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먹고 싶어-14화 (14/86)

14화

결국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을 알자 난 주위를 흘끔흘끔 바라보다 이내 슬쩍 가슴께를 치켜 올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전쟁회담에서 간 크게 남자들을 유혹할 정도로 담이 크지도, 머리가 비지도 않았다. 그리고 너무나도 중요한 허기도 아직까진 그리 급하게 고프지 않았다.

수 시간 같던 수십 분이 지나고 적국의 사절단들이 도착한 모양이었는지 바깥이 시끄러웠다. 우리 진영 측에 앉은 이들의 기세가 갑작스럽게 살기등등해지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등을 곧추세웠다.

드디어, 시작되는 건가.

양국에서 원해서 시작된 회담인 것만큼 서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날붙이는 들어오기 전 모두 회수를 해 둔 상태였지만 살벌한 분위기는 단 1그램도 가시질 않았다.

오히려 적국을 향한 시퍼런 서슬 어린 눈동자들이 바쁘게 오가는 중이었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더라면 당장에 회의장이 피바다가 되었을 정도로 살벌한 눈빛 나누기에 난 속으로 울었다.

엄마! 나 또 칼빵 맞을 거 같아요!

이번엔 급소 저격도 잘 하라고 활짝 드러내놓은 옷 때문에 더욱 불안해진 난 초조하고 빠르게 눈을 굴렸다. 사태 파악을 하기 위해 재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던 와중, 내 눈을 마주 보며 바라보는 테이젤의 뚫어질 듯한 시선에 떨떠름하게 웃어 보였다.

내 웃음에 화답하듯 더욱 짙게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유난스레 얄미워 보였다. 웃지 마! 날 이 사지로 끌고 온 그가 악의 축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이 전쟁터에 오게 된 것도 그 탓이고, 칼에 찔리게 된 최종적인 결과를 따지자면 테이젤 때문이잖아? 비록 첫 식사를 하게 해 주긴 했지만 병 주고 약 준 느낌이라 썩 고맙진 않았다.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얼굴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죽빵 한 대만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님! 오늘만 정의로운 주먹질을 용서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하급직들부터 먼저 들어와 차근차근 자리를 채워 나가다 마지막으로 내 예전 밥이 될 뻔한 이가 들어오자 불타오르던 회의장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진중한 중압감이 급히 만들어져 허름한 천막 내를 한 바퀴 훑었다. 예전 밥의 눈동자가 자연스레 응대하기 위해 일어선 이들을 향해 눈길을 주다 테이젤을 발견하고 멈추었다. 발걸음마저 멈춘 그가 빤히 테이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번에 마저 다 못 찍은 뜨거운 기사들 간의 우정물을 지금 와서 마저 찍으려고 하는 것인가. 참으로 뜨거운 열기에 사뭇 더워지려고 할 때 그의 시선이 테이젤이 아닌 조금 더 미묘하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딜 보는 거지?

의아해 그의 시선을 천천히 따라가다 아직까지 테이젤과 내 손이 마주 깍지를 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헉! 놀란 내가 재빠르게 손을 털었지만 오히려 더욱 힘을 주는 그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보란 듯이 손을 위로 올리는 경우가 되었다.

아, 야. 잠깐만! 이런 만남을 원한 게 아니었는데!

비뚜름하게 입을 말아 올린 테이젤을 한 번 보고 재빠르게 예전 밥 목표물이었던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표정이었던 아까완 달리 싸늘하게 변모되어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딱 맞는 옷을 구태여 밀어 올리던 내 노력이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게 되고 말았다.

이 새끼. 설마 노린 건가.

아무 관계도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던 저번 만남과는 달리 나와 그는 마음은 아니더라도 몸을 섞는 행위를 나눴다. 그것도 처음인 내가 갑작스레 덮쳐서 시작된 일이라 변명하기도 힘들었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를 바라보았다.

과도하게 가슴이 파인 옷이나,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애도 아니고! 자기 거라는 낙인을 경쟁자인 그에게 대놓고 드러내는 모습이 여간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거 침 발라 놨으니까 손대지 마라. 뭐, 이건가?

나에겐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한 상황을 멍하니 보다 이내 곱씹었다. 정말. 밥 주제에 먹히고 먹히는 상하 관계를 모르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날 잡아서 가르쳐 줄 필요가 있는 듯싶었다.

“인사치고는 조용한 행동이군요.”

“비꼬긴.”

“그런 섭섭한 말씀을. 처음부터 말없이 노려보던 건 당신이 아닙니까.”

초반부터 양측 대표자들 간에 살벌한 불꽃이 일자 자연스레 회장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말없이 적을 향해 노려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들의 주군과 똑같이 상대방을 향해 비꼬는 언사를 내뱉기도 했다. 그중 몇몇은 날 향해 분노의 투지를 불태우기도 했다.

아니, 도대체 나는 왜? 억울했다. 한 거라면 죽기 싫어서 밥을 먹은 것뿐인데. 밥을 먹기 전에도, 정작 밥을 먹어도 곤란한 일에 엮이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역시 시골에서 오붓하게 현미밥, 보리밥, 쌀밥을 상대하는 것이 나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화려한 먹거리에 홀려서 눌러앉아 있었다니. 흑흑.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소리쳤다.

역시 난 망했어!

본 목적을 잊어버린 양 분위기는 점점 뜨겁게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매여 있던 입매가 틀어지기 시작하고 미간에 하나둘씩 금이 가기 시작할 무렵 한 사람이 나서서 모든 이들을 중재하듯이 입을 열었다.

“다들, 언제까지 자리에 서 있으실 겁니까. 슬슬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편히 의견을 나누도록 하죠.”

중후하지만 힘 있는 말소리에 시선이 한 곳으로 주목되었다. 전장에서 보낸 세월이 길어 보이는 얼굴에는 자잘한 자상 말고도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하지만 깊게 파인 주름을 따라 그려진 웃음은 쉽사리 사라질 새를 보이지 않았다. 가볍게 운을 띄우듯 말하는 그의 눈에는 지혜로움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 사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싸우기에 열을 올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머쓱해 뒤통수를 긁는 이가 있는가 하면,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입술을 꽉 다무는 이도 있었다.

오오. 여기서 나름 영향력 있는 사람인가 보다.

그의 말 한마디만으로 조용해지는 사태에 감탄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 눈길을 알아차린 것일까. 고갤 돌려 날 힐끔 바라보았지만 이내 눈을 다시 돌려 각국의 대표자들을 향해 시선을 집중시킬 뿐이었다.

그래, 저게 정상적인 대우며 대꾸지.

시큰둥한 그의 태도에 일말의 안도감까지 느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난 전쟁터에서도 여자의 몸이라는 특이한 점을 빼면 아무런 영향권도 없는 이에 불과했다.

어떤 권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며 부와 명예를 거머쥔 이도 아니었다. 이 특출나게 잘난 외모를 제외한다면 가진 것 하나 없는 가난한 시골 아가씨나 마찬가지. 하지만…….

입으로 소리를 내며 한숨을 푹 쉬자 자리에 앉다 말고 테이젤이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까 내 옛날 밥에게 지었던 냉소적인 비웃음은 어디 가고 얼굴엔 다시 평온한 미소만이 만연하게 피어 있었다.

뭘 봐. 이제 그 얼굴에 안 넘어갈 거야.

그가 웃음 짓는 것과는 반대로 내 입은 아래를 향해 툭 꺼져 갔다. 속이 얼마나 흉흉한지 알았는데 겉만 보고 무조건 맛난 밥! 하고 소리 지르는 시절은 지난 지 오래였다.

아무래도 첫 끼의 대상을 잘못 잡은 탓에 일이 단단히 꼬인 것 같았다.

가볍게 내게 질문하는 그를 향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해준 후 아직까지도 잡고 있는 거북한 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꽉 잡고 있는 그의 손아귀 힘은 회의가 시작되고 나서도 좀처럼 빼어내 줄 거 같지가 않아 보였다.

솔직히 말해 썩 좋지 않았다. 손을 적시는 체온마저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가고 싶은데, 도대체 언제 보내 준대?

가벼운 인사치레만 하고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내가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는 일은 없었다. 불안한 눈초리를 들어 올려 계속 테이젤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내게 닿질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 착석하고 분위기를 다잡아가는 듯하자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각국 간의 가벼운 언급으로 시작한 회의는 인사를 통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가려는 듯했다. 하지만 양국의 대표자들의 인사 차례가 오자 겨우 아물던 상처는 단번에 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갑작스레 결정된 사안이라 준비하는 데에 있어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이리 환대해 주니 영광입니다.”

옛날 밥, 에드아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이젤이 거칠게 응수했다.

“환영은요. 평생 밟지 못할 줄 알았던 땅인데 이리 초대하게 되었으니 환대를 하는 건 지극히 마땅한 일이죠.”

인사치레에 불과할 뿐인데, 끝난 그 둘의 사이엔 기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얘네 또 시작이네. 어휴, 뭐 하는 거람. 에드아르가 비꼬는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냉큼 그 꼬투리를 잡아 비꼬는 테이젤도 상당했다.

어쩜 저렇게 빤히 보이는 말들에 서로 발끈들 하는지. 문득 어릴 때 저 혼자 놀던 날 무시하던 남자애들 무리가 생각났다.

단지 우리 엄마의 행동이 특이하다고 해서 따돌리던 유치한 행동에 어울려 줄 내가 아니었지만, 그걸 가만히 들어줄 나도 아니었다. 당한 만큼의 수십 배는 돌려주고는 했지만, 여러 명 몰려 있을 때는 조용히 피하기도 했다.

무서워서? 아니. 가당찮아서였다.

솜 주먹 같은 손으로 때린다고 씩씩대는 폼을 보고 있자면 때릴 마음마저도 사라지고는 했다. 저 물풍선 같은 주먹에 맞대어 응수할 만큼 몰상식한 지식인은 아니었다.

얌전히 자리에서 벗어나는 나를 보며 자기네들이 이겼다고 으스대는 그들을 향해 조그맣게 엿을 날렸다. 빼 주니까 좋다고 실실 쪼개기는. 이게 바로 정신 승리다, 이 자식들아.

그리고 지금. 저 사람들이 행태가 딱 그 연령대의 아이들을 보는 격이었다. 인사를 빌미로 본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나서려는 지금, 분위기를 절대적으로 방해하는 두 사람은 어릴 때 앞니 빠진 아이들과 겹쳐 보일 뿐이었다.

그래. 저 짓도 둘이 수준이 비슷해야 할 수 있는 거지.

두 밥 중 어느 밥이 이기기를 바라진 않았다. 나는 감흥 없는 눈으로 아무나 이기길 바라며 그 둘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자. 감정 싸움으로 번지지 않게 언행에 주의해 주십시오. 저희는 지금 싸우러 온 게 아니라 평화협정을 맺으러 온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중재자는 나타났고 분위기는 다시 긴장감이 흐르는 온화함 안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본격적인 협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양측 나라에서 준비했던 이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서로 자신들에게 좀 더 이득을 취하기 위해 열변을 토하면서 근거와 주장들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가끔은 그 근거가 거짓이 되기도 하고 눈앞에서 밟히기도 했지만 양측 다 물러설 기미는 보이질 않았다.

자신들이 물러서는 순간 영토의 문제로 직결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토론을 하는 이들의 얼굴의 열은 쉽게 물러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하나도 진전이 없는 열띤 내용으로 시간만 10분, 20분, 지루하게 지나기 시작하자 점점 졸리기 시작했다.

사실 난 듣고 있어도 하나도 이해도 못 할 내용이었기에 인사 때부터 눈에 무거운 추가 달리고 있었는데 그게 알아듣지도 못해지자 더욱 가속된 것이었다.

도대체 언제 끝난담. 일단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크게 하품을 한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의미 없이 눈을 돌렸다.

이제 어느 정도 정해진 것 같은데 나머지는 서로 메일이나 메신저 같은 걸로 의견 주고받으면 안 되는 걸까? 아, 여긴 그런 게 없지.

다시 한번 더 하품을 하며 목을 돌리다 문득 에드아르에게 눈길을 돌렸다. 왠지 그 또한 나처럼 흥미 없다는 듯이 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동질감이나 느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에게 눈길을 주는 순간 나는 잠이 화드득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