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눈앞에 있는 이를 붙잡고 울며 호소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마련되어 있는 그릇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음식을 보고도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자 한 사내가 무심하게 등 뒤로 묶여 있는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아…….”
거친 그의 손이 내 팔목에 닿았을 때 순간적으로 탄식을 내질렀다. 단순히 내 손목을 앞쪽으로 돌려 묶기 위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것 같은 갈증에 조금이나마 단비가 뿌려지는 행동이었다.
배고픔을 완연하게 잊기 위해선 이걸로는 턱도 없었지만 배고픔에 고개도 들기 힘들었던 내겐 이것마저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아주 잠깐, 날 붙들고 있는 이의 손이 사라지자 나는 그 손을 재빠르게 낚아채고 싶은 갈망에 사로잡혔다.
아, 세상에. 한숨을 내쉬며 입맛을 다셨다. 하마터면 계속 나를 붙잡고 있어 달라 호소할 뻔했어. 섭취하는 게 남들과 다르다는 게 이렇게 괴로울 수가.
“왜 안 먹나?”
다른 이가 내 그릇을 발로 툭 차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죄인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 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에게 일일이 설명하기엔 쩍쩍 갈라지는 입술을 벌릴 힘이 없었다.
배도 고팠고 더군다나 귀찮았다.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자 그는 호기롭게 날 향해 몰아세웠다. 그에 질세라 여전히 입술 한 번 까딱하지 않고 눈을 감자 근처에서 콧방귀를 끼는 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 아무래도 내가 답답함에 눈을 감은 것이 그에겐 퍽 다른 의미로 비쳤나 보다.
“이 여자가 음식 귀한 줄 모르고……. 안 먹을 거면 가져간다?”
“네. 뭐……. 그러세요.”
굶주림에 허덕이는 목소리치고 의외로 담담했다. 내가 이런 상황에선 꽤나 끈기 있고 의연하구나. 그 남자는 매몰차게 몸을 돌릴 것처럼 굴더니 내 얼굴을 흘긋 노려보고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먹으라는 의미에서 하는 은근한 협박인 듯싶었다. 이 음식 말고 내 손 한 번 잡아 줬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말과 행동은 내내 망상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그런 말을 내뱉었다가는 허기를 채우기는커녕 미친년 취급을 받을 것이 뻔했다.
후우. 내뱉지 않으려도 한숨이 절로 나와졌다. 어쩌다 내가 마음속으로 끊임없는 구걸을 거듭하는 신세가 되었나. 또다시 코로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강렬한 시선과 맞닥뜨렸다.
헉. 내 최종 목표물.
다른 남자들이 그냥 밥이라면 저 남자는 잘 차려진 양식이었다. 그의 단연 두드러지는 매력인 하얀 머리칼은 어둠에 젖어 보이지 않건만, 왜 저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 한숨을 내쉰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 채 정신 놓고 그를 감상하는데, 남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뭘 보고 굳은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마주한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내 시선이 불쾌한 건가.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칼솜씨야 매우 출중한 편이었지만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아사도 싫었지만 날카로운 쇠붙이에 비명횡사하는 것도 싫었다. 잔뜩 쫄아 버린 난 괜히 옆으로 시선을 돌린 척하면서도 그의 얼굴을 흘긋흘긋 쳐다보았다.
멀찍이 앉아 있던 그가 돌연 몸을 일으켰다. 표정은 꼭 누구 한 대 칠 것같이 해서는 그대로 나를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나? 진짜 나한테 걸어오는 건가?
주변을 쭉 둘러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그의 발걸음이 향할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당혹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미친. 아무리 내가 빤히 쳐다봤다지만 겨우 그깟 얼굴 좀 감상한 건데! 얼굴에 프리미엄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어디가 닳기라도 하나?
괜히 억울했다. 어느새 내 앞에 다가선 남자는 조용히 나를 깔아 보고 있었다. 내려 본 게 아니라 분명 깔아 보았다.
“불만 있으면 말로 하는 게 어때? 그렇게 노려보지만 말고.”
“불만이야 많죠. 그런데 그거 때문에 쳐다본 거 아니거든요? 그리고 언제 제가 당신 봤대요? 그냥 옆에 나무 본 것뿐인데.”
“식사가 불만인가 보네? 왜 하나도 안 먹었어?”
“…….”
그는 내 말을 가뿐히 무시하며 화제를 돌렸다. 난 아랫입술을 물며 시선을 피했다. 할 말도 없고, 딱히 변명하기도 싫었다.
아, 이 사람도 그렇고 아까 그 사람도 그렇고 왜 다들 그렇게 내 식사에 관심들을 가지는지. 먹기 싫다는데 그냥 좀 신경 끄지. 내 허기는 이런 걸 먹는다고 해서 간단히 채워질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이걸 다 먹으면 나랑 자 줄 것도 아니면서……. 더러운 세상, 밥도 못 먹게 한다. 흑흑.
“굶어 죽으면 곤란한데.”
툭 내뱉는 그의 말에 일순간 고개를 치켜들었다. 곤란하다는 그의 말에 일순간이지만 희망이 엿보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혹시 그에게 말하면 나랑 자 주려나? 나랑 섹스해 주려나? 생기가 가득 찬 눈으로 그를 향해 재빠르게 입술을 열었다.
“왜요?”
“시체 치우기 귀찮으니까.”
아, 예. 그러십니까…….
일순간에 좋았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럼 그렇지. 그가 보이는 반응이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마뜩잖았다. 저게 지금 당사자 앞에서 할 말이야? 어처구니없어서 답변할 기력이 죄다 사그라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건 둘째치고, 정말 배고파서 돌아가실 것 같았다. 우리 엄마는 대체 내게 뭘 가르친 걸까요. 열심히 배운 유혹이 전혀 쓸모가 없었다.
촉촉한 눈빛으로 애절하게 바라봐도 무시당하기 일쑤고. 울상을 지으며 묶인 손을 바라보다 다시 남자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날 향해 기분 나쁜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치 내가 바퀴벌레라도 되는 양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저 눈빛. 기분 나쁘게.
“손이 불편해서 못 먹겠어요.”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닐 텐데.”
“아, 그럼 내버려 둬요. 남이사 죽든 말든. 어차피 시체도 댁이 안 치울 거면서.”
갑자기 어디서 이런 배짱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를 향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여태껏 다른 이들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툭툭 내뱉었다.
볼을 부풀리며 잔뜩 비아냥거리자 눈앞에 있던 이에게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분명하게도 이런 내 오만하고 버릇없는 태도에 그가 반응했다는 거에 난 눈을 가늘게 떴다.
호오라? 딱 봐도 귀족스러워 보이는 게, 늘 떠받들려 살다 보니 이런 취급은 통 못 받아 본 모양이었다. 그래! 무슨 일이든 성공하려면 적을 알아야 했던 거였는데, 그제야 내 유혹이 통하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난 빈정거림을 가득 담은 입술을 비틀어 열었다.
“이거 안 풀어 줄 거면 좀 비켜요. 내 시야 가로막지 마시고. 밤하늘 구경할 거거든요?”
“……미쳤군.”
이 정도가 미쳤으면 진짜 미친년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 말이 쏙 들어가게 진짜 미친년을 보여 줘야 하는데……. 그를 가소롭다는 듯 가볍게 비웃어 주고 몸을 뒤로 기댔다. 그리고 아주 태연하게 눈을 감았다.
아, 몰라 될 대로 돼라, 젠장. 굶어 죽으면 죽는 거지. 한 번 죽어 봤는데 또 못 죽겠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마음까지 놓았을 때, 누군가가 내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을 잘라 냈다. 눈을 감고 있는 중에도 칼날의 서늘한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와, 쩐다. 하마터면 내 손목 잘릴 뻔했어. 난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쓸린 자국이 선연하게 남아 있는 손목을 매만졌다.
“이제 식사하도록.”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냉정하게 제자리도 돌아가려던 그를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난 다급한 손짓으로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 살 거 같다.
단순히 손목만 잡았을 뿐인데 이러한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그간 굶주림이 가시는 듯 했다. 그것도 잠시, 곧 고개를 들었을 때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너무 섬뜩해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상처를 치료해 달라는 말을 겨우 삼켰다. 그랬다간 내 손목 썰릴지도 몰라…….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진짜 배고파 죽겠네. 굶주린 채 길을 재촉하는 건 능지처참보다 더한 고문이었다.
차라리 깔끔하게 내 목에 날붙이를 대어 죽여 줬으면 싶을 정도로 힘겨운 하루하루였다. 아 정말. 죽겠네! 식사는 매 끼니마다 내 앞으로 차려졌지만 한 입조차 댈 수 없는 건 똑같았다. 댈 수는 있었지만 먹어 보았자 힘도 안 나는 행동, 해서 뭐 할까 싶었다.
처음엔 그냥 가벼운 시위겠거니 했던 남자들도, 내가 물조차 입에 대지 않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나한텐 이건 밥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연민 반, 질렸다는 심정 반으로 쳐다보는 남자들을 냉담하게 상대했다. 밥이 밥 안 먹는다고 노려보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구나. 젠장. 지금까지 살아 있는 내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었다. 내가 삶에 대한 집착으로 남자들과 접촉 시도를 했기 때문.
와,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정말 없어 보인다. 내 스스로가 불쌍해져서 시무룩했다가도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마음가짐을 달리 먹었다.
그래, 그래도 그런 처절한 몸부림 덕분에 이렇게 살아 있지 않는가. 그런데 어쩐지 조만간 숨넘어갈 것 같기도 하고…….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앞서가던 무리가 웅성거리다 싶더니 척 보아도 부하들에게 억지로 떠밀려 온 기색이 역력한 흰 머리칼의 남자가 내게 물었다. 난 그를 향해 힘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내 다시 내렸다.
아, 대답할 힘도 없어.
난 힘없이 누워 있다가, 여전히 날 향해 미간을 찌푸리는 그를 향해 얼굴에 철판을 깔아버렸다. 내가 손을 뻗자 그의 눈이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하다 이내 와그작 찡그려지고 말았다.
와, 잘 구겨진 종이 같네.
그는 오만한 내 태도에 인상을 아주 파격적으로 찡그렸다. 헐, 근데도 잘 생겼어. 먹기 딱 좋아 보여. 나는 입맛을 다시다가 퍼뜩 드는 제정신에 입술을 다물었다. 정말 배고파서 미쳐 버린 걸까, 나.
“일으켜 주면 말씀드릴게요. 힘들어서 혼자선 못 일어나요.”
그래, 네가 내 손을 잡아 주어야 내가 살아. 애써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게 잘 전해졌을지는 의문이다. 이쯤 되니 내 외모에 대한 회의감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분명 같은 해 태어난 일족 중에서 내 외양이 가장 뛰어나다 했는데, 그건 단지 우리만의 기준이었나? 어찌 됐든 내가 하는 게 옳은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어휴.
“네가 지금 네 처지를 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제 처지가…… 뭔데요?”
말할 힘도 없다, 잘생긴 개새끼야! 그는 내 뻗은 손을 잡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못마땅한 듯 내려다보기만 했다. 들고 있던 손이 가늘게 떨렸지만 그는 여전히 내 손을 붙잡을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