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 후로도 그는 종종 날 찾아왔다. 밥때가 되어서 찾아오기도 했고, 자신의 일정이 비었다는 말을 하며 날 찾아오기도 했다.
몸도 완전히 치유되어 나가고 싶은 마음이 그득했지만 그는 내게 나가는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고 불만을 터트리는 나에게 그는 내가 걱정된다는 말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갑작스레 완치된 상처의 불안함과 주위 사람들이 내가 칼에 찔리는 것을 선명하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돌아다니면 이상하지 않겠냐는 그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양하게 충족시키는 음식도 주겠다, 배도 부르게 만들어 주겠다. 몸이 근질거리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할 일도 딱히 없었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여태껏 진흙탕에 구르고 험하게 몸을 다루기만 하던 차에 푹신한 침대 위의 생활은 극진할 따름이었다. 그 침대가 비록 야외용에 삐걱거리긴 한다지만 대충 박아 놓은 널빤지 위에서 잠을 청하던 때와는 백 배는 낫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침대 근처에 앉으며 간간히 스킨십을 하는 그의 행동에 두 번째 식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지만 그는 언제나 키스에서 그치고는 하였다. 욕망에 사로잡힌 눈동자가 거칠게 숨을 내뱉긴 했지만 그는 언제나 내 안위를 위해. 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며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위도 살짝 꺼졌겠다, 두 번째 식사를 치러도 상관없는 나였지만 굳이 주지 않더라도 차 있는 배는 배고픔을 유발하지 않았기에 순순히 그를 놔주었다. 솔직히 첫 번째 거사도 치렀는데, 두 번째 거사는 얼마나 쉽겠어? 라는 안일한 생각이 그를 놓아주는 행동에 한몫하기도 했다.
배고프면 저번처럼 같이 또 유혹하면 되겠지 뭐.
으슥한 밤이 오고 침상 위에는 오롯이 나와 그의 형태가 아롱거릴 뿐이었다. 평상시처럼 일정이 끝나 내게 밤 인사를 하기 위해 왔다는 그는 주춤거리며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자잘한 이야기와 바깥 상황이 어떤지 내게 말을 해 주던 그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내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비시아 오늘 하루는 어땠습니까?”
그의 말에 기가 차 얼굴을 빤히 바라봐 주었다. 저게 지금 오늘 하루 종일 침대 위에 있던 사람에게 할 말인가. 핸드폰도, 텔레비전도 없는 내게 침대 위는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스마트폰이라도 있었더라면 이러저러한 서핑도 하고 게임도 하면서 시간을 훅훅 보내기라도 할 텐데 이렇다 할 유흥을 위한 물품도 없이 침대 위를 죽치고 있으려니 죽을 판이었다. 이러다가 이번엔 심심해서 죽겠네.
만약 그가 시간을 내어 틈틈이 내게 말을 걸어 주지 않았더라면 난 심심함을 못 견디고 미쳐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끔 그 대신 밥을 주는 이에게 말을 걸어 보려고 해도 매번 바뀌는 통에 테이젤 말고는 이곳에서 말조차 제대로 붙여 보질 못했다. 한 사람이 담당하면 서로 편할 텐데. 제 천막 주변이 조용해 주변 상황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어요.”
오죽 심심했으면 머릿속을 더듬어서 다음번엔 어떤 체위로 밥을 먹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이왕이면 좀 더 내가 먹기 편한 자세면 좋잖아? 양질의 식사를 먹더라도 힘들면 안 되지. 먹을 땐 세상만사를 다 떨쳐 놓고 편하고 맛나게 먹자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푸훗, 그렇군요.”
“정말이에요. 얌전히 몸보신을 하는 건 좋지만 읽을 책 하나도 던져 주지 않고 시간을 감내하라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
“대신 제가 이렇게 자주 찾아오지 않습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짧게 입술을 찍어 누르던 그는 천천히 이마, 미간 콧날로 점점 내려오기 시작했다. 콧방울에 잠시 머물러있던 입술은 인중을 가볍게 누르며 윗입술을 자신의 입안으로 삼켰다.
이맘때쯤이면 으레 찾아오는 관례 같은 스킨십에 눈을 감았다. 입술을 벌리며 그의 입을 환영하듯이 고개를 살짝 돌리자 양 뺨을 감싸 쥐며 입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고른 위 치열을 부드럽게 훑으며 혀를 찾는 그의 행동에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손을 둘렀다. 뺨을 쥐던 손은 천천히 움직여 내 목을 훑는가 하면, 다른 쪽 손은 위로 올라가 귓불을 살짝 움켜쥐고서 만지기도 했다.
오늘도 키스만 하고 끝낼 건가. 전과는 달리 의심이 배여 있지 않은 적극적인 그의 행동에 밥을 얻어먹기 쉬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매번 애피타이저만 먹고선 일생을 살아갈 수 없듯이 배는 점차 비어 가기 시작했다.
배가 불러 입으로 친히 밀어 넣어 주는 행동까지 거부한 게 엊그제면서 그새 또 허기가 오기 시작한다고 찡찡거리는 자신이 참 밉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참. 누가 내 배 아니랄까 봐 기본 욕구에 더럽게 충실하네. 가벼운 접촉만으로는 아무리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저도 모르게 배를 움켜쥐었다.
이런 내가 싫다. 정. 말. 밉. 다. 또륵.
“……앗!”
잠시 딴 나라 딴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목 언저리에 갑작스럽게 통증이 오자 깜짝 놀라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언제 입술에서 내려간 것인지 목을 훑던 그의 입술이 내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은 것이었다. 얼떨떨한 느낌에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쳐다보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손을 아래로 내렸다.
옷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가는 손은 이내 거칠 것 하나 없는 유방을 부드럽게 거머쥐며 자유롭게 손을 움직이자 금세 몸이 달아올라 허리가 베베 꼬였다.
“걱정 마세요, 비시아. 내일은 심심할 틈이 없을 겁니다.”
“그, 그게 무슨……. 흐읏.”
드디어 두 번째 식사를 먹는다는 기대감과 쉽게 달아오르는 몸이 그가 좀 더 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몸을 활짝 열었다. 뜨겁고 질척한 입술이 옷을 들쳐 올린 맨살에 닿자 난 환희가 어린 비음을 삼키며 그의 머리를 껴안았다.
여전히 희롱당하는 가슴과 제 흔적으로 촘촘히 아로새겨 나가는 그의 입술이 아랫배를 저릿하게 만들었다. 익숙한 흥분감이 빠르게 몸을 채워가자 나는 이불보를 세게 움켜쥐었다.
부드럽게 상대를 위하듯 놀리던 혀와 이가 가슴의 활짝 핀 정점을 발견하고선 지체 없이 먹기 시작했다.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던 그의 이가 돌연 갑작스럽게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어 날 찍어 눌렀다.
“아얏!”
짧은 비명과 함께 가슴에 붉게 피어난 꽃자국을 보며 당황해 눈을 굴리자 그는 내 뺨에 입술을 맞추며 잠시 쉬었던 말을 다시 이어 나갔다.
“내일 저와 함께 회의에 참여할 겁니다.”
“회의요……?”
“네. 양국과의 회의. 저와 비시아 뿐만 아니라 적국의 황태자 또한 참여할 겁니다.”
“네? 아니, 싫어요. 전 안 갈래요.”
무슨 미친 소리를. 또 아무런 생각 없이 쫄래쫄래 따라나섰다가 이번엔 배가 아니라 명치에 칼빵을 맞을 것만 같았다.
정말로, 이번에 찔린 곳이 단순히 치명타를 피한 복부여서 다행이었지.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치명상을 입으면 회복도 하기 전에 죽을 게 당연했다. 그런 위험한 곳임을 빤히 알고도 나보고 오라고? 못 가. 아니, 안 가!
“죄송하지만 비시아와 전 필참입니다.”
“어째서죠?”
“아직 모르겠어요, 비시아? 이 회담은 당신 때문에 여는 겁니다.”
……네? 뭐라고요? 팔든?
그의 말에 벙쪄 애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그의 눈을 바라봤다.
***
지금 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 때문에 열어진다는 회담은 무엇이며, 내가 왜 참여해야 하는지 자체가 의문이었다. 나 없을 때 일어난 각국 간의 전쟁이면서 왜 나 때문에 회의가 주최된다는 거지? 나는 이곳에서 철저한 타인 취급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였다.
그저 밥만 맛나게 먹으려고 했던 내 원래의 계획과는 점점 쓸데없이 장대해져 간다는 생각에 말 못 하는 말들을 입안에서 굴렸다. 연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과 불안함이 이마에 땀을 송골송골 맺히게 했다.
“힘드십니까?”
“네? 아뇨.”
“비시아. 아까도 말했지만 괜찮아요. 별일 없을 겁니다. 어여쁘게 치장해 놓은 얼굴에 땀이 맺힐 정도는 아니에요.”
“아……. 좀 더워서 그런가 봐요.”
덥기는 개뿔. 민망하다 싶을 정도로 활짝 드러내 놓은 가슴골 때문에 민망해서 몇 겹은 더 입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정네를 유혹하려면 응당 내 몸매를 거침없이 드러낼 수 있는 이런 옷들을 입어야 하는 게 사실이었지만 나는 한시라도 빨리 벗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 내었다.
테이젤은 도대체 왜 이런 옷을 입힌 거지? 그가 직접 구비해 준 옷 외엔 별다르게 입을 옷도 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입었다지만 의구심은 가시질 않았다.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지급해 주던 옷들은 하나같이 목까지 여며 오던 것들이었다. 내 야시시한 속옷도 자신이 다시 구해 준다며 한 번에 다 태워 버린 것도 그가 아니었던가.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제 그가 새겨 놓은 선명한 붉은 자국이 가슴 위 언저리에 선명하게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덕분에 이곳에 오는 잠시간의 시간에도 다른 이들의 시선을 뜨겁게 감내해야만 했다.
정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의 측근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이들조차도 넋 놓고 날 빤히 바라보곤 했는데 곧 있으면 들어올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할까. 자연스레 드는 끔찍한 단어에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발. 제에에발. 또다시 그런 뭣같은 오해에 상황에 엮기고 싶지 않은데.
“테이젤, 저…….”
도저히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지나가 버린 밥을 잊는 법도 배워야 한다지만 엿 같은 오해에 얽힌 채 나와 계속 연관 짓는 것도 싫었다. 그의 옆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이 상황을 어찌 바꾸지 못한다면 적어도 이 가슴 언저리를 가릴 수 있는 것만이라도 쟁취하리라.
“쉬이.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예요. 조금만 참아 줘요.”
“그게 아니라…….”
“역시. 무서우신 겁니까. 괜찮습니다. 절 믿어 주세요. 저번과는 달리 당신에게 위협을 가할만한 물건은 반경 10미터 내에도 못 오게 만들겠습니다.”
“…….”
내 말이 모조리 차단되고 말았다. 무턱대고 내 말을 끊는 그의 행동이 괘씸해 지금 당장이라도 그 핑계를 대며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그는 탁자 밑의 의자 팔걸이에 걸친 내 손을 찾아내 자신의 손으로 덮어 주었다. 또한 손으로 얼기설기 엮듯 깍지를 끼는 그의 따스한 행동에 도리어 입만 꾹 다물어질 뿐이었다.
아직 적국 사람들이 오지 않은 지금이 기회였다.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며 이곳을 탈출하고 싶다고 당장 말해야 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예쁘장하게 생긴 낯짝으로 웃고 있는 그에게 차마 어제 묻고 되풀이하듯 계속 물었던 말을 다시 하기가 꺼려졌던 탓.
웃는 낯짝에 침 못 뱉는다더니 딱 그 심정이었다. 다정하게 안부를 묻는 이의 면상에 대고서 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감내하며 ‘나 돌아갈래요! 갈 거야!’ 하고 발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젠장. 눈앞이 깜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