목에서 얼굴을 뗀 테이젤이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전 업무를 보셔야 할 시각입니다.”
“내가 한동안 오전 업무는 보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하지만 어제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고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언제나 정론으로 치고 들어오던 테이젤의 입에서 이번만큼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제부로 정계가 완전히 마비된 상태입니다. 오늘 오전까지 폐하가 내버려 두신다면 마비가 되는 건 정계만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아.”
간곡히 말하는 이의 말에 테이젤은 내게 기울였던 몸까지 완전히 일으켰다. 어제와 같은 패턴이 그렇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그의 얼굴엔 잔뜩 주름이 진 상태였다.
덕분에 이틀 연달아 그의 화난 모습을 보게 된 나는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내 탓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같이 죄를 짓고 있는 기분이었다.
“미안해요.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갑작스레 자리를 일어나야 해서 당신에게 고갤 들 면목이 없군요.”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아무리 그래도 테이젤의 업무 또한 중요하니까요.”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는 내 이마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며 은근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녀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해요?”
“그럴게요.”
알았으니 제발 나가 주면 안 될까? 그는 내 대답을 들어도 미련이 남는지 계속 미적거리며 날 바라보다 다시 한 번 더 두들기는 노크를 듣고서야 발을 옮겼다. 달칵. 문고리가 완전히 맞물려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살았다!
아, 아니. 살찌는 걸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