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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먹고 싶어-8화 (8/86)

8화

뭐야.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다시 의문을 품는 사이 그가 빠르게 맺힌 물방울을 핥았다. 그 야릇한 행위는 순식간이었다.

“…….”

“왜 그러십니까?”

능청스레 묻는 모습에 할 말이 없었다. 정말 몰라서 그러나? 갑작스런 어택에 얼굴로 열이 몰리는 것 같았다. 나, 나는 이론파라고! 실전은 잘 모른단 말이야.

이 남자, 사람 다루는 솜씨가 기막혔다. 우리 엄마와 같은 향기가 났다. 뭐라고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최전방?”

그럼 전쟁 중이라는 소린가? 내가 학습한 거라고는 남자를 유혹하는 법, 방중술 이딴 것밖에 없어서 다른 지식은 신생아 수준이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엄마가 생각하는 매력적인 여성상에, 현명한 여자는 포함이 안 되는 듯싶다. 정말 보수적인 사고방식이라고밖에 생각이 안 들었다. 너무 똑똑하면 독이라나.

“그걸 말씀드리기엔 아직 서로를 너무 모르는 것 같군요.”

“음……. 뭐가 궁금해요?”

그의 눈가가 친절히 휘었다.

“리시트의 황자와 무슨 관계입니까.”

뭐, 그게 누군데.

리시트라는 게 나라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런데 황자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 당연히 모르니까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대답할 수 있는 걸 물어봐야지, 모르는 걸 물어보면 어떻게 해?

“대답하기 곤란하십니까?”

곤란한 게 아니라 누군지 모른다고! 그대로 말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미 확신하고 있는 상대에게 모른다고 해 봤자 믿지도 않을 테지. 하지만 그 다짐은 얼마 못 가 깨지고 말았다.

“연인 관계라 들었습니다. 그의 정부입니까?”

“누군지 몰라요! 제가 리시트의 황자를 대체 어떻게 알아요?”

루머 퍼뜨린 사람 누구야. 당장 나와라. 연인이라니, 남자랑 손도 겨우 잡는데 무슨 개소린지 모르겠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봤지만 역시나 테이젤은 믿는 기색이 없었다.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납치해 온 겁니다.”

제 입으로 납치라고 하다니, 정말 뻔뻔하다. 그의 말을 종합하여 생각을 정리했다. 설마 그 리시트의 황자라는 사람이 내가 노렸던 첫 번째 먹잇감인가? 장렬하게 실패해 버린 도망간 그 밥. 생각만 해도 어이없었다. 다 됐다 생각했는데 달아나 버린 그 심정이란.

“저는 그 남자가 황자인지도 몰랐어요.”

“그걸 저더러 믿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대체 나보고는 뭐 어쩌라는 거지.

그는 아무래도 나를 떠보는 것 같았다. 확실히 그 황자라는 작자와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아무리 털어 봤자 나에게 나오는 것은 없을 텐데. 수고로움이 참으로 애잔했다. 다 마신 수통을 다시 잠가 그에게 건넸다.

“믿고 말고는 당신 자유죠. 확실한 건 전 진짜 몰랐다는 거예요.”

“그렇습니까.”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충분히 쉰 모양인지 충실한 말들이 기분 좋은 울음을 내며 제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그 기특한 모습에 말갈기를 쓰다듬어 주었다. 전생의 오빠 새끼보다 더 똑똑한 것 같다.

“다시 출발한다.”

남자의 명령에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이끌림을 따라 말에 올랐다. 그러고 보니 좀 억울했다. 자신에 대해 하나도 알려 주지 않으면서 나에 대한 것만 캐물어 보다니, 이기적이다.

막 출발하려는 순간 나와 테이젤이 탄 말이 경기를 일으키며 앞말을 치켜들었다. 흔들리는 시야 사이 내가 본 것은 말 바로 앞에 꽂혀 있는 화살이었다. 다행히도 말에 맞지는 않았지만 충분한 위협이었다. 테이젤은 한 손으로 말고삐를 틀어쥐고 다른 손으로 나를 단단히 붙잡았다.

“각하!”

“나는 괜찮으니 주위를 경계하라!”

“아, 알겠습니다!”

아직 말이 진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명령에 군사들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뭐가 어떻게 돼 가는 거야? 습격당한 건가? 최전방이라고 했으니 전쟁이라도 벌어지는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비시아. 저를 꽉 붙잡으세요.”

“네?”

“어서.”

단호한 어조에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내가 말 앞에 타고 있는 상황이라 붙잡을 수 있는 게 옷자락밖에 없었다. 말은 한참 동안 날뛰더니 시간이 지나고서야 겨우 진정했다. 하지만 그를 붙잡은 손은 무서움을 핑계로 계속 붙잡고 있는 채였다.

“각하! 포위됐습니다!”

뭐야, 어느새 포위까지 됐어? 상황이 너무 급하게 전개됐다.

일동 정지한 상태로 사람들이 숨 쉬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조차 덩달아 숨죽일 정도였다. 뭔지 몰라도 목숨이 위험하다는 건 알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편 우거진 나무 뒤로 한 무리의 군대가 나타났다. 그 수는 테이젤이 이끌고 온 군사와 비등했다. 갑자기 시야가 답답하게 느껴져 머리까지 둘러썼던 담요를 목 아래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그 무리의 선두에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너…….”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하, 상황이 참 엿같이 돌아가는군.

그래, 나는 지금 날 노리고 있는 밥과 도망간 밥 사이에 끼어 있었다. 짜장과 짬뽕 그 사이에서 뭘 먹을지 고민하면 되는 상황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한숨을 지었다. 그럼 뭐 해, 둘 다 그림의 떡인걸. 어쩐지 휘말려선 안 되는 곳에 끼어 버린 것 같았다.

도망간 밥, 리시트라고 했던가? 그의 표정은 나를 알아차리자마자 사뭇 어두워졌다. 그와 시선이 얽매이는 순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갑자기 발발한 전투에서 홀연히 나타난 나. 의심쩍어 며칠간 경계를 했지만 경계를 풀자마자 사라졌고 적과 같은 말을 타고 나타났다. 이 이상 뭐라고 정리를 내린단 말인가.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을 보아 분명 나를 첩자라고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

“첩자였나.”

이거 봐.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를 그의 말을 들으며 다시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전 밥 후보의 말에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나와는 달리 이번에는 내 뒤에 있는 테이젤이 화들짝 놀랐다. 내 허리를 휘감고 있는 그의 손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당신의 연인이 아닙니까?”

“아니야.”

아, 무슨 개소리야!

나는 진절머리 나듯이 그의 말에 맞춰 고개를 재빠르게 저었다. 내가 아까 혼신의 힘을 다해 부인했는데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구나. 두 사람의 시선이 날 향해 뚫어져라 들어오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밥도 그렇고, 현재 밥도 그렇고 둘 다 날 더럽게 못 믿네. 내가 그렇게 신뢰가 없는 사람이었나. 내 한숨을 느낀 그가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을 재빠르게 어깨 위로 올렸다. 목을 감싸듯이 날 붙잡은 그가 재빠르게 말을 쏘아붙였다.

“인질을 보호하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는 거라면 그만두십시오.”

추리도 가지가지다, 진짜. 테이젤은 참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네 놈이야말로 그 여자가 첩자임을 감추려고 하는 게 아니고?”

둘 사이에 침묵이 진득하게 눌어붙었다. 그 사이에 끼인 나로선 환장할 따름이었다. 둘의 관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난들 알 게 뭐야. 나는 그냥 생계를 유지하려던 착한 행인이었을 뿐이라고.

“내가 진짜 아니라고 했잖아요! 첩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 남자 연인도 아니라고요!”

나는 적극적으로 항변했다. 곧 살풍경이 벌어질 이 공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여기 이대로 있다간 칼에 맞아 생을 마감할 것 같았다. 심장마비도 억울한데, 칼 맞아 객사까지 하는 신세라니. 정말이지 사양이었다.

그 누구와도 연관이 없다는 게 밝혀지면 나를 그냥 내보내 주겠지. 다시 한 번 더 언급하지만 난 진짜 죄 없는 선량한 시민이었다.

정말, 세상에. 이쯤 되니 잘생긴 남자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건가,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냥 시골로 흘러 들어가 순박한 청년 하나 유혹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하나만을 주식으로 해서 먹는다는 생각에 잠시 질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들의 허리춤에 찬 칼집을 보자 재빠르게 생각을 바꾸었다.

그래, 응응. 순박한 시골 청년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이런 내 바람과는 달리 사태가 점차 심각하게 무르익었다. 터트리기 두려울 정도로.

“상황이 복잡하게 꼬였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허리춤에 있는 검을 빼 들었다. 어어, 잠깐만? 잠깐마안? 어쩐지 상황이 최악으로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칼싸움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건장한 사내들 틈바구니에서 내 한 몸 지킬 수 있을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든 충돌하는 걸 막아야 하는데 도무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은 호전적인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님들……. 액션 씬은 나 없는 데서 찍어 주실래요? 소리 없는 아우성은 그들의 말에 묻혀 저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첩자가 아니라면 내가 데리고 가야겠어.”

“무슨 소립니까. 당신과 관련이 없다면 제가 데려갑니다.”

와, 나 매력 쩐다. 이 종족 특성인 미모의 힘인가. 위대했다. 의외인 점은 왕자인지, 황자인지 알 수 없는 밥 후보는 처음부터 내게 관심이 없다는 듯 굴었다는 것이다. 갑자기 이렇게 태도가 돌변하다니, 상상도 못 했다.

잠깐, 그러면 왜 도망간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고대하던 순간에도 그냥 도망가 버리고 말이야. 그런데 이 남자들의 싸움에서 내 의견은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물건 취급했다.

“말로만 하지 말고 검으로 승부 보지.”

“바라던 바입니다.”

헐, 잠깐만. 이게 무슨 소리야. 안 돼! 아슬아슬하게 말 위에 타 있는 나는 어쩌라고?

온몸을 휘감아 치는 두려움에 테이젤의 팔을 꼭 붙잡았다. 왜 당사자인 내 입장은 전혀 고려해 주지 않는 거야. 경악에 가득 차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저, 저는 이만 가면 안 될까요?”

“무슨 소리야.”

“안 됩니다.”

“…….”

정말……. 대체 나한테 왜 이러세요. 겁나 단호하네. 단호박이세요? 다들 여기 오시기 전에 단호박이라도 드셨어요?

나를 하필 두 국가의 사이에, 그것도 최전방에 떨어뜨려 놓은 엄마가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한적한 시골에 날 떨어뜨렸으면 힘 좋은 청년이랑 행복할 수 있었잖아. 밤에도 낮에도 알콩달콩할 수 있었는데.

있는 힘껏 인상을 찡그러뜨리며 울상을 지었다. 물론 이 남자들이 얼굴이 잘생겨서 눈이 호강하긴 했지만 계속 이렇게 위협을 받았다간 밥이고 뭐고 제명에 못 살 것 같았다.

진수성찬이 무슨 소용이야, 된장, 고추장, 김치찌개가 짱이지. 아무리 맛난 양식이라도 언젠가는 물려 쌀밥이 그리워지듯 내 상황이 딱 그러했다. 잘생긴 애들 틈새에 치여 죽을 바엔 순진한 쌀밥 내가 직접 차려서 먹고 말지! 엉엉.

속으로 간절하게 그들이 싸우지 않기를 외쳤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는 한 그들에게 닿을 리가 없었다. 내가 그러든 말든 그들은 저들끼리 싸울 준비를 했다.

이 매너 없는 것들아. 나 지금 말에 같이 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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