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전장의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흩뜨렸다. 에드아르는 열을 맞춰 서 있는 제 기사단을 휘 둘러본 후 말머리를 돌렸다. 입안이 썼다. 제가 가지지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여자.
“비시아라고 했지.”
그 여자가 연신 눈에 밟혔다.
상단으로 위장하고 최전방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정체 모를 무리의 습격이 있었고, 다 처리한 후 그 여자를 만났다. 요요한 얼굴을 한 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바라보는 순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 생겨났다.
뭔가 미심쩍은 여자였다. 그래서 욕망을 억누르고 가만히 두고 봤다. 수상한 점은 딱히 없었다. 방심을 푸는 순간 제 부하 하나가 여자를 겁탈하려고 했다. 그는 그녀를 놈에게서 떼어 내었다. 씻으러 들어간 여자가 호수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이성을 잃은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 상황 자체가 낯설었다. 재회한 것이 다름 아닌 적군 수장의 옆자리였다. 당연히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그 여자가 첩자가 아니라면? 답은 하나였다.
탈취하리라.
***
“괜찮으십니까?”
파정의 기운으로 내게 기대어 있던 것도 잠시, 발작하듯이 벌떡 일어나며 날 세게 붙잡는 그의 행동에 눈을 깜빡였다. 아니, 좀 쉬자 이 사람아. 섹스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 몸으로는 처음이란 말이야.
그를 향해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가도 입술을 꾹 다물며 대답하는 것을 회피했다. 그래, 말해 봤자 뭘 알겠니. 밥에게 백날 말해보았자 내 입만 아프지.
배도 부르겠다, 나른하게 온몸을 누르는 기운이 내 눈을 가물가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내 눈이 완전하게 감기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았다. 연신 뭐가 그렇게 미안한 것인지 날 부드럽게 안으며 이젠 식어 가는 땀을 제 손으로 닦아 주었다.
“처음인 당신을 배려했어야 하는 건데……. 제가 서툴렀습니다. 이성을 잃고 당신을 거칠게 안아 버렸어요.”
얘가 도대체 뭐래.
나는 혼자서 자책감에 주절거리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맛있게 밥 먹었는데 맛없었다고 옆에서 초 치는 것도 아니고 이미 할 거 다 해 놓고 왜 이제 와서? 어쨌거나 첫 끼였다. 간만의 배부름에 집중하고 싶은 이 타이밍에 내 머리카락을 자꾸 쓰다듬는 그가 자꾸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비시아, 상처는요?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이제 괜찮아요. 저 정말 괜찮아요, 테이젤.”
“……정말입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과 내 몸을 덮었던 이불을 확 들추어냈다. 갑작스럽게 드러나는 서로의 나신에 부끄러워할 새도 없이 그의 시선이 재빠르게 복부에 감겨 있던 붕대로 향했다. 깔끔하게 상처를 막고 있던 아까의 모습은 간데없이 새빨갛게 배어들어 선명한 붉은빛을 내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테이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놀란 것은 테이젤 뿐만이 아니었다. 나 또한 생각보다 심한 자태에 놀라 딸꾹질을 했다. 어라? 당황스러워 손을 허우적거리다 내 손을 낚아채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그로 인해 멈춰야 했다. 이렇게까지 상처가 벌어진 건가?
가만히 있기만 하더라도 아파 끙끙대던 상처가 반복적인 운동을 통해 벌어지고 피부에 균열이 갔다. 이 사태는 곧 내가 앓다가 까무룩 기절해도 할 말이 없다는 소리였다.
“이게 도대체……! 비시아, 왜 참으신 겁니까!”
“저, 전…….”
나도 알았으면 좋겠다. 그의 말에 멍청하게 두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피가 붕대에 배어 나올 정도로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픔은 조금도 느껴지질 않았다.
격정의 순간까지도 느껴지던 것은 포만감과 쾌락 두 가지일 뿐. 아픔은 일면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머리를 긁적였다. 참고 참아서 먹었던 첫 식사라서 머리가 드디어 미쳐 버린 건가? 배고픔과 통증 감각에 이상이 생겼다던가.
“…….”
“…….”
무얼 생각해도 명확한 답은 나오질 않았다. 본의 아니게 묵묵히 묵언 수행을 하게 된 날 바라보던 그가 한숨을 쉬며 내 붕대에 손을 대었다. 찌푸려진 미간엔 복잡 미묘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붕대를 갈아드리겠습니다.”
“아, 고마워요.”
“…….”
떨떠름한 내 감사 인사에 그는 붕대를 풀어 내다 손을 멈추고 날 빤히 바라보았다. 복잡한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은 더욱 난해해져 알 수 없는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그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얽히면서 몇 번 겪었던, 익숙한 눈초리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나는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냐, 그거 아냐……!
“그와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포기하면서까지 미인계를 쓰시는 겁니까.”
오, 젠장.
텁텁한 밤고구마를 열 개쯤 먹이는 그의 말에 벌리던 입술 안에 자연스레 주먹이 들어갔다. 아냐! 멍청아. 그거 아냐! 배가 너무 고파서 밥 좀 먹은 게 왜 그렇게까지 해석되는 건데? 말 위에서 끝냈으리라고 생각했던 말이 자연스럽게 다시 튀어나오자 질색 팔색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전 정말 그 사람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에요! 전 단지…….”
“전……?”
길게 늘어지는 내 말을 따라 하며 잔뜩 찌푸린 미간이 시선을 낮추자 다시 도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큰일 났다. 너무 말했어.
진수성찬으로 먹게 해 준 밥 앞에서 다른 밥을 노렸다고 진실 토론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를 재빠르게 굴렸지만 괜찮은 답변은 나올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더는 묻지 않도록 하죠.”
결국 오해의 골을 깊게 만든 채 끝나 버리는 대화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는 포기해야 하는 건가. 맛이 좋아 옆에 두고 여러 번 해 먹고 싶은 마음이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는 걸 느꼈다.
온갖 멍청한 행동을 다 보여줘 버렸어. 슬로우 푸드를 한순간에 인스턴트로 만든 자괴감에 머리칼이라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붕대를 다 풀고 상처가 완연히 드러나자 나와 그가 다시 한번 더 동시에 입을 말아 모았다. 붕대에 비친 피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말끔하게 나아있는 상처의 모습에 테이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 얼굴을 향해 올라갔다.
아니, 날 봐도 내가 뭘 안다고.
나 또한 내 상처를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검의 자상이 있지 않았더라면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심지어 딱지와 피부의 균열조차 생기지 않은 말끔한 피부는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엄마가 내게 가르쳐 준 게 뭘까. 바깥에 나가서 필요한 것들은 다 가르쳐 주었다며 호언장담을 한 그녀가 미심쩍을 정도였다. 머릿속에 남는 것은 오로지 성교와 섹스밖에 없었다. 아니 물론 살아남기 위해선 섹스를 해야 하지만, 상처가 빨리 낫기 위해서도 섹스를 해야 한다고는 말은 들은 적도 없었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날 바라보는 테이젤의 시선이 느껴졌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할 텐데. 더듬거리며 입술을 벌리던 난 그를 향해 어설프게 입술을 벙긋거렸다.
“……저, 정말 괜찮죠?”
“…….”
“저 진짜 괜찮아서 당신과 한 거예요. 배고…… 아니, 당신과 못다 한 것을 마저 마무리 하고 싶어서요.”
여전히 침묵하는 그의 앞에서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망했다! 망했어요. 몰래 밤에 탈출이라도 계획해야 하는 건가.
내가 소리 없는 발광을 하는 사이 날 바라보던 테이젤의 눈이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딱딱했던 입매가 슬며시 풀리자 그는 입가에 다시 웃음을 매달며 내게 말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배부……. 배가 찢어지게 고파요.”
하마터면 밥밍아웃할 뻔했다. 이제 인간의 밥을 먹으면 맛만 느껴질 뿐 어떠한 포만감도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갈구하지는 않았다. 먹어도 살도 안 찌고……. 헐.
먹어도 살이 안 찌다니. 그런 중요한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달은 나를 저주했다. 멍청한 나년! 먹어도 살 안 찌는 건 정말 축복받은 일이었다. 와, 내가 이 세상의 그 맛있는 음식들을 두고 외도했구나. 미안해, 음식들아.
그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잠시 나갔다 다시 들어오자 그들의 손엔 음식이 한가득 놓여 있었다. 각종 고기부터 시작해서 이곳이 전장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의 화려한 디저트마저 내 눈앞에 놓여 있자 나는 재빠르게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체하겠습니다.”
“아이에요. 온앗.”
아니에요. 존맛.
나는 식사가 내 앞에 놓이자마자 빠르게 흡입했다. 대박이다. 이 맛있는 걸 원 없이 먹어도 살이 안 찌다니. 나는 축복받았어. 이곳은 천국인가. 이곳에 환생하고 나서 처음으로 얻은 기쁨이었다.
예쁜 외모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외모를 이용해서 배를 채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어찌나 울고 싶었는지. 흑흑. 성교를 외우기 싫어 현실 로그아웃을 울부짖었던 날들이 생각나 씁쓸해졌다.
그래도 이런 보상이 오다니.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배가 그렇게 고프셨습니까?”
“쪼금……?”
머쓱하게 웃자 그도 따라 미소 지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준비해 준 디저트까지 완벽하게 싹쓸이하고 나서야 나는 단 1센티의 변함도 없는 배를 자연스럽게 쓸어내렸다. 후아. 진짜 잘 먹었네! 먹을 땐 아무런 생각 없이 행복하게 먹자는 주의지만 이렇게까지 양껏 먹어 본 적은 없었다. 혀끝을 감미롭게 해 주는 음식들은 언제나 내 기분을 둥둥 뜨게 만들어 주었다.
전생에서는 양껏 입에 밀어 넣었다가 주체할 수 없는 살 때문에 좌절하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그럴 걱정이 하나도 없으니 기분이 두 배는 더 업 되는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먹어도 먹어도 차오르지 않는 배부름으로 인해 가득 먹어 거북한 느낌은 있을 수가 없었다.
역시 인생은 살아 봐야 안다더니. 난 이날을 위해 살아온 것처럼 행복한 미소를 가득 입에 머금었다.
입도 행복하고, 배도 부르고. 난 정말 오늘을 위해 여태껏 버텨 온 게 분명해!
“이렇게 싹싹 긁어 드시다니……. 입에 상당히 맞으셨던 것 같군요.”
“네! 맛있었어요. 제 취향이에요.”
완전 취향저격 제대로지. 내가 행복한 미소를 가득 베어 물며 그에게 답하자 그는 답 대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 이제 밥 안 줘도 괜찮은데.
배 안 가득 불러 있는 정기가 입안 가득 음식을 밀어 넣을 땐 아무런 반응도 하질 않다 그의 손이 닿자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부른 배에 억지로 정기를 쥐어 넣는 느낌에 나는 접시를 정리하는 척 그의 손길을 피했다.
하도 굶주려서 그런가? 위가 쪼그라든 것처럼 가득 채워진 배 안은 쉽사리 나머지 여분의 정기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피곤하다는 명분하에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멀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노는 그의 손가락은 여실히 노니는 중이었다.
위 좀 늘려야겠다. 그렇게 배고플 때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들어오는 식사에 거부감을 느끼는 나에게 한숨을 내쉬었다. 양질 좋은 음식은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두어야지. 암암.
“그럼 쉬세요, 비시아. 전 이만 일정이 있어 나가 보겠습니다.”
피곤해 두 눈이 점점 감기는 날 바라보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잠을 자는 데 방해받지 않도록 자신이 직접 식기를 치우는 수고를 들이는 그의 행동에 입술을 동그랗게 말다가도 이내 눈을 감아 버렸다.
‘왜 이렇게 잘해 줘요?’
물을 용기가 차마 나에겐 없었다. 아니, 물을 용기보다는 들을 자신이 없던 걸지도.
밥에게 느끼는 온기는 너무나도 따뜻해 갓 지은 밥처럼 몽글몽글 입안에 맺혔다. 밥이라는 사실마저 잊을 정도로 따뜻한 온기에 조용히 질문을 아래로 미끄러트렸다.
좀 더. 아직까진 편히 먹고 살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때였다.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는 내 이마에 따뜻한 온기가 살짝 닿더니 이내 발걸음 소리가 멀리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