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먹고 싶어
1화
망했다.
내 머릿속을 강렬하게 타고 들어오는 단어는 단순했다. 한마디로 인생 망했어. 나는 허탈하게 입술로 머리카락을 앙다물고는 이를 갈았다.
스물둘의 창창한 나이에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즉사라니. 더군다나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고 있다 갑작스럽게 온 죽음이라 황당함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내 청춘! 내 인생! 내 대학라이프! 이제 어깨 좀 펴고 다니는가 싶었더니 이게 도대체 뭐람! 나는 손에 쥔 머리카락을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
내 청춘은 그렇다 치더라도 남겨진 사람들은 얼마나 허탈할까. 잘 먹고 잘살고, 심지어 건강에도 문제없던 애가 뜬금없이 심장마비라니. 당사자도 이렇게 어이가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충격인 사실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환생을 했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던 것을 내가 체험하다니 기묘한 감각에 몸서리가 살짝 쳐졌다.
동물이나 식물 혹은 무생물 같은 것이 아닌 인간과 똑같은 형태를 띠고 태어나 다행이었지만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아무렴. 누가 이런 상황을 마냥 즐기겠어! 주변을 은밀하게 살펴보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인간이 아닌 요물로 태어났다. 분명 모습은 인간과 별다를 바가 없긴 하나, 그 속성은 판이하게 달랐다. 우선 사람에게 꼭 필요한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을 섭취할 필요가 없었다. 음식 안에 들어 있는 기본적인 물질들이 내게 필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 종족은 인간과 별다르지 않은 외향을 지니고 있으나 그 질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가 났다. 우리 종족은 찬연하게 아름다웠고 빛이 났다.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아도 아름다웠으며 세월이 지나도 젊었다. 이 젊음과 생을 유지하기 위해선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바로…… 남자의 ‘정기’.
[아가. 남자를 잘 유혹하기 위해선 이렇게 가슴골이 잔뜩 파인 옷을 입어야 한단다. 지금 입고 있는 것처럼 가슴 둔덕을 다 가리는 옷으론 어림도 없어! 자, 어서 어미가 시키는 대로 옷차림을 단정하게 가다듬으렴.]
정기라니! 인간과 다르게 태어난 나 자신을 보며 당황할 새도 없이 나는 그녀의 말에 교육되고 또 길러졌다.
내 어미란 여자는 일족 중에서도 특출한 외모를 지니고 태어난 나를 육성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늘 입만 열면 나오는 건 어떻게 하면 남자를 잘 유혹하는가. 혹은 방중술. 체위나 애무 같은 것에 대해 말해 주기 바빴다.
더군다나 그녀가 아는 지식 모두를 알고 외우길 바라는 눈치를 어찌나 살벌하게도 보내는지,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알려 주는 것을 빠삭히 익히고 외워야만 했다.
[자, 우리 딸. 이걸 보렴.]
나는 엄마가 처음으로 보여 주는 그림책을 보고 극도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말을 떼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나에게 엄마라는 여자가 보여 준 것은 적나라한 체위가 묘사되어 있는 카마수트라였다.
젠장, 딸에게 보여 주는 첫 그림책이 카마수트라라니. 보통은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그림책 아닌가요?
당황해 빨던 손가락도 놓은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그녀는 책장을 빠르게 넘기며 설명했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점점 수위가 세지는 체위들 앞에서 나는 그저 침묵했다. 어린아이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엄마는 내게 계속해서 설명했다.
내가 눈으로 인지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흉내 낼 수 있었을 때엔 더욱더 정성과 열을 가하며 내게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이 자세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가부터 시작해서 기다란 베개를 두고 직접 흉내 내기까지. 폭발적인 교육열에 난 때아닌 성교육을 겪어야만 했다.
덕분에 나는 열일곱의 나이로 이론만 엄청나게 빠삭한 요물이 되었다.
우리 일족은 열일곱까진 남자의 정기를 흡수하지 않아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어미의 배 속에 잉태되었을 때 그녀의 정기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허나 열일곱 생일 후에는 어쩔 수 없이 남자 사냥을 나서야만 했다.
[내일이 바로 네 생일이구나, 아가. 어미가 일러 준 대로만 하면 훌륭하게 남자를 사냥할 수 있을 거야. 물론 기억하고 있지?]
내 생일이 되기 전날, 내게 확인하듯 물어보는 엄마를 향해 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요. 물론이고 말구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고 또 들었는데 그걸 잊어버린다면 그건 천하의 바보 새끼가 틀림없었다.
어떤 멍청이가 백 번도 넘게 들은 말을 까먹을 수 있을까. 눈만 감아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녀가 보여 준 남녀 간 정사의 모습이었다. 으, 세상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내 머릿속에 이런 걸로만 가득 차게 될 날이 올 줄은! 이게 바로 반복 학습의 효과인가?
[그럼, 건투를 빈다. 내 딸.]
[어, 엄마?]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 수분 전. 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덜렁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적어도 사람이 사는 곳에 보내 줘야 할 거 아니에요? 아니면 자그마한 자금이라던가……!
나는 한없이 가벼운 가방을 꼭 쥐며 처량 맞게 고개를 숙였다. 다짜고짜 남자를 찾아내어 정기를 빨아야 하는 내 기구한 처지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거지. 환장하겠네.
“으으, 배고파…….”
우그러들 듯한 배를 움켜쥐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현재의 삶은 간단하게 말해서 생과의 치열한 사투였다. 먹고 사는 문제가 유혹하고 빨아들이는 행위로 전위된 지금 내게 간절한 것은 음식이 아니었다.
내가 미모를 유지하고 또한 오래도록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자들, 그것도 정력 빵빵한 남성을 유혹하여 마지막까지 남김없이 쪽쪽 빨아먹어야 되는 것이었다. 물론 난 어릴 적부터의 영재교육 탓에 정보와 지식에 있어서 빠삭한 상태였다. 물론 이론만.
그리고 지금. 실전을 목전에 둔 상태인데 눈앞에 살아 숨 쉬는 것의 기척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질 않자 암담함이 눈앞을 덮쳐 왔다.
“도대체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떨어트려 놓은 거야?”
엄마가 나를 던져 놓은 곳은, 사람이라고는 전혀 지나가지 않는 어둑한 산길이었다. 여기선…… 인간마저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들 것 같은데. 바람 소리를 제외한다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벌판에서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재빠르게 주변을 탐색했다.
빽빽하게 주변을 감싸고 있는 중키의 나무들과 산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우듬지들. 비산하는 새들은 깃털 하나둘 떨어뜨리다 사라졌고, 느껴지는 인기척은 여전히 없었다.
“……아.”
꽤 돌아다닌 덕에 바닥에 선명하게 나 있는 수레바퀴 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짐승들의 발자취에 희미해지기는 했으나 그리 오래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은 흔적이었다. 적어도 나보다 반나절 정도 앞서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곳은 적어도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란 말이 된다.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비록 인간이라는 종족이 아니라고는 하나 외양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인간 여자였다.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서 도움을 요청하면 모르긴 몰라도 도심까지 나를 데려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왕이면 남자가 지나가 주면 더더욱 좋겠는데…….
하지만 하염없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요행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다리다 죽어 본 입장으로서 뭐든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는 바였다.
이렇게 우두커니 있다간 남자 코빼기도 구경하지 못하고 메말라 죽어 버리고 말 터였다. 배를 쥐고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고꾸라질 내 모습을 생각하다 소름이 끼쳐 고개를 재빠르게 저었다.
“……끔찍해!”
결단코 그런 미래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우리 일족에겐 최고의 수치이며 가장 최악으로 꼽히는 죽음이었다. 유부남을 잘못 건드려 그의 아내에게 칼 맞아 죽는 것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심장마비에 이어서 아사라니. 얼마나 보잘것없는 죽음인가!
결국 내가 택한 행동은 길게 난 수레바퀴 자국을 따라 걷는 것이었다. 해는 아직 중천에 떠 있었다. 바지런히 걸으면 먼저 간 일행이 도착한 곳에 당도하게 될지도 몰랐다.
가만히 길에 서서 다음 일행을 기다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엔 허기짐이 점점 더 심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벌써 열일곱의 생일이 한나절이나 지나있었다. 본래 군살이라고는 없는 배였지만 좀 더 말라 등가죽에 붙는 듯한 심정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힘없이 선 내 뒤로 길게 내 그림자를 늘어뜨리는 태양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우리 일족은 육체적인 능력이 매우 뛰어났고 때문에 백 미터 달리기를 하더라도 전혀 숨차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배가 가득 차야 가득한 일. 금방이라도 꼬르륵, 하고 소리가 날 것 같은 배를 움켜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못 참겠어. 배고파. 배고프다고!”
이 몸으로 느끼는 첫 배고픔이라 그런지 더욱더 고통을 참기가 힘들었다. 처음으로 느껴지는 허기짐이라는 고통이 더욱 온몸을 옥죄기 시작했다.
아, 젠장. 정말. 굶주림이라는 게 이렇게 괴로운 거였던가? 요물로 환생하고 나서부터 무언가를 섭취하지 않은 지 어언 십칠 년이라 어쩐지 생소한 감각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한데? 이러다 진짜 또 죽겠다고! 인디안 핑크색으로 곱게 발린 손톱을 응시하다가 힘없이 일어났다.
“어, 어?”
갑자기 산 저편에서 굉음이 울리며 새들이 소란스럽게 날아올랐다. 머지않은 곳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난 본능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건이 있다는 건 사람이 있단 소리가 아닌가. 설마 이런 산중에서 벌어진 사건에 남자가 없을 리는 없을 터. 드디어 이 공복을 해소할 수 있다는 기쁨에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에 대한 걱정보단 음식 섭취에 대한 기쁨이 강렬하게 들끓고 있었다.
“어서, 방비하라!”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죠?
하지만 날 반긴 것은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신나서 달려간 내 앞에는 갑작스러운 전투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척 보아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마차 한 대를 두고 성인 장정들이 날을 세우며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황했던 것도 잠시 그들이 남성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내 눈은 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밥이다 밥! 드디어 내 식량을 찾았다. 나는 기쁨에 입가에 흘러내리려던 침을 닦았다. 엄마, 저 반쯤 성공한 것 같아요. 감격에 겨워 하마터면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뭐 하는 놈들이냐! 어찌하여 주인님을 노리는 거지?”
마차를 호위하던 장정 중 한 명이 검을 고쳐 잡으며 외쳤다. 탄탄한 허벅지가 고쳐 쥔 검을 좀 더 쉽게 놀릴 수 있도록 비스듬하게 앞서 나갔다.
고놈 참 실하네. 씹고 뜯고 맛볼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난 일부러 적시를 노리기 위해 잘 자란 침엽수 뒤에 몸을 숨겼다. 이윽고 시작된 혈투, 공격하는 자들의 손속에 자비란 없었다.
저들의 임무는 그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베어 죽여 버리는 게 다인 양 무감한 표정으로 살인을 자행할 뿐이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 건 말조차도 그들에겐 침묵으로 돌아왔고 때 이른 죽음만을 선사해 줄 뿐이었다.
아무래도 방비하는 측의 패배가 불 보듯 뻔했다.
“주인님, 저희로서는 역부족입니다.”
결국 기사 복장을 한 장정 한 명이 마차의 문 가까이에 얼굴을 대어 속삭였다. 앞에서 싸우는 이들은 여전히 화려하게 검을 맞부딪치고 있었지만 기민한 감각은 그 작은 속삭임마저 놓치지 않았다.
“문 열어.”
“……나서시는 겁니까?”
“어. 문 열어.”
마차 안에서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바로 적들이 노리는 목표 대상인 것 같았다. 그런데 목표 대상일수록 더욱 안으로 파고들어 최후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오히려 밖으로 나서는 거지?
의아한 생각에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이내 흥미는 싸늘하게 식어 고개를 돌렸다. 뭐, 내 알 바인가.
나는 다시 아까 전까지 집중하던 곳을 향해 시선을 맞추었다. 정확히는 격렬하게 칼부림을 하는 남자들 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모습은 소름 끼쳤지만 그 장면은 내게 현실처럼 와 닿질 않았다. 마치 눈앞에서 막 잡아 올린 생선이 숙련된 요리사에게 다듬어지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다 이내 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목표는 단 한 가지였다. 이 전투 후 살아남을 남자들 중에서 내 밥이 될 이를 선택하는 것. 저 남자들 중 하나만 유혹하더라도 튼실한 몸 덕분에 당분간 밥 걱정은 없을 터였다.
벌컥-.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기가 막히게도 적들의 화살이 그쪽을 향해 빗발쳤다. 화살 비는 호화로운 마차 문에 빼곡하게 내리꽂혔다.
“정말이지, 귀찮게 하는군.”
마차 안의 그는 나오자마자 발검하여 화살들을 모두 쳐 내었다. 그 동작들은 모조리 군더더기 없이 말끔했다. 그의 깔끔한 동작을 보는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쟤가 바로 히든 보스였구나. 어째서 꽁꽁 숨겨 둔 채 보여 주지 않았던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밀린다 싶으니까 마지막 히든카드를 내어놓은 거였다.
검이 내려가고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별 한 점 없이 어두운 밤처럼 빛나는 머리칼, 검을 붙잡은 다부진 손. 손에 솟아 있는 핏줄은 마치 산맥의 능선 같았다. 저거, 저거 바로 물건이구나.
그를 보고 나니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열심히 침 흘리며 보고 있던 남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
헉, 세상에. 이렇게 멋진 먹이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할 줄이야! 자연스레 목표는 조정되었다. 오늘 저녁 식사는 너로 정했다, 이 남자야!
“누가 보냈는지 그딴 게 뭐가 중요한가? 다 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