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먹고 싶어-4화 (4/86)

4화

배고픔을 참고 겨우 손을 들고 있는데 좀 잡아 주지, 정말. 손들고 있기도 힘겨운 나머지 다시 몸을 늘어뜨리려는데 그가 내 손을 강하게 붙잡아 일으켰다. 그 바람에 균형 잃은 몸이 비틀대며 그에게 기대게 되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얘가 나한테 밥 줬단 소리다.

“우린 네 처지를 봐주고 있는 편이야. 네 잠자리도 봐주고 음식도 꼬박꼬박 내준다. 이건 어느 포로도 상상치 못할 호사다.”

예, 예, 존잘님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그의 말이 귀에 제대로 들어올 리 만무했다. 은근슬쩍 그의 몸에 최대한 밀착하며 그 몰래 정기를 빼먹는 중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점차 활력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비실대며 언제든지 죽을 거 같던 몸이 점차 기력을 되찾아 가며 두 발로 땅을 제대로 짚을 수 있자 감격에 눈물을 머금었다.

아, 밥이란 건 이렇게 소중하구나. 전생에 엄마가 반찬 한 가지만 해 줬다고 행패 부리고 안 먹은 과거의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밥을 먹음으로써 기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반찬 한 가지는커녕 밥만 있어도 감사하며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있을 때 잘하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다.

“네가 끝까지 안 먹겠다면 말리진 않아. 지금까지 네 행동에서 수상한 점은 전혀 없었으니까.”

그는 날 붙잡은 손을 떨쳐 내며 말했다.

“마을에 도착하면 널 풀어 주도록 하겠다.”

난 그 말을 듣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땐, 좋은 소식이었다. 더 이상 이 제한된 남성들 사이에서 최소한의 접촉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으니. 더구나 자유를 되찾아 도시에 들어간다면, 분명 남자 한둘 정도는 꼬실 수 있을 것이었다.

‘……정말?’

사실 자신은 없었다. 세상에 내몰려 지금까지 한 번도 유혹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상당히 의기소침해 있는 상태였다. 화려한 겉모습에 끌려 남자가 먼저 말을 걸 법도 했건만 이곳에 잡힌 이후로 어느 누구 하나 그런 모습을 보인 이가 없었다.

그리고 주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내 앞의 이 남자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무심하면서도 나를 연신 신경 쓰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저 찬란한 외모가 내 마음을 어택했다. 이대로 헤어진다면 두고두고 마음에 미련으로 남을 게 뻔했다. 그런 구질구질한 건 정말이지 딱 질색이었다.

내가 엿듣기로 가장 가까운 마을은 꽤 번성한 상업 도시라고 했다. 그곳까지는 약 삼 일간의 여정만 남은 상태였다. 삼 일. 그게 내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이었다.

“지금 식사할 건가?”

“……지금은 말고, 나중에요.”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시리게 몸을 돌려 내게서 점점 멀어졌다. 난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그냥 눈을 감았다.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감정은 아니지만 뭔가 아쉬웠다.

그래, 마치 눈앞에서 치킨이 사라지는 느낌과도 같았다. 저걸 그냥 한 입은 꼭 먹어야 할 텐데…….

***

다시 찾아온 허기에 몸을 웅크리고 힘겹게 잠든 차였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기력이 점차 돌기 시작했다.

뭐지? 분명히 혼자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를 더듬는 손길에 차오르는 포만감을 느끼며 점차 잠에서 깨어났다.

부스스 뜬 눈으로는 새카만 주위만 보일 뿐이었고, 잠에 취해 있어서 사리 분별이 덜 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굶주림이 가시는 그 감각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는 거였다.

사태 파악을 하기 위해 두 눈을 깜빡이며 허공을 주시했다. 점점 흑암한 주변에 눈이 익숙해져 갔다. 잠에 깬 내 눈에 보인 건, 내 몸을 더듬고 있는 한 건장한 남성의 인영이었다.

“뭐…….”

“쉿.”

본능적으로 소리 지르려던 내 입은 사내의 투박한 손에 틀어 막히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허기짐은 점점 가시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겁탈당하는 상황인 걸까?

내가 얼빠진 채 저항도 못 하고 가만히 있는 사이 남자는 내 입에 뭔가를 물리고 두 팔을 제압했다. 그 바람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남자의 아래에 깔릴 수밖에 없었다.

“네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다. 그냥 잠깐 놀자는 거야.”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고 애썼다. 엄마였다면 이런 상황에 도리어 사내를 유혹했겠지만, 나는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기에 거부감만 들 뿐이었다. 애초에 상대 여성의 의견도 듣지 않고 겁탈하려는 이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기력을 간신히 붙잡아 들은 남자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얼굴이 확인되지 않으니 불안감이 증폭되어 갔다.

누구지? 누굴까. 내게 음식을 가져다주던 사람? 내 손목에 묶인 줄을 풀어 준 사람?

가물가물한 기억 와중에도 그거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내 목표물은 아니야.

“내가 가만히 널 관찰하니, 너도 원하는 거 같던데. 은근히 내 동기들과 접촉하고 말이야.”

미친 새끼야. 그건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거고.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내 몸을 샅샅이 더듬기 시작했다. 내 종아리를 지분거리며 쓸어 올리더니, 허벅지에는 입을 맞추었다. 까끌한 수염의 감각이 내 살갗을 따갑게 했다.

이윽고 그는 내 치마 안으로 손을 넣어 팬티 위를 손으로 내리눌렀다. 난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사지를 버둥거렸다. 이렇게 불쾌한 포만감은 처음이었다. 이 기분 나쁜 행위에 본능을 충족시키다니.

사내는 내 가슴을 두 손으로 으깨듯 주무르며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축축이 젖어 들어가는 감촉에 몸을 떨며 더 거세게 저항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곧…….”

남자의 말은 채 끝맺기도 전에 막혀 버리고 말았다. 열린 마차의 문 사이로 달빛이 사각형으로 부서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달빛에 찬란히 빛나는 남자가 심기 불편한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기다리긴 뭘 기다려.”

그는 나를 겁탈하려는 사내를 발길질 한 번으로 손쉽게 쓰러트렸다. 단말마의 비명만 지른 채 앞으로 고꾸라지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멍청하게도 탄성을 내질렀다.

와, 정말 세다.

내가 처한 상황도 잊고 멀거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가떨어진 남자는 쿨럭대며 얻어맞은 곳을 급박하게 문질렀다.

그래, 넌 맞을 만해. 아무리 내가 배고파 돌아가시기 직전이라도 강제로 하는 건 싫다고. 놀라지 않게 정중히 요청했더라면 배고픈 마음에 나도 순순히 허해 주었을 거였다. 오는 남자 막지 말고, 가는 남자 막지 말라는 게 엄마가 내게 가르친 지론이었다.

“…….”

“……? 왜 그러시는…….”

말을 하다 말고 그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제야 내가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지 인지할 수 있었다. 원피스는 있는 대로 들쳐 올려져 팬티가 다 노출되어 있었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다리에는 붉은색의 상흔이 곳곳에 피어나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잘도 질펀하게 가지고 놀았다. 입안에 물려 있던 천 뭉치를 빼 나뒹굴고 있는 사내에게 냅다 던졌다.

에라, 몹쓸 놈. 고자나 되어 버려라.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상황인지 이해되네.”

“……그렇죠?”

말려 올라간 원피스를 내리며 머쓱하게 웃었다. 아니, 지금 웃을 때가 아닌가……? 그보단 저 자가 지분댄 몸이 불결해 참을 수가 없었다. 다리를 거칠게 문지르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알지? 말하지 않아도 알지? 나는 그를 향해 나에게 볼일이 없다면 더 이상 여기에 있지 않고 싶다는 느낌을 간절히 보내었다. 그 간절함이 통했을까. 돌처럼 딱딱하게 붙어있던 그의 입술이 간신히 떨어졌다.

“저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가서 씻어.”

“어디서요?”

되묻는 내가 귀찮은 건지, 그의 표정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대답까지 바란 것은 내 큰 바람이었던 듯했다.

아, 예. 죄송합니다……. 험상궂은 그의 얼굴에 재빠르게 꼬리를 내리고 얌전히 마차에서 내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알아서 찾아가면 되잖아.

투덜거리면서 발을 아래로 내디뎠을 때, 아까의 일의 탓인지 휘청이자 그는 재빠르게 나를 잡아 올렸다. 발이 가뿐하게 허공으로 들쳐지고 추레하게 넘어지는 사태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잡아 주는 그의 행동에 고마워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도 나를 동네 바보형 정도로 보는 그의 표정에 똑같이 입을 싹 닫으며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났다. 고맙긴 한데, 얼굴 표정이 인사조차 건네기 싫게 만들었다.

잘생긴 개새끼.

마차 바깥엔 깨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난 한편에 내팽개치듯 처박혀 있는 내 가방 속에서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주위를 살폈다.

여긴 평야 옆의 숲 초입이라 씻을 만한 곳은 딱히 없어 보였다. 그도 이런 길 사정을 모르진 않을 터. 그런데 이런 곳에서 도대체 알려 주지도 않고, 씻고 오라고 하면 어쩌자는 거야?

여전히 상대방에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그를 욕하면서 길을 헤매며 서성이는데 마차가 있는 방향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퍼뜩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자 더 이상의 비명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비명 소리는 꽤나 애처롭고 살려 달라는 뜻이 명백해 뒷목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설마 죽이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부한데 설마 죽이겠어. 내가 생각해도 일개 인질 한 명 겁탈하려 했다 해서 죽일 것 같진 않았다.

그냥 경고만 하고 끝나겠지, 뭐. 그렇게 말하면서도 못내 불안한 탓에 고개를 돌려 여러 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것을 끝으로 이 이상 비명이 터져 나오질 않자 난 곧 관심을 끊고 물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좀 걸어 나오자 귓가에 물이 흐르는 청량한 소리가 포착되었다. 유레카. 드디어 이 징글징글한 더러움을 씻어 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흥분된 마음이 점차 가라앉았다.

“와……!”

저 멀리 야트막한 언덕 뒤로 그리 크지 않은 호수가 펼쳐 있었다. 근처 산에서 흘러온 물인 듯, 작은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난 옷을 벗지 않은 채로 물속에 들어갔다. 물이 빠르게 내 몸을 적셔 가고 차가운 물 탓에 몽롱했던 정신 또한 번쩍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몸만 이렇지 속은 그냥 여자아이였다. 난 내가 이론만 빠삭하다고 자만하고 있었다. 새로 태어나 주위에서의 찬탄에 이제 나는 인간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내 음식들 중 하나가 나를 겁탈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소름 끼치는데, 어떻게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전생에 남자와 자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난 섹스를 즐기는 편이었기에 남자친구와 자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순결한 처녀 같은 반응을 내보이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 마음 헤아리지 못하는 내가 내 마음을 알 리가.

한숨을 꺼져라 쉬며 물속으로 머리를 완전히 집어넣었다. 일렁이는 수면이 마치 표류하는 나 같기만 했다. 먹고 사는 게 이리 힘들 줄은 몰랐다. 무의식중에 숨을 들이키다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았다.

물 밖으로 나와 기침을 하는데, 물에서 단맛이 느껴졌다. 설탕물이라도 되는 듯 달달한 맛이었다.

“물이 원래 이렇게 달달했던가……?”

평소에 먹던 물맛과는 전혀 다른 맛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곳에 와서 살면서 물을 마신다는 자체의 행동에 의미가 없긴 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찾고는 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맛에 물을 조금 떠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여전히 달달한 맛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으음,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갑자기 불쾌한 생각이 들어 호수 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을 때, 수풀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짐승? 놀란 마음에 몸을 웅크리며 그곳을 노려보자 소리를 낸 인물이 곧 모습을 드러내었다. 달빛을 받아 머리칼이 노랗게 물든 그 남자가 나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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