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그는 내가 눈길을 주기도 전에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길에 부담스러워 입을 뻐끔거리자 그는 눈을 천천히 한 번 깜빡였다. 마치 날 의식하듯이 하는 행동에 고개를 재빠르게 모로 돌리자 쿵쾅거리는 심장이 목까지 전달된 느낌이었다.
날 봤던 게 맞겠지? 확실했지? 마치 봐선 안 될 것을 보다 들킨 아이처럼 심장의 쿵쾅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도대체 왜 날 보았지? 언제부터 보았을까? 그리고 왜 난 못 느꼈던 거지?
“그럼 휴전의 의미로 저 여자를 데려오면 좋겠군.”
고개를 돌려 이상하게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사이, 갑작스럽게 귀를 꿰뚫는 말에 저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원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모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워하는 이들이 날 가지려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재빠르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에드아르의 진영 측 사람들도 있는 걸 보아 아무래도 그는 그의 사람들에게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던 것 같았다.
테이젤의 입술이 틀어지더니 가볍게 책상을 치며 재빠르게 반박했다.
“무슨 말씀이시죠? 비시아는 당신에게 넘겨주지 않을 겁니다.”
“웬 생뚱맞은 소린지. 우린 단지 서로의 협약을 지속하기 위해 볼모를 필요로 한다는 것뿐이다.”
“…….”
그의 입술이 맞물렸다. 묘한 승부감을 느낀 에드아르가 맘껏 그를 비웃었다.
“아, 자네도 고르면 좋겠군. 여기에 있는 이들 중 한 명으로 해도 좋아. 단, 우리 측에서 원하는 건 저 여자뿐이다.”
“아집에 빠져 계시는군요.”
내 손을 꽉 잡으며 넌더리 난다는 듯이 말하자 반대편에 앉아 있는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당차게 응수했다. 나는 기분이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마음대로 생각하는 건 좋은 투정에 불과할 뿐이지.”
“이곳에 있는 이들 중 한 명으로 해도 좋다고 하셨나요? 좋습니다. 그럼 저도 비시아로 하죠.”
결국 아까와 같은 사태가 다시 반복되기 시작하고 회의장은 혼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 밥들이 정말. 어느 순간이면 내 의견을 물어볼까 싶어 기다리고 있었건만 끝까지 내 의견을 묻지 않는 그들의 행동에 나 또한 절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엄마. 날 왜 이렇게 예쁘게 낳아서 이런 말 같지도 않은 혼란을 겪게 하나요. 전 그저 제 말을 잘 듣는 힘 세고 밤일 잘하는 머슴 한 명이면 충분하단 말이에요! 잘생기면 좀 더 좋지만!
“비시아!”
“여…… 비시아!”
“네?”
갑자기 날 크게 부르는 두 사람의 행동에 놀란 내가 반문하듯 답하자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재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대답해 주십시오. 접니까, 저 사람 새끼입니까?”
“대답해. 나야. 저 새끼야.”
아니 내게 드디어 물어봐서 고맙긴 한데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면 어떻게 답을 하라고……? 문제의 오묘함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급인데.
재빠르게 답을 하지 못하자 식은땀을 한 방울 흘렸다. 하하……. 역시 또 죽는 게 나을까.
“……꼭, 두 사람 중 한 명을 골라야 하는 건가요?”
조심스럽게 그들을 향해 물었다. 그거 말고 다른 거 말하면 안 될까? 예를 들면 제3의 선택지인 둘 다 버리고 새 밥을 찾아 떠난다. 라던가…….
“네.”
“당연한 것을.”
두 남자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니, 이럴 때만 둘이서 호흡 더럽게 잘 맞네. 그런 단합심으로 그냥 사이좋게 호호 하하 체결하면 안 돼? 꼭 그런 볼모가 필요하냐고.
나는 그들의 강렬한 시선에 미간을 찌푸렸다. 죽고 싶다. 치킨이라도 뜯으면서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싶어져.
괜스레 내가 결정하게 해서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한참을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다 어정쩡하게 말을 떼어 내 보았다.
“그래도 한낱 여자일 뿐인 제가 이 외교정치의 수단이 되는 건 너무 수지가 안 맞는 것 같아요. 왜 되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겠고요.”
“몰라서 묻는 건가?”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까?”
왁. 깜짝이야. 내 말에 둘은 동시에 재빠르게 내게 말했다. 재빠르게 돌아오는 대답에 멍하게 그 둘을 번갈아 보자 둘은 다시 한번 더 입술을 떼었다.
“널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에드아르는 여전히 강렬한 눈동자로 확실하게 답했다. 테이젤은 어딘가 모를 처연한 표정으로 내게 속삭였다. 강렬하게 날 원한다는,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 자신에 꽉 찬 목소리를 듣자 어딘가 한구석이 답답해져 오는 느낌이 들었다.
끝까지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하는 그들의 태도에 화가 난 것일지도 몰랐다. 밥을 먹기 위해 그들의 곁에 있었던 것이지, 그들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당혹스러움은 배가 되어갔다. 좋아하지도 않는 이에게 급작스러운 고백을 들어 버리자, 목구멍까지 종이가 가득 차 꽉 막힌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텐데, 가득 들뜬 상대방의 기분에 더더욱 말을 못 했던 예전 기억이 문득 떠오르자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털며 입술을 열었다. 그들에게 이런 감정을 얻고자 있었던 것이 결연코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막힌 입을 겨우 떼려고 할 때 선수 치는 이가 있었다. 행동 빠른 이는 내 어깨를 가볍게 짓누르며 자신의 품 안으로 당겼다. 품 안에는 전쟁터라는 생각을 한순간에 잊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향이 은은하게 배어 나왔다.
“알아요. 비시아, 당신이 얼마나 혼란스러울지는.”
“테이젤…….”
“만약 제 옆에 있고 싶지 않다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안 됩니다.”
그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시더니 고개를 살짝 내려 날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확연함이 들어 있었다.
“당신을 악랄한 그에게 다시 돌려줄 순 없습니다. 비시아, 당신이 그에게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으음. 당신도 그닥 절 제대로 된 생각으로 데려왔던 건 아닌데요……? 어폐가 있는 그의 말에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너무 진지한 분위기에 손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여기서 먹이가 될 만한 말을 해서 내게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아, 한 명 있긴 하지. 눈을 슬쩍 돌렸다. 우릴 잡아 찢어 죽일 기세로 강렬하게 바라보고 있는 에드아르가 이 말을 하면 얼씨구나 하고 받아서 먹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까 전부터 누누이 말하지만 난 이 둘 누구에게도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어깨에 놓인 테이젤의 손을 떼어 내었다.
“그만 좀 하세요. 저는…….”
둘 다 관심 없고 그저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을 하려다가 문득 입술을 다물었다. 내 개인적인 감정을 너무 확실하게 전해서 잊고 있었는데 이곳은 많은 간부들이 있는 회의장이었다.
수십 쌍의 눈들이 관중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고, 어떤 말을 할지 모르는 입술과 혀가 많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내 멋대로 말을 한다면, 그 순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이것들 어쩌자고 이들 앞에서 이렇게 당당히도 말을 하는 것이지? 기가 차 혀를 내둘렀다. 둘 다 나라의 각각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던데 그럼 연인이나 이미 미래를 약속한 이가 있는 거 아닌가? 자신의 위치를 알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당당했다.
그래. 자신보다 밑이라 꿀릴 것이 없다는 이건가. 당당한 둘의 태도에 자조적인 비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애초에 내 동의 없이 시작하고 벌인 일 아니었던가. 왜 내게 이제 와서 동의를 구하는지 모르겠다. 왜 나한테 이걸 처리하기를 바라는 걸까? 단 두 개의 선택지만 존재하는 결정이 자비롭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꾹 다문 채 대답을 회피하자 다시 둘만의 다툼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서로 조용히 말을 오가던 것들은 결국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칼만 있었더라면 바로 칼부림을 부려도 될 정도의 험악함을 부르기 시작했다.
점점 높아지는 언성을 뒤로하고 그들의 간부진도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협상이 영 평화롭게 맺어질 거 같아 보이질 않자 사람들의 입이 바빠졌다. 어떻게든 자신의 국가에 좀 더 이득을 떼어내 오기 위해 서로를 헐뜯기 시작했다.
회의장이 점점 시끄러워지자 결국 에드아르가 먼저 나섰다.
“이렇게 같잖게 앉아서 탁상공론을 하느니 밖에 나가서 대결을 신청하지.”
“좋은 생각입니다. 저도 당신의 머리에 제대로 된 생각을 넣어 주는 데 지쳤거든요.”
아니 이 자식들이? 평화 협정하러 온 거 아니었어? 둘 중 누구의 것도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시 싸움이 나서 칼에 찔리는 것만큼은 결단코 사양이었다.
주위를 재빠르게 둘러보았지만 아까와는 달리 그 누구도 말리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 이걸 어쩐담. 초조해져 발만 동동 굴리다 정말로 둘이서 칼을 구해 잡을 생각에 재빠르게 그 둘을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내 목소리가 너무 컸던 것일까. 내 말이 들리자 거짓말처럼 소란스러움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어, 민망한데……. 다시 떠들어 주면 안 되려나.
“저희 좀 더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는 둘을 번갈아 보다 힐끔 뒤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저 사람들이 있는 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영영 못 하겠지. 나는 빨리 이 둘을 달래 놓고 다른 곳으로 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이럴 땐 제일 편한 방법이 있지. 당사자들만 서로 보는 거야.
“저희 셋이서요.”
두 사람의 지휘 아래에 급하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장소가 잡혔다. 급하게 정하느라 그곳에는 그 어떤 것도 설치되지도, 앉을 자리가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뻥뻥 뚫려 있는 곳은 각국의 전쟁 한가운데인 곳이었다. 회담이 거칠어진 것만큼 세 사람의 결론이 좋지 않게 나올 시 언제든지 바로 병력을 투입할 것이라는 게 간부들의 결정이었다.
아뇨. 전쟁은 절대로 안 할 건데요.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속으로 다짐하고 꼭 다짐한 것이 있었다. 이 둘이 칼부림하는 걸 보다가 칼에 찔려 죽을 바에 전쟁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혀를 깨물고 죽을 것이다. 이 정도의 결연함을 다진 나는 주먹을 쥐었다. 전쟁 싫어!
급하기 간이 장벽만 쳐진 채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보며 서 있었다. 먹구름 아래 서로를 거북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내게도 스멀스멀 밀려오고 있었다.
“…….”
침묵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일단 무작정 사람들의 눈을 피해내기 위해 세 명만 있어 달라고 말은 했지만 막상 모이자 할 말이 없었다. 그건 나 말고도 에드아르와 테이젤도 마찬가지였는지 어색한 침묵만이 서로를 오갈 뿐이었다.
으아악! 누가 제발 이 분위기 좀 어떻게 해 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런 분위기 진짜 싫어한단 말이다. 흡사 친구의 남자친구를 처음 만났는데 친구가 화장실 간다고 둘만 남겨 두고 갔을 때와 심정이 똑같았다.
“우, 우리 날씨가 꽤 흐려졌는데 빨리 끝내 볼까요?”
“…….”
“…….”
어색해진 침묵을 무마시켜 보고자 겨우 용기를 내어 말을 꺼내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침묵이었다. 진짜, 한 대씩만 세게 치고 싶다. 그것도 명치에. 나는 부글거리는 속을 참으며 어떻게든 말을 붙여 보기 위해 테이젤의 팔을 붙잡았다.
“테이젤 당신은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 것 같아요?”
“비시아가 제게 온다는 말 한마디만 한다면 끝나요. 정말 쉬운 해결 방법이랍니다.”
새끼야 그게 싫으니까 내가 이러고 있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