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허리를 가볍게 튕기며 반항하듯 나 자신의 존재를 알렸지만 그 누구도 날 봐 주지 않았다. 오히려 칼을 위협적으로 상대방에게 겨누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그 사실을 잊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앗, 하고 놀랄 새도 없이 두 남자의 말이 급작스레 돌진했다. 반동 탓에 말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몸을 틀어 테이젤의 허리를 끌어안아 겨우 낙마를 면했다. 그는 잠깐 멈칫하긴 했지만 그건 아주 찰나였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그에게 매달려 두 눈을 힘껏 감았다. 예민해진 청각으로 맞부딪히는 금속의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이 두 남자가 격돌하자 자연스레 주위의 군대들도 서로 검을 겨누고 싸우기 시작했다. 예상하기도 싫었던 최악의 전개로 순조롭게도 흘러가고 있었다.
한참을 눈을 감고 있어도 전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정수리 위로 테이젤의 땀으로 추정되는 액체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설마 피는 아니겠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테이젤을 붙잡고 있던 팔을 놓고 주위를 살폈다. 죄다 지친 건지 검을 들고는 있으나 부딪히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한가로운 말의 휴식처였던 물가는 살풍경하게 변모해 있었다. 맑은 샘에는 팔, 다리가 잘린 시체 몇 구가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핏물을 퍼뜨리고, 물이 촉촉하게 내려앉았던 수풀 위에는 그들의 매끄럽게 잘린 수족이 잡동사니처럼 나뒹굴었다.
눈 뜨고 보기 힘든 처참한 광경이었다. 토기가 치밀어 올라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일부러 시선을 위쪽으로 올렸다.
위는 아래와 달리 평화로웠다. 하늘엔 안온한 구름이 평화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얼마간 보고 있자 날뛰던 속이 점점 진정되었다.
몸을 다시 바로 하자 짜증이 묻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밥 후보1이 있었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대충 훔쳤다. 눈으로 들어가는 땀이 따가운지 연신 눈살을 찡그렸다. 그 모습이 퍽 섹시하게 느껴졌다.
땀 흘리는 남자……! 치밀어 오는 구토기가 싹 가실 정도로 그의 모습은 눈으로 즐기기엔 무척이나 좋은 절경이었다.
“듣던 대로 실력이 출중하군.”
“당신이야말로.”
이보세요, 기사의 뜨거운 우정물은 나중에 찍어 주세요. 이 남자들 장르 욕심이 엄청났다.
그들이 대화하고 있을 때, 갑자기 죽은 것 같던 남자 하나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체인 줄 알았던 사내는 충혈된 눈을 한 채 검을 치켜들었다.
말이 놀라서 날뛰고, 잡고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난 자연스럽게 미끄러졌다.
균형을 잃은 내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려고 하는 순간, 눈먼 검이 내 복부를 관통했다. 생전 처음 느낀 무언가 박히는 감각은 생경했고, 또 끔찍했다. 그대로 말에서 굴러떨어지며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을 흘렸다.
“윽…….”
아, 젠장……. 어처구니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런 사태가 벌어질 줄 알았다고!
“여자!”
“비시아!”
날 애타게 부르는 이들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그러게 이 개새끼들아, 내가 그냥 보내 달라고 했잖아…….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어여쁜 중지를 날려 주려다 급격하게 폐부를 찌르는 아픔에 그만 정신을 잃어버렸다.
***
“아가야. 이리 오렴.”
엄마의 손짓에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조르르 달려가 무릎에 앉았다. 엄마는 내 긴 금빛 머리카락을 빗으로 정성껏 빗기 시작했다. 한 올이라도 상할세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머리 만져 주는 느낌이 기분이 좋아 눈을 감고 그대로 즐기고 있었다. 아이가 된 기분은 뭔가 새로웠다. 전생에서는 해 보지 못한 온갖 투정들을 다 해 볼 수 있었다.
“허리는 곧게 펴야지.”
끄응. 싫은데……. 투덜대면서도 허리를 펴고 바로 앉았다.
“이 상처, 웬 거니?”
“아, 이거? 어제 옆집 지나가는데 어떤 애가 나 때렸어!”
그리고 나는 한 대 맞고 한 스무 대 정도 더 때렸다. 복수할 거면 제대로 복수해야지. 부러 그것까지 이야기하진 않았다. 그래도 어른의 체면이 있어 때린 후에 달래 주기는 했다. 주머니에 든 사탕 주니까 좋다고 웃더라. 역시 어린아이.
“그런 애들이랑 어울리지 마.”
“왜?”
“근본이 다르니까.”
조선시대세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간혹 보면 엄마는 이상한 데 집착하는 면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나 외의 모든 종족의 여자들을 멸시하고 괄시하고 무시하고 천대하고……. 한번 시작하자 끝없이 물고 이어지는 그녀의 이상행동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튼, 그랬다. 처음에는 엄마의 외모가 다른 종족의 여인들보다 월등히 뛰어나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그 이유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만 알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근본이 뭐야?”
근본이 뭐긴 뭐야. 근본이지. 알고 있지만 어린아이인 척하기 위해 일부러 물었다. 엄마는 고민하더니 다시 내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나른한 오후가 한가롭게 흘러갔다.
“네가 고귀하다는 거지, 아가.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이 널 가지려고 들 거야.”
오……. 그건 좀 별론데.
나는 그 때 엄마의 말을 흘려들었다. 아무래도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내 외모가 또래 아이들에 비해 사랑스러워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지만 그것은 내 큰 착각이었던 것이다…….
***
완전 아팠다. 너무 아파서 숨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아, 더 이상 못 살 거 같아. 심장마비가 그나마 나은 거였구나. 배고픔은 간신히 견뎌 낼 수 있었지만 칼빵은 진짜 대책이 서질 않았다.
소설이나 드라마 보면 칼에 맞고도 ‘전 당신이 괜찮다면 괜찮습니다…….’ 하면서 잘 웃고 다니던데, 그건 픽션이라서 그런 거였구나. 배에 구멍 나고 참 큰 깨달음을 얻었다. 문제는 이 깨달음을 칼에 맞기 전부터 깨달아야 했다는 거지만.
“아! 으윽…….”
아픈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장애물이 웃으며 나를 반겼다. 오, 망했다. 배가 뚫려서 죽고 싶은데 심지어 배가 고프기까지 했다.
눈뜨는 것도 힘들어서 감고 있었지만 허기짐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눈을 뜨자 정갈한 방 안이 보였다. 꽤 넓은 방에는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내 마지막 기억은 칼부림의 중간에서 낙마하며 칼에 맞은 거였다. 그래서 그런가 온 전신이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칼을 맞은 부위도, 낙마하며 굴러떨어진 곳곳의 생채기도 모두 온몸에서 분리되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 그러게 보내 달랄 때 보내 주지, 나쁜 놈들…….
누구라도 좀 부르고 싶었지만 눈만 겨우 뜰 수 있었다. 아, 누가 제발 밥 좀 줘. 배가 아픈 것보다 고픈 고통이 더 컸다.
평소라면 아, 배고파 뒤지겠다, 하며 넘어가겠는데 지금은 더블 어택 때문인지 더 힘들었다. 이 예쁜 외모를 버리더라도 차라리 평범하게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먹는 걸로 고통받지는 않았을 텐데, 세상이 너무 가혹했다.
머릿속을 완전히 지배할 정도로 강렬한 배고픔이 온몸을 강하게 짓눌렀다. 아, 세상에. 잊기 위해 다른 생각을 억지로 하며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자 이내 눈물을 보였다.
죽을 거 같아.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아……!
내 스스로가 목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움에 켁켁거리자 누군가 재빠르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누구?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그대로 형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할 겨를도 없이 달려든 곳엔 신도 안타깝게 여겼는지, 다행히도 남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성별을 확인한 후에 앞뒤 가리지 않고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달려들었다.
밥, 밥 좀 줘!
“갑자기 왜……!”
갑자기 아니야, 아까부터 배고팠단 말이야.
배고픔으로 인해 잔뜩 흐려진 시야는 다부진 몸밖에 보이질 않게 만들었다. 누군지도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은 채 무작정 그를 눕혔다.
그 상태 그대로 찍어 누르니 보이는 건 새하얀 목덜미였다.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키스했다간 미친 여자로 오해받아 뺨 맞겠지.
잠깐의 이성적인 판단이 나를 살렸다. 당장 입술을 밀어 넣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새하얀 목에 손을 덧붙여 끌어안았다. 맞댄 살결로부터 내게 깔려 있는 이의 기운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아, 드디어. 간신히 오아시스를 찾은 듯한 기분에 앓는 소리를 내었다. 말라비틀어질 것 같던 목에 간신히 물을 넣었지만 여전히 배가 고파 죽을 것만 같았다.
“비시아.”
“잠깐만, 잠깐만 이렇게 있어 봐요.”
밥 좀 먹게.
다행히 그는 나의 부탁대로 나를 밀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허기가 가셨다. 동시에 이성도 되돌아오자 날 가만히 안고 있는 이가 누군지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배고픔에 이성을 잃어 그를 덮쳤다는 것의 창피함이 앞서기 우선, 겨우 살았다는 억울함이 눈가를 적셨다.
진짜, 인생 살기 너무 힘들잖아! 매일이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모양새는 별론데 이 끈질긴 투쟁은 할리우드의 고난이도 액션과 비슷했다. 아냐, 아니지. 힘든 걸로 따지면 내가 더 힘들어. 자칫하면 아사하는걸.
그러고 있으려니 이제 상처가 말썽이었다. 허기짐에 대한 고통이 사라지자 이젠 복부에서 미친 고통이 찾아들었다. 내가 말도 못 하고 그대로 굳어 있자 아래에 가만히 깔려 있던 테이젤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비시아?”
“…….”
말을 못 하겠어. 맞대고 있는 살과 살로 정기는 계속 흘러들어 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배고픔이 가시자 돌아오는 감각들은 상처가 비명을 지르게끔 만들었다. 아까 이만큼은 아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
분명 테이젤에게 달려드는 그 순간 상처가 덧난 게 틀림없었다. 그냥 조신하게 손 좀 잡아달라고 부탁할걸. 후회의 후회가 연속해서 날 덮쳤지만 여전히 난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으.”
“비시아!”
드디어 내 상태가 심상치 않은 걸 깨달은 그가 나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다급한 손길로 나를 안아 올렸다. 그 반동 탓에 상처가 자극되어 통증이 느껴졌다.
진짜 아프단 말이야. 날 좀 조심스럽게 다뤄 줄래? 억누른 입 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윽…….”
“비시아, 괜찮습니까?”
안 괜찮아, 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으으윽……’이 전부였다. 짐승도 아니고 신음 소리 말고 좀 내고 싶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