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무슨 일이지? 이런 곳까지 들어오다니 제정신인가?”
그는 자신의 몸으로 날 감싸 안아 최대한 보이지 않게 등지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잔뜩 얼어붙은 공기가 느껴졌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화났는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테이젤이 화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죽음을 자초하기라도 하듯이 들어온 이가 궁금해져 그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올렸다.
들어 올린 시선 속에서 테이젤의 강렬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서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급한 일입니다.”
“급한 일? 웬만한 일은 내가 다 처리하고 왔을 텐데.”
마치 급한 일이 아닐 시엔 죽이겠다, 라는 말이 담긴 그의 언사에 그는 꿋꿋하게 그를 향해 입을 벌렸다.
“그가 찾아왔습니다.”
그를 강조하는 말에 테이젤의 몸이 살짝 굳었다. 그가 반응하는 것을 보자 여태까지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던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옷과 수건을 내밀었다.
“……하아.”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 위에 수건을 덮어 주었다. 어라, 네 몸 닦으라고 줬을 텐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테이젤이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미안합니다. 이대로 당신을 정성 들여 씻겨 다시 침대로 데려다주고 싶었는데 상황이 도통 따라 주질 않는군요.”
뭐라고? 그의 말에 새파랗게 얼굴이 질려 고개를 저었다. 씻는 게 안 될 텐데……. 애초에 이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였는데. 아까 그렇게 하고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거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따뜻한 물을 다시 받아 피로를 푸시는 걸 추천합니다. 절 받아내시느라 힘드셨을 테니까요.”
보는 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낯부끄럽지도 않은 것인지 외설적인 말을 그대로 뱉는 그의 말에 입을 떡하니 벌렸다. 아무리 네 권한이라도 그렇지. 안 부끄럽니?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요. 그동안 푹 쉬시길. 나의 비시아.”
그는 내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춘 후 물보라를 일으키며 자신의 몸을 빼내었다. 아무렇지 않게 옷을 걸치고 사라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욕실 문이 닫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살았다…….”
지금 심정을 대변할 수 있는 건 저 단어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살았다. 이번에 또 먹는다면 그대로 밀친 채 탈출이라도 강행할 뻔했다. 벽에 기대었던 몸을 그대로 미끄러트리자 찰랑이는 물이 가슴께까지 닿았다.
“하아.”
여태까지 그의 몸을 받아내느라 긴장했던 신경들이 따스한 물에 닿아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잇새를 비집고 나오는 탄식의 소리에 절로 미소가 풀어졌다.
갑작스런 이의 등장에 깜짝 놀랐던 것과, 제 알몸을 다른 이에게 보였다는 사실이 살짝 수치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론 다 잘된 일이 아닌가. 지금 여유롭게 물속을 노니고 있는 것 또한 어찌 보면 그의 등장 덕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몸을 푹 담그고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나는 두 다리 쭉 뻗으며 본격적으로 목욕을 즐기기 시작했다. 찰랑거리며 움직이는 물결이 뭉쳤던 제 몸을 풀어 주는 것 같아 한껏 기대는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벌써? 시간이 걸린다고 했던 테이젤의 말과는 달리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직 나간 지 삼십 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깜짝 놀라 머리를 들자 그곳에 있는 건 테이젤이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그였다면 다행이었을까. 나는 놀란 눈을 주체하지 못하고 천천히 입을 벌렸다.
“……에드……아르.”
망했다……. 굳게 닫힌 입매는 평소보다 더욱 하향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딜 보아도 그가 화가 나 있음을 명백히 알려 주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왜? 우리는 지금 막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어?
“매일 밤 그가 너를 취하던가?”
“네?”
다짜고짜 와서 물어보는 것이 저런 말이라니.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 눈을 끔뻑이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네…….”
테이젤이 날 취했던 건 맞는 사실이니 부정할 이윤 없었다. 매일 밤은 아니었지만 눈 뜨자마자 취한 건 사실이니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정답이 아니었던 것인지 그의 얼굴이 더욱 매섭게 일그러졌다.
“즐거웠나?”
“네?”
“매일 밤 그의 품에 안겨 섹스하는 것이 즐거웠냐고.”
태연스럽게 섹스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그의 말에 황당해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고요?”
“나는…… 너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이 전쟁을 끝냈다.”
엥? 갑작스러운 그의 고백에 몸을 경직시켰다. 그, 그랬니……?
“애초에 너 따위에게 마음을 빼앗겼을 리 없었다. 포로 신세였을 때의 너를 보면서도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이라고만 느꼈었지.”
너 따위라뇨. 듣는 당사자가 앞에 있는데 말이 좀 심하신데요. 그의 말에 살짝 눈을 찌푸리는 날 보고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랬기에 너를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 작자가 어처구니없었어. 여자……. 아니, 비시아 너를 가지기 위해 안달하는 것도 그랬고. 그래서 난 그에게 무리한 조건을 걸며 데려가라고 했어.”
“그런데 왜 지금 여기에…….”
“빌어먹을. 네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그는 거칠게 말하며 날 노려보았다.
“도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네?”
무슨 짓이라뇨……. 저는 밥을 먹지 못해 그저 한 끼라도 먹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 외엔 한 것도 없는데요. 그의 말마따나 그들의 눈엔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이로 보였을 것이다. 그뿐이었을 텐데.
“네가 없어진 이후로 자꾸만 네가 머릿속에서 떠올라. 눈을 감아도 생각이 나고. 식은 음식을 볼 때도 먹지 않는다던 네가 생각나.”
그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왜 그렇게까지 날 생각하는 거지? 혹시 밥을 주지 않던 게 그렇게 찔렸어?
“여자 따위에게 마음을 빼앗길 리가 없는데, 그럴 리 없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 어어……?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 젖은 수건으로 앞섶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물에 풀어진 몸은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딴 자식한테 안기고 난 뒤의 널 보니 참을 수가 없어.”
“에드아르?”
“인정하기 싫었는데.”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날 바라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짙게 물든 눈동자가 날 향하고 있었다.
“널 좋아해.”
뭐? 그의 말에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널 그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아. 특히 그 자식에겐 더더욱.”
“하지만,”
이미 줬다며. 어쩔 건데?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미 테이젤과 함께 하기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내 몸이니 둘이서 정한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말이다.
이제 와서 선택을 번복하는 그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고개를 갸웃거려질 뿐이었다. 내겐 그저 양식과 이 양식이 서로 내 입에 들어가겠다고 싸움하는 것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 치열한 싸움이 꽤나 오래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지금도 그래. 널 원하고 있어.”
“어?”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호흡이 불규칙하게 느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멍청하게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가 여기서 그 자식과 무얼 했는지 알아.”
“에드, 읍.”
기어코 이번 밥이 다른 밥이 없는 틈을 타 내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난폭하게 들어오는 혀에 몸을 떨었다. 잠깐, 나 지금 정말 배부른데……!
“들어오자마자 냄새와 널 보고 깨달았다. 미칠 듯이 화가 났는데도 무방비로 있는 널 보고 욕정 하는 나 자신을 보며 비로소 깨달았지.”
“뭘 깨달았는지 몰라도, 나는…….”
힘들어, 힘들다고! 지금 이 이상 배를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재빠르게 말을 하려다가도 그가 말하지 말라는 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행동에 자연스레 행동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다 지울 것이다. 네 몸에 남은 흔적 어느 곳 하나 빠짐없이 다.”
뭘.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지만 두려워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자신의 목을 단단히 채웠던 단추를 풀었다.
“비시아. 내 것이 되어라.”
젠장.
밥들에겐 도대체 내 의사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정중하게 묻고 싶어질 정도였다. 손으로 떠먹지 않아도 알아서 들어온다는 기세는 어여쁘게 여기는 것이 마땅했으나 너무 잦았다. 심하게.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외치는 것만 못한 문구가 순간적으로 떠올랐지만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직, 아직 그의 눈이 완전히 나간 것은 아니었다.
“에, 에드아르! 잠깐만요.”
욕조의 따스한 물에 담갔던 제 몸과는 달리 서늘한 손이 닿자 깜짝 놀라 움츠렸지만 애써 그를 향해 재빠르게 말했다. 여전히 잠긴 목이 꾀꼬리 같던 목소리를 돌려내긴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의사전달은 가능하게 해 주었다.
“잠깐, 잠깐만요! 당신과 함께할 수 있다면 저는 언제라도 괜찮아요. 하지만 당신은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가 아닌가요?”
“……그래.”
그는 내 말에 순순히 반응을 보였다. 혼탁한 그의 눈이 점점 내 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안 돼! 이곳에서 다시 일을 치렀다간 테이젤과 같은 꼴이 날 것이 분명했다. 왜인지 몰라도 전과 달리 물에 몸을 푹 담가도 바로 이성을 잃지 않는 것이 이상했지만,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당신이 걱정돼요.”
“뭐?”
갑작스러운 내 말에 그가 놀란 듯이 입을 벌렸다.
“여기 있어선 안 되는 존재라면서요. 그럼 발각되는 순간, 저보다는 당연히 당신의 위험해진다는 거 아닌가요? 싫어요, 그런 거. 당신이 안전했으면 좋겠어요.”
최대한 이곳에서 하기 싫다는 말에 이유를 붙이기 위해 되지도 않는 말을 했다. 밥의 안위를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웃겼지만 당장 그를 속아 넘기는 것이 중요했다.
통했나……?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간신히 펴졌던 그의 미간이 다시 와락 흐트러졌다. 헉! 아, 아닌가?
“너는 도대체…….”
“네, 네?”
“왜 억지로 취하겠다는 이 상황마저 남 생각을 하는 거지? 이렇게까지 미련스럽게 착한 여자는 또 처음이군.”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잔뜩 찡그려진 표정부터 한숨까지. 얼굴은 그가 화났음을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었지만 나를 쓰다듬는 그의 행동에선 어쩐지 친절함이 묻어 나왔다.
착하기는 개뿔이.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그의 말에 입을 벌렸다. 나 살고자 하는 말이었는데 저 알아서 좋게 받아들이는 그가 신기할 뿐이다. 억지스런 말을 그렇게까지 이해해 줄 줄이야…….
독해력이 강한 건지. 망상력이 강한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