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름, 장마, 미친 짓
“저기 봐. 정수혁이다.”
옆자리 친구들의 목소리에 문제집과 씨름을 하고 있던 윤재가 얼굴을 들었다.
유리 창문 너머로 운동장이 보였다.
방학을 앞둔 7월의 운동장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장마가 시작된 것을 알리는 먹구름으로 우울한 하늘, 눈에 보이는 것 같은 습기, 그리고 아직 비가 오지 않아 마른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그 운동장에서 더운 것도 모르고 농구를 하는 남학생들의 무리 속에 그가 있었다.
정수혁.
입학 초기부터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던 정수혁.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보다 정수혁을 더 유명하게 한 것은 입학 직후 치른 첫 번째 중간고사에서 단 한 과목도 예외 없이 만점을 받은 것과 더불어 중학생 시절 전국체전에서 자유형 3관왕에 오른 수영 선수였다는 전력이었다.
물론 정수혁은 그를 1년 내내 쫓아다니던 수영부의 구애를 끝내 거절했고, 가끔 학교 체육관에서 복싱을 하거나 지금처럼 저렇게 친구들과 어울려서 농구나 축구를 하는 모습만 보였다.
물론 2학년이 된 지금도 정수혁은 여전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고 있고 교내에서 치르는 모든 시험에서 단 한 번도 만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이 그를 여전히 유명인의 자리에 올려놓고 있다.
전국 수능 모의고사 상위 1%. 그냥 상위 1%가 아니라 모의고사 전국 1위.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다 가졌다.
재수가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다 가졌다.
적어도 서윤재의 눈에 비친 정수혁은 그랬다.
재수 없는 놈.
“집도 엄청 잘산다고 들었는데.”
“귀티 나잖아, 애가.”
지금 막 골대에 골을 넣는 정수혁의 모습을 쳐다보던 윤재가 다시 문제집으로 눈을 돌렸다.
다음 주가 1학기를 마감하는 기말고사다.
정수혁은 저러고 운동장에서 놀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윤재에게는 그런 여유는 없다.
한가롭게 농구나 할 여유 따위도 없고, 그런 것을 구경할 여유도 없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정수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짜증 났다.
*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윤재가 아무도 듣지 않을 인사를 하는 이유는 그녀의 인사를 듣고 달려와 주는 아지 때문이다.
10살짜리 늙은 고양이만 저를 반겨 주는 집이다.
“언니 보고 싶었어?”
묵직한 고양이를 품에 안은 윤재가 2층의 제 방으로 올라갔다.
집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윤재의 아버지는 대학교수다.
꽤 유명한 대학에서 인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딱히 서로의 생활에 간섭하지는 않는다.
간섭은 하지 않지만 참견은 한다.
간섭과 참견의 차이가 뭐냐고 묻는다면, 간섭은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지만 참견은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않으면서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버지는 간섭하지 않지만 참견하는 인간이다.
주로 윤재의 학교 성적에 대해 참견한다.
‘남들하고 출발이 똑같으면 나중에는 결국 뒤처지게 되는 법이다. 출발부터 앞서 있어야지. 그 점수로 앞설 수 있겠어?’
남들보다 앞선 출발점.
아버지의 기준으로 그것은 전교 1등, 모의고사 전국 10등 안. 그 정도다.
대학만 가면 집에서 나갈 생각이다.
아지를 데리고 집에서 나가 독립할 생각이다.
엄마는 작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물론 7년 동안 거의 왕래가 없던 엄마였다.
윤재가 열 살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
엄마는 재혼을 하셨고, 윤재는 아버지와 살게 되었다. 그것이 끝이었고, 작년 장례식에 참석할 때까지 별다른 왕래는 없었다.
장례식도 거의 남의 장례식, 모르는 먼 친척의 장례식에 간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윤재에게 갖는 관심은 딱 하나다.
좋은 대학에 수석으로 들어갈 성적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다른 말로는 아버지의 대외적인 명예에 흠집을 낼 것인가, 아닌가.
남들에게 ‘우리 딸이 간 대학’의 이름과 ‘수석 입학’을 말하면서 자랑할 수 있는가, 아니면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그것만이 아버지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걸 윤재도 안다.
넉 달 전까지는 그랬다.
적어도 3월까지는 그랬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가 시작할 때까지는 그 정도의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관심조차 사라졌다는 것을 윤재는 알고 있다.
굳이 자신이 좋은 대학을 가지 않아도 자랑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식’이 아버지에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게 정수혁이다.
3월에 일명 ‘가족’이 된 정수혁.
내년 정도에는 정수혁에서 서수혁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아버지가 새어머니와 말하는 것을 윤재도 들은 적이 있다.
아직은 정수혁이다.
하지만 3학년이 되기 전에 아마 서수혁으로 바뀔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은 아직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법적 서류를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 때문에 내년은 되어야 혼인신고를 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 복잡한 사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년에는 그 재수 없는 정수혁과 진짜 법적으로 가족이 된다.
윤재는 중학교에 다니는 내내 전교 1등을 했다.
그 성적을 놓치지 않는 것이 윤재의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정수혁을 만나며 그 자존심은 산산조각이 났다.
정수혁은 괴물이다.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모든 시험에서 그는 단 한 문제도 틀린 적이 없다.
‘엄청 비싼 과외를 받겠지. 돈 많아 보이잖아.’
‘걔 하고 다니는 거 봤어? 운동화, 그거 나 전에 명품 사이트에서 봤는데 몇 백짜리잖아. 일대일 과외는 당연히 받는 거 아냐? 그런 것도 있다고 하잖아. 컨설팅이라는 거. 과목별로 개인 과외 알선도 해 주고 하는. 걔도 그런 거 할걸?’
친구들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윤재는 속으로 웃었다.
정수혁에 대해서는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윤재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친구들은 정수혁의 겉모습만 보고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짐작하지만, 정수혁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다.
정수혁은 과외는커녕 학원 한 곳 다니지 않는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제멋대로이고 그냥 내키는 대로 돌아다닌다.
불량스럽게 돌아다닌다는 뜻은 아니다.
나름대로 시간을 정해 놓고 문화센터의 수영장에도 가고, 농구 동아리 친구들과 어울려서 땀이 흥건하게 젖도록 농구를 하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주말에는 밴드를 하는 친구들과 공연을 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정수혁의 포지션은 드럼이라고 했다.
밴드, 수영, 농구, 그런 것을 다 해 가면서 성적까지 완벽하다.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가능하지 않은 것을 해내니까 괴물이라고 부르는 거다.
윤재가 아는 정수혁은 괴물이다.
그런 정수혁을 보고 있으면 괜히 비참해진다.
새벽까지 잠도 자지 않고 문제집을 풀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렇게까지 해도 결국 1등은 정수혁이고 자신은 언제나 2등, 정수혁의 뒷자리다.
한집에 살지만 않아도, 가족이라는 시시한 이름으로 묶이지만 않았어도, 정수혁이 진짜 어떤 인간이라는 것만 몰랐어도 이 정도로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것을 경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수혁이 자신보다 조금 더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자위하며 자신의 2등을 위로했을 것이다.
전교 1등은 아니더라도 전교 2등만 해도 대단한 것이고, 모의고사 전국 석차 10위 안은 못 하더라도 20위 안도 정말 대단한 거라고, 전국의 같은 학년 학생들 중에서 20등이라고, 그 정도로 웃으며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수혁을 몰랐더라면.
그의 일상을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정말로.
그래, 몰랐더라면 정수혁이 이렇게까지 미워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정수혁이 제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윤재는 알고 있다.
이 짜증과 미움은 정수혁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것이다.
도무지 이 한계라는 벽을 넘어설 수 없는 자신을 미워해야 하고, 자신에게 짜증을 부려야 하지만 정수혁을 볼 때마다 제어할 수 없는 이 감정은, 아마 질투일 것이다.
천재를 향한 질투.
“언니 다음 주부터 시험이라서 너하고 못 놀아 줘. 미안.”
가방을 침대에 내던지고 책상 서랍에서 꺼낸 간식을 아지의 입에 짜 넣어 주며 윤재가 살며시 웃었다.
아지는 10년 전에 골목에서 데려온 고양이다.
품종이 뭔지는 모른다.
그냥 흔한 무늬의 고양이다.
10살이라는 것도 대충 짐작한 나이에 불과하다.
주차된 차 아래에서 비가 오는 날 앵앵 우는 소리를 듣고 들여다보니 그곳에 아지가 있었다.
한쪽 다리의 털이 다 빠진 채로 며칠을 굶었는지 다 죽어 가는 소리로 울어 대던 아지를 데리고 곧장 병원으로 가서 다친 다리를 치료하고 집으로 데려왔다.
그때 아지를 함께 돌봐 준 것은 엄마였다.
엄마와 아지 그리고 자신. 그렇게 세 명이서 가족처럼 지냈지만, 제일 먼저 엄마가 떠나고 윤재에게 남은 것은 아지뿐이다.
아버지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양복에 털이 묻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아지가 근처에만 가도 표정이 굳는 것을 윤재는 알고 있다.
“어, 비 온다.”
아지에게 간식을 적당히 먹인 윤재가 쏴아-소리를 내는 창문을 쳐다봤다.
오늘 온종일 하늘이 잔뜩 어둡게 우울하다 싶었는데 기어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장맛비겠지.”
뉴스에서는 계속 늦장마라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보통 6월 중순에 시작해서 7월 초순이면 끝나는 장마가 이번에는 7월 중순이 넘어가도록 시작되지 않아 다들 늦장마라고 떠들어 대는 소리를 어디를 지나든 듣게 된다.
비가 오든 장마가 시작되든, 그건 윤재와는 상관없다.
비가 내려도 고2는 고2다.
“비가 들이치겠네.”
하지만 방 안으로 빗물이 들이치는 것은 싫어서 윤재가 창문을 닫기 위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끼이익-.
오토바이가 내는 소리에 윤재가 창문 아래를 내려다봤다.
‘정수혁.’
오토바이에서 내린 것은 정수혁이다.
굵은 빗줄기를 맞으면서도 서두르는 법이 없다.
‘지금이 몇 시인데.’
윤재가 벽시계를 힐끗 쳐다봤다. 밤 11시 45분.
윤재는 11시에 학원 수업이 끝나고 곧장 돌아왔다.
몇 시간 공부를 더 하고 잘 생각이다.
그런데 이 시간에 정수혁은 어디서 뭘 하다가 돌아온 것일까.
‘다음 주 시험이 걱정도 안 되나 보지?’
하긴, 천재가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 그냥 대충 봐도 만점일 텐데.
‘감기나 걸려라.’
나쁜 생각이 밀고 올라왔다.
저렇게 비를 맞고 차라리 독감이라도 심하게 걸려 버리면 좋겠다.
그러면 적어도 이번 기말고사에서는 자신이 정수혁을 이길 수 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정수혁을 이기고 싶다.
창문을 닫은 윤재가 의자를 당겨 책상 앞에 앉았다.
문제집을 폈지만 문제가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신경질적으로 같은 문제에 계속 동그라미를 덧그리고 있을 때였다.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정수혁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문제에 엉망으로 검은 칠을 하던 윤재의 손이 멈췄다.
‘누구하고 통화하는 거지?’
윤재는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정수혁과는 거의 대화한 적이 없다.
대화할 이유가 없다.
학교에서는 반이 다르니까 굳이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고, 집에서도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
자신은 학교가 끝나면 바로 학원으로 갔다가 오늘처럼 밤 11시가 훌쩍 넘어야 집으로 돌아온다.
밤 11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오면 집은 어김없이 불이 꺼져 있다.
정수혁은 어디서 뭘 하는지 몰라도 새벽 1시 정도에 집으로 돌아오고, 그 시간에 윤재는 방에서 문제집을 푼다.
정수혁이 돌아왔다고 방 밖으로 나갈 일은 없다.
정수혁의 방은 아래층, 그리고 자신의 방은 2층이다.
각각 사용하는 화장실도 다르다.
아침에 집에서 나가는 시간도 다르다.
한집에 살아도 만날 일이 없는 충분한 이유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식으로 듣는 정수혁의 목소리가 조금 신기했다.
‘목소리가 신경질적이네.’
매사에 느긋해 보이던 정수혁도 자신처럼 짜증을 낸다는 것이 윤재는 신기했다.
신기함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윤재가 일어나 방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방문을 살짝 열었다.
“저는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런 전화, 이제 다시는 안 하셨으면 합니다.”
목소리는 불쾌함을 잔뜩 담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풍기는 불쾌함을 윤재는 알고 있다.
저건 상대방에 대한 혐오다.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아.’
예전에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자신이 꼭 저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그저 짜증스럽고 화가 났다.
부모님이 이혼한 것은 엄마의 외도 때문이었다.
집 안에서 항상 고압적인 자세를 보였던 아버지 때문에 답답하고 화가 났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외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엄마는 대학 동창과 호텔을 드나들었고, 결국에는 아버지에게 들켜 이혼으로 결론이 났다.
파경의 원인이 엄마에게 있었기 때문에 양육권은 당연히 아버지의 것이 되었고 윤재는 엄마를 따라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엄마를 만나지도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더라도 윤재 역시 엄마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다른 남자와 바람피우던 엄마는 상처였다.
그래서 일부러 전화도 받지 않고, 보고 싶다며 찾아왔을 때도 모른 척했다.
일 년, 이 년, 그러다 보니 엄마는 더는 전화를 걸어오지도, 찾아오는 것도 하지 않게 되었고 꽤 오래 연락 없이 남남으로 지내다 작년에야 사고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장례식에는 전부 모르는 사람만 있었다.
외가 쪽 친척들이라고 알은체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윤재에게는 전부 낯설었다.
처음부터 몰랐던 사람들처럼,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처럼.
“끊겠습니다.”
정수혁의 목소리는 계단 중간 정도에서 들려왔다.
그래서 방 안까지 들렸던 것이다.
만약 아래층에서 전화를 받았다면 2층에 있는 윤재의 귀에까지 절대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2층에는 무슨 일이지?’
통화를 마친 정수혁이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귀를 울렸다.
괜히 엿들은 것을 들킬까 싶어 윤재가 얼른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나 문을 닫는 것보다 정수혁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엿들었어?”
차가운 목소리였다.
조소였고, 혐오였다.
우습게도 정수혁과 나눈 첫마디, 정수혁이 제게 던진 첫마디는 혐오를 섞은 조소였다.
“일부러 들으라고 한 건 아니고?”
그러나 윤재도 할 말은 있다.
엿들어? 누가?
아래층에서 해도 될 통화를 굳이 계단 중간까지 올라와서 한 쪽이 잘못한 거 아닌가?
“그러는 너는 나 들으라고 굳이 여기까지 올라와서 전화 통화한 거 아니야? 웃기다? 거기서 그렇게 큰 소리로 전화하는데 누가 그걸 못 듣겠어?”
“문까지 열고 들었잖아.”
“내 방문인데 내가 못 여니? 그런데 너는 왜 여기까지 올라오고 지랄이야?”
이렇게 된 이상 강하게 나가야 한다.
여기서 밀리면 자신은 엿들은 사람이 되는 거다.
잘못의 시작을 정수혁에게 돌리는 것으로 상황을 바꿔야 한다.
“욕실 좀 쓰려고.”
“아래층 네 방 욕실 있잖아. 여길 왜 네가 써?”
“내 방 욕실 수전이 고장 났나 봐. 샤워기에서 물이 안 나와.”
“그러면 내일 씻어. 내일 사람 불러서 수리하고 난 다음에.”
“비 맞고 왔어.”
그건 윤재도 알고 있다.
조금 전 창문으로 수혁이 비를 맞으며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헬멧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굵은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았을 것이고, 지금 머리카락이 젖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비 맞고 와서 씻지도 말고 이대로 자라고? 너 같으면 그러고 싶겠어?”
“한밤중에 오토바이 따위나 타고 다니니 그렇지.”
2층의 화장실은 윤재 개인의 공간이다.
아버지나 새어머니 그리고 정수혁은 항상 아래층의 화장실을 사용한다.
거실에 화장실이 하나 그리고 아버지의 침실에 붙은 화장실이 또 하나, 수혁이 사용하는 방에도 화장실이 붙어 있다.
이 집의 특징은 1층의 두 개의 방에 화장실을 붙여 놓고, 거실에는 손님용 화장실 그리고 2층에는 윤재의 방과 마주 보고 있는 화장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각 방에 하나의 화장실이 있어서 가장 개인적이어야 할 공간을 침범당하지 않게 설계되었다.
이 집을 설계한 것은 참 모순되게도 죽은 엄마였다.
아버지는 인문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건축학 교수였다.
어머니는 실제로 건축 설계도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이 집 역시 직접 설계하고 지었다.
그러나 이 집에서 오래 살지는 못했다.
윤재를 위한 2층의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공간들은 전부 엄마의 솜씨다.
화장실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그 화장실을 쓰겠다고?
남자 주제에?
아니, 정수혁 주제에?
“적당히 닦고 자. 난 내 화장실을 다른 사람이 쓰는 게 싫으니까.”
“평생 밖에서 화장실도 안 다니겠다?”
그건 아니다.
학교에서 참고 집으로 뛰어가는 애들도 있다고 들었지만, 윤재는 그 정도로 결벽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에 정수혁이 침범하는 것이 싫을 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정수혁이 말이다.
“웃기지 말고, 부모님 방 화장실을 쓰든가.”
“어른들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하고 싶지는 않아.”
“나는 침범해도 되고?”
학교의 모든 여학생이 동경해 마지않는 정수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재 자신도 정수혁을 동경하는 것은 아니다.
정수혁이 눈길만 줘도 비명을 지를 생각은 조금도 없다.
“어른들 욕실은 침실을 지나야 하지만 여긴 다르잖아.”
정수혁이 윤재의 방문 맞은편에 있는 욕실의 문을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네 방을 지나가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여기를 쓰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야?”
“원래 나 혼자 쓰는 곳이었어.”
“그렇게 정해진 건 아니잖아?”
“2층은 나 혼자 쓰는 거야. 전부터 그래 왔어.”
“쓸 사람이 없었겠지.”
정수혁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방 안에 붙어 있는 욕실이 아니다.
아래층의 두 개의 욕실은 각각 방 안에 욕실이 만들어져 있어서 그 방을 쓰는 사람이 아니면 다른 사람은 사용하는 것 자체가 불편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2층의 경우는 방과 욕실이 분리되어 있다.
아래층처럼 방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굳이 쓰겠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할 구실이 없다.
그리고 정수혁의 말처럼 지금까지는 2층의 화장실을 쓸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와 윤재, 두 사람만 사는 집에서 아버지가 굳이 2층까지 와서 화장실을 사용할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정수혁이 자신의 조용하던 삶에 파문을 던진 재수 없는 놈이라는 것을 윤재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제는 화장실까지 건드리려는 인간이다.
“좀 쓴다.”
“야, 정…….”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수혁이 화장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기 직전 윤재를 향해 피식 웃었다.
“엿봐도 뭐라고 안 할게.”
뭐라고? 지금 저 인간이 뭐라고 하는 걸까?
엿봐? 뭘 엿봐.
아니, 지금 사람을 뭐로 취급하고!
화가 난 윤재가 방문을 콰당-! 하고 닫았다.
그리고 다시 의자에 앉았지만 집중이 될 리가 없다.
일부러 시험을 망치게 하려고 저러는 걸까.
그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짜증이 극도로 밀고 올라와서 문제집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더 방해하는 것은 문틈으로 스며드는 물소리 때문이었다.
방문 아래쪽이 살짝 떠 있고, 화장실의 문도 아래가 몇 센티 떠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어올 수밖에 없다.
“짜증 나게.”
윤재가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그리고 조금 시끄러운 음악을 골라 틀며 다시 문제집을 들여다봤다.
다음 주가 시험이고, 정수혁 따위에게 신경을 빼앗겨 시험을 망칠 수는 없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어폰을 끼고 문제집을 풀던 윤재가 눈을 들어 책상 위에 얹어 둔 폰을 확인했다.
2시다.
이제 슬슬 눈을 붙여야 세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서 아침 일찍 학교로 출발할 수 있다.
‘좀 씻고…….’
정수혁이 사용하고 난 다음이라 찝찝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기지개를 한번 켠 윤재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아래층은 조용했다.
이어폰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사이에 아버지나 새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셨는지 어떤 건지 윤재는 잘 모른다.
하긴 돌아오셨다고 해도 굳이 윤재가 그것을 알 이유도 없다.
한집에 살지만 남남처럼 사는 것이 이제는 익숙하다.
새어머니는 원래 남이었고 아버지는 남처럼 된 지가 오래전이다.
엄마가 외도하다가 이혼하고 집을 나가기 전부터 아버지는 남처럼 굴었다.
유전자에 아버지의 유전자가 섞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대학만 들어가면 그때는 완벽하게 독립해서 남이 될 작정이다.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 충분하다.
욕실의 문을 밀고 들어간 윤재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윤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수혁?”
지금 자기가 뭘 보고 있는 것일까.
욕조 안에 정수혁이 잠들어 있었다.
가슴까지 물이 차오른 욕조 안에 누워, 팔을 욕조에 걸친 채로 정수혁은 잠든 것처럼 보였다.
‘미친 거 아냐?’
두 시간이나 이러고 있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 걸까.
물은 벌써 식었을 것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욕조에서 잠이 드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짓이다.
게다가 남의 욕실에서 말이다.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옷이 선반에 걸려 있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그냥 두고 나가려니 씻지 못한 찝찝함보다 아침까지 이러고 있을 정수혁이 더 신경 쓰였다.
‘감기 들겠지?’
물은 지금쯤 충분히 식었을 것이다.
식은 물에 저렇게 들어앉아 잠이 든 채로 아침까지 가면 십중팔구 감기에 걸릴 것이 틀림없다.
정수혁이 감기에 드는 것은 바라는 바다.
아주 심하게 감기에 들어서 아예 시험을 보지 못하게 되면 얼마나 기분 좋을까.
‘내버려 두자.’
그렇게 생각하며 윤재가 다시 문을 닫고 나가려고 할 때였다.
“깨워야 하는 거 아냐?”
잠든 줄 알았던 정수혁의 목소리에 윤재가 놀라 당황했다.
“사람이 욕조에서 잠들어 있으면 깨워야지. 그냥 나가는 법이 어디 있어?”
“알아서 잘 일어나는데 왜 깨워야 하는데?”
윤재가 돌아서서 수혁을 노려봤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수혁의 눈에서는 조금의 졸음도 발견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잠든 것이 아니다.
그냥 잠든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친 새끼.’
“들어오긴 할 텐데, 언제 들어오나 싶었지.”
“뭐?”
수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욕조에 기대어 있던 수혁이 똑바로 앉자 욕조의 물이 찰랑거리며 그의 가슴에서 흘러내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남자, 그것도 또래 남자의 벗은 상반신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한 건 아니다.
새삼 그런 것에 얼굴이 새빨개지거나 할 것도 아니다.
정수혁을 상대로 얼굴을 붉히는 짓 따위를 하고 싶지 않다.
“엿보지 않을까 싶었는데 엿보지도 않고, 그래서 기다리다 보면 손이라도 씻으러 들어오겠지 싶어서 기다렸어.”
“그 꼴을 하고?”
“서윤재.”
정수혁이 제 이름을 부르자 윤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솔직히 윤재는 정수혁이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줄 알았다.
한집에 살지만 서로에게 관심도 없었고, 관심이 없으니 말 한 번 나누지 않았고, 하다못해 같은 식탁에 앉아 밥 한 번 먹은 적이 없다.
이름을 몰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이름을 안다는 것이 더 이상했다.
“내 이름도 알아?”
“너도 내 이름 알잖아.”
“너는…….”
너는 유명 인사잖아, 라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윤재가 간신히 삼켰다.
유명 인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더 기고만장하게 할 뿐이다.
“서윤재, 우리 같이 산 지 다섯 달 지났어. 그런데 넌 학교에서 알은체도 안 하더라?”
알은척?
알은척을 해야 하나?
가뜩이나 공부할 시간도 모자라는데 정수혁과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학교생활은 엉망이 될 것이 뻔하다.
친구들은 온종일 정수혁에 관해 물어올 것이고, 누군지도 모르는 다른 반 애들까지 자신에게 시선을 던질 것이다.
정수혁과 같은 집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그리고 또 사사건건 비교를 당하겠지.
정수혁은 전교 1등, 자신은 항상 2등.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학교에서 엮이는 것은 절대 사절이다.
“우리가 알은체해야 하는 사이는 아니잖아. 집에서도 한 마디도 안 하는데 학교에서 알은체를 왜 해야 하지?”
“가족이니까?”
“누가?”
윤재가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지금이 새벽 2시라는 것도, 지금 서 있는 곳이 욕실 안이고 정수혁이 벌거벗은 채로 욕조에 앉아 있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정수혁이 제게 한 말이 중요할 뿐이다.
가족? 별 미친 헛소리를 다 듣겠다.
피를 나눈 아버지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마당에 가족? 정수혁이 가족이라고?
“너와 나. 우리 가족 아니었어?”
“아니야.”
“올해가 지나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 법적으로 혼인신고 마치실 테고, 그러면 나도 호적에 들어가는데 그래도 가족이 아니야? 나중에 서류 떼면 그 서류가 우리를 가족이라고 말해 줄 텐데?”
“아무리 그래도 넌 내 가족 아니야. 난 너 같은 가족 없어.”
“나라서 안 되는 거야? 나와 우리 어머니가 싫어서?”
“아니. 그냥 안 되는 거야.”
“이유도 없이?”
“이유가 필요해? 내가 가족이 안 필요하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난 너하고 너희 엄마 가족으로 생각 안 해. 우리 아빠? 난 아빠도 가족으로 생각 안 해. 그러면 됐지? 난 가족 없어.”
왜 이런 말을 정수혁에게 해야 하는지는 윤재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정수혁의 도발에 넘어간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정수혁에게 속에 담고 있던,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럴 줄 알았어.”
수혁이 자꾸만 입술을 당기며 웃는 것이 윤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꼭 비웃는 것처럼, 자기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웃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뭐든지 다 안다는 것처럼.
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도.”
정수혁이 무슨 말을 하든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냥 방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에 윤재가 다시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나도 가족은 필요 없어.”
“뭐?”
오늘 정수혁은 참 사람을 여러 번 놀라게 한다.
“지금 뭐라고 했어?”
“가족은 나도 필요 없다고. 나도 너, 가족으로 생각한 적 없다고. 호적 같은 것 상관없이 처음부터 서윤재 너, 가족으로 생각한 적 없어. 단 한 번이라도 이 집 식구가 되었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런데 왜 가족이라느니 뭐라느니 한 거야?”
“떠본 거지.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놀렸다는 거니?”
“아니. 진심을 알고 싶었을 뿐이야.”
“알아서 뭐 하게?”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을까.
자기가 먼저 가족이 어쩌고저쩌고하더니, 이제는 자기도 가족으로 생각한 적 없었다고? 떠보려 한 것에 불과했다고?
“네가 날 가족이라고 여긴다면 내가 널 어떻게 할 수 없잖아. 가족이니까.”
“뭐?”
윤재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오늘 오간 이야기 중에서 가장 신박한 개소리다.
뭘 어떻게 할 수 없다고?
“가족이 아니어야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거든. 너한테.”
“그게 뭔데?”
가족이 아니어야 할 수 있는 것?
“연애?”
“너 개새끼구나?”
기가 막힌 나머지 윤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금 이 미친 새끼가 뭐라고 한 걸까. 뭐? 연애?
“왜? 가족 아니면 연애도 할 수 있고 그런 거 아냐?”
“내가 왜 너하고 연애를 해야 하는 건데? 가족만 아니면 무조건 연애하는 거니? 지금 밖에 나가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가족이 아닌데, 그러면 그 사람들하고 전부 다 연애해도 되는 거니? 가족이 아니니까? 너 미쳤니?”
아니, 무슨 연애?
연애를 꺼내기 이전에 대화도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눈도 안 마주쳐 본 사이에 무슨 연애?
가족 이전에 이건 맥락 없는 이야기다.
정수혁이 언제부터 자신을 알았다고 연애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이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내가 너를 알고 있었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어?”
“뭐?”
“이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네가 나를 알고 있었듯이 나도 너를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정말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우리 1년 넘게 같은 학교에 다녔잖아. 나는 1등, 너는 2등. 그러니까 내가 너를 모른다는 것이 더 이상할 것 같은데?”
“아는 것과 사귀는 것이 같니?”
아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지금 전교 회장이 누군지 알고 있는 것과 그 사람에게 연애 감정을 품는 것과는 다르다.
같은 학년이고 석차를 다투는 입장에서 이름과 얼굴을 아는 것과 호감을 품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무엇보다 그런 식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5개월 동안 한집에서 살며 단 한 번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을까.
윤재의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정수혁이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다.
“계속 쳐다봤는데, 너는 모르더라.”
“웃기지 마.”
“둔해, 서윤재.”
“웃기는 소리 그만하라고.”
“나는 하나도 안 웃겨. 나는 지금 제대로 말하고 있는데 너한테는 이게 웃기는 소리로 들리는 거야?”
“웃겨. 엄청 웃겨. 웃기는 개소리로 들려.”
더는 이런 말을 주고받을 생각이 없다.
윤재는 더는 이렇게 한심한 대화를 이어가기 싫다는 생각에 돌아서서 욕실의 문을 닫았다.
쾅-!
2층 전체가 울릴 정도로 세게 욕실의 문을 닫은 윤재가 자기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미친 거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다.
정수혁이 조금 이상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미쳤을 줄은 몰랐다.
난데없이 연애?
가족으로 여긴 적은 없지만 법적으로는 가족이다.
자신은 정수혁을 가족이라고 여기지 않아도 남들에게는 가족으로 보인다.
그런데 연애?
아주 미친 짓을 하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미쳤어, 정수혁.’
기가 막힌 나머지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다스리기 위해 윤재가 얼른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시끄러운 음악이 귀를 점령하고 나서야 비로소 윤재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조금 가라앉았다. 아주 조금.
*
“미쳤어!”
윤재가 가방을 메고 현관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새벽에 그 난리를 치는 바람에 그만 늦잠을 자 버린 것이다.
항상 알람은 오전 5시에 맞춰져 있다.
그러나 오늘은 알람을 듣지 못했다.
눈을 떠 보니 이미 8시였다.
8시.
미친 시간이다.
얼굴에 물만 묻히고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 뛰쳐나오는 것에만 20분이 걸렸다.
50분까지 교실에 입실하지 못하면 지각 처리가 된다.
한 번도 오점을 남기지 않았던 생기부에 지각이라는 오점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대학 진학에 있어서 생기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윤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늘 타던 버스는 이미 지나갔을 것이다.
다음 버스를 탈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지하철은 학교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이 시간에는 택시조차 쉽게 잡을 수 없다.
“제발.”
운이 좋아야 택시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이 도와서 빈 차로 지나가는 택시가 있기를 바라며 윤재가 대로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뛰어 내려갈 때였다.
끼이익-!
윤재의 바로 옆에서 오토바이가 멈췄다.
“지각이네?”
헬멧을 들어 올리며 정수혁이 피식 웃었다.
그 웃는 낯짝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누구 때문에 지각인데.
새벽에 그런 식으로 사람을 당황하게 하지 않았으면 절대로 지각할 일은 없었다.
그것 때문에 3시가 넘어 4시가 가까워졌을 때 겨우 잠이 들었고, 너무 늦게 잠이 들어 알람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뭐? 지각이네?
“태워 줄까?”
“됐어.”
“타. 태워 줄게.”
“싫다니까.”
지각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수혁이 모는 오토바이의 뒷자리에는 타고 싶지 않다.
그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학교에서 소문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차라리 지각해서 생기부에 금이 가는 것이 낫다.
큰길까지 나와 택시를 잡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는 옆에서 정수혁은 가지도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10분 정도를 택시를 잡기 위해 시간을 낭비한 윤재가 폰을 들여다봤다.
8시 35분.
택시를 잡아도 50분까지 가는 것은 이미 틀렸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정수혁이 가지도 않고 계속 옆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기도 지각한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서윤재. 그냥 타.”
대답도 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꺄악!”
수혁이 윤재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윤재의 머리에 헬멧을 씌웠다.
그러고는 그녀를 제 뒷자리에 멋대로 태운 다음 힐끗 돌아봤다.
“꽉 잡아.”
“정……. 꺄악!”
타지 않는다고, 내린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오토바이가 출발하는 바람에 윤재가 수혁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지 않으면 떨어질 것 같아서였다.
시끄러운 엔진음과 바람의 소리, 사방에서 울려 대는 시끄러운 자동차들의 클랙슨. 그리고 제가 얼굴을 묻고 있는 정수혁의 등. 그 모든 것이 윤재를 휘감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
다행히 지각은 면했다.
아슬아슬하게 교문을 통과하고 교실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정수혁이 신호란 신호는 전부 무시하고 위험스럽게 차와 차 사이를 지나온 덕분이었다.
차라리 지각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위험한 등굣길이었다.
그건 스릴이 아니라 그냥 목숨을 내놓은 위험한 짓에 불과하다고 윤재는 생각했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정수혁은 그런 것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까딱 잘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져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도 있다.
정수혁은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말로만 듣던 오토바이 폭주족 같은 짓을 밤마다 하고 다니는 건지도 모른다고 윤재는 생각했다.
정수혁이 밤에 늦게 돌아오는 이유는 아마 폭주족처럼 돌아다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는 것일까.
‘나도 가족은 필요 없어.’
정수혁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계속 쳐다봤는데, 너는 모르더라?’
계속 봐 왔다고?
그럴 리가 없다.
정말 그랬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가 없다.
‘날 놀리는 거야.’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이 그저 자신을 가지고 놀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말에 일일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정수혁에게 휘둘려서 놀림거리가 될 뿐이다.
생각에 잠겨 걷던 윤재의 이마가 부드러운 것에 퉁, 하고 부딪친 것은 그때였다.
바닥만 보고 걷느라 앞에 누가 있는지도 몰랐다.
“미안하…….”
얼른 사과하려고 얼굴을 든 윤재의 눈 안에 저를 내려다보는 시원스러운 눈매가 들어왔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운동장에서 농구라도 하고 온 듯 머리와 얼굴이 온통 땀에 젖은 정수혁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자기가 부딪친 것이 정수혁이라는 것을 안 윤재가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수혁이 윤재의 손목을 붙잡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라 아래층 계단에는 지나다니는 아이들이 없었다.
계단 아래쪽 모서리까지 거의 강제로 끌려간 윤재가 제 손목을 쥐고 있는 수혁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알은체하는 거지.”
“미쳤어?”
“이런 식으로 알은체하지 않으면 넌 또 모를 거 아냐. 내가 그냥 보고만 있으면 넌 백 년이 지나도 모를 것 같아서 이제는 알은체하기로 했어.”
“그래서 뭘 얻는데?”
“너.”
“그럴 일 없어.”
“과연 그럴까?”
이 자신만만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운동과 공부, 모든 것에서 항상 남보다 앞서다 보니 이런 것에도 그저 자신만만한 것일까?
실패라든가 진다든가 하는 것을 모르니까 이런 것도 당연히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그런 것이라면 너무 오만하다.
“교실로 돌아가야 해. 비켜.”
“너.”
낮은 속삭임과 함께 땀 냄새가 코를 스쳤다.
7월의 여름, 운동장에서 한 시간가량 뛰고 왔을 정수혁의 몸에서 땀 냄새가 풍겼다.
유난히 끈적거리는 이 느낌은 땀 냄새 때문일까 아니면 정수혁의 눈빛 때문일까.
지금 정수혁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다.
웃기는커녕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고 있다.
상대방을 주눅 들게 하는 눈동자.
하지만 윤재가 그런 정수혁을 마주 노려봤다.
“이번 시험에서 나 이기게 해 줄까?”
“뭐?”
이번에야말로 윤재는 귀를 의심했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하고, 그다음에는 화가 났다.
“지금 나 놀리는 거니?”
자신이 늘 2등이라고 지금 놀리는 걸까?
그런 거라면 진짜 최악이다.
역겨운 수준이다.
“내가 너 이번 시험에서 1등 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소리야.”
“재수 없는 새끼.”
정말 한 대 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윤재가 수혁의 가슴을 밀어냈다.
“내가 일부러 문제를 틀리면 네가 1등 하지 않겠어? 몇 문제 정도는 오답을 적어 낼 수 있다는 뜻이야. 네가 원한다면.”
“네 눈에는 내가 1등 하고 싶어서 환장한 애로 보이니?”
수혁을 쳐다보는 윤재의 눈에 혐오가 가득했다.
마치 짐승을 보는 듯한 혐오감이었다.
아무리 1등이 하고 싶어도 이런 식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적선 받듯이 1등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네가 적선해 주는 1등보다는 내 힘으로 하는 2등이 나아. 쓰레기 같은 새끼.”
그 말을 쏘아붙이듯 한 윤재가 그곳을 벗어났다.
머리 위에서 윤재의 모습이 사라지며 동시에 점심시간이 끝나는 것을 알리는 벨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으며 수혁이 픽 웃었다.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는 웃음이었다.
아니, 이미 그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그런 웃음이었다.
*
토요일 아침은 윤재에게 있어서 최악이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모두 집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주말이면 항상 여행을 다녀오는 두 사람이 여행을 취소하고 집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며 윤재는 기분이 상했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줄 알고 내려갔던 아래층에서 마침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미 짜증은 목구멍까지 차올라 버렸다.
“다음 주부터 시험이지? 공부는 잘되어 가는 거냐?”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것은 거의 한 달 만이다.
같은 집에 살아도 얼굴을 보는 일은 이렇게 드물었다.
그런데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딸에게 던진 아버지의 첫마디는 역시나 시험이다.
“열심히 하고 있어요.”
딱딱한 질문에 윤재 역시 딱딱하게 대답했다.
냉장고 문을 연 윤재가 우유와 시리얼을 챙겼다.
이것만 대충 먹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오늘은 온종일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열심히 해서 수혁이 이길 수 있겠어?”
“…….”
왜 수혁의 이름을 굳이 꺼내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꼭 저런 식으로 비교를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저건 비교가 아니다.
저건 일부러 불을 붙이는 것이다.
다 알면서 일부러 불을 붙여 한번 싸워 보라는 것이다, 정수혁과.
“나를 닮았으면 전교 1등은 놓치지 않았을 텐데, 네 엄마를 닮아 그런 거냐? 어떻게 고등학교에 올라가더니 1등 한 번을 못 해. 수혁이는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하던데 말이다.”
기분 나쁜 소리를 들으며 윤재가 시리얼을 퍼서 입 안에 꾸역꾸역 넣었다.
시리얼과 우유가 가슴에 걸리는 것 같았다.
“왜요? 제가 1등 못 할 것 같으세요?”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는 윤재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냥 기분이 나빴다.
왜 이런 일에 죽은 엄마를 들먹이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유전자 검사만 안 했을 뿐이지 아버지가 자신을 친딸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윤재는 알고 있다.
엄마의 외도 이후 아버지는 끊임없이 자신이 친딸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툭하면 저런 말을 하는 것이다.
자기를 닮지 않았다는 말. 그 말은 다른 뜻으로 자기 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노골적인 의심이다.
“제가 이번 시험에서 1등 하면, 그때는 뭘 해 주실 건데요?”
“뭘 해 주기를 바라는 거냐?”
“제가 이번 시험에서 1등 하고, 다음 학기에도, 3학년이 되어서도 계속 1등을 놓치지 않으면 제가 졸업하는 것과 동시에 독립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독립?”
“네. 독립.”
윤재가 쥐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 저를 쳐다보는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봤다.
“오피스텔 하나 구해 주시고 저 혼자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3학년 마지막 학기까지 1등을 놓치지 않을 수 있겠어? 수혁이 이길 수 있겠냐는 말이다.”
재혼하며 잘난 아들 한 명 얻었다고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더니, 본심은 정수혁도 결국 남의 아들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수혁이 없는 자리에서 저렇게 노골적으로 수혁을 이길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이길 수 있어요.”
“정말 이겨 보이면, 오피스텔 얻어 주마.”
독립. 그건 윤재의 꿈이다.
이 집에서 나가는 것.
항상 꿈꾸고 있던 것이지만 그 꿈의 방해꾼은 아버지다.
만약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자신의 독립이 무산될 수 있다는 것을 윤재도 모르지 않는다.
다만 독립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가 자신에게 애착이 있진 않다는 것에 기대를 걸고 있었을 뿐이다.
물론, 독립한다는 것은 집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 집을 어떻게 마련할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만약 아버지가 오피스텔을 구해 준다면 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고, 남보다 못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지만 결국 물질적인 도움은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럴 때 윤재는 무기력함을 느낀다.
고등학생에 불과한 자신은 어떻게 해도 넘을 수 없는 현실의 장벽이다.
그런데 지금 기회가 왔다.
“약속하셨어요.”
“1등부터 하고 나서 말해라.”
거기까지 말한 아버지가 신문을 펼치는 것을 보며 윤재는 2층의 제 방으로 돌아왔다.
1등.
정수혁이 있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윤재도 안다.
정수혁이 갑자기 병이 나서 시험을 치지 못하거나 열이 올라서 문제를 읽지 못해 실수를 연발로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실수…….”
책상 앞에 앉아 윤재가 중얼거렸다.
‘이번 시험에서 나 이기게 해 줄까?’
어제 수혁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일부러 문제를 틀리면 네가 1등 하지 않겠어? 몇 문제 정도는 오답을 적어 낼 수 있다는 뜻이야. 네가 원한다면.’
그건 독이 든 사과다.
먹으면 반드시 탈이 난다.
하지만 탈이 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은, 지금은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 독이 든 사과를 먹어서라도 1등을 하고 싶다.
그래서 이 집을 당당하게 나가고 싶다.
그날 저녁, 윤재는 자정이 넘어갈 때까지 잠들지 않고 수혁을 기다렸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11시가 넘어갈 무렵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있다.
12시 30분이 넘어갈 즈음에 밖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수혁이 돌아온 것이다.
현관문이 열리고 수혁이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윤재는 거실 소파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뭐야? 거기서 뭐 해, 서윤재?”
거실 소파에 앉은 윤재를 발견한 수혁이 헬멧을 옆구리에 끼고 다가왔다.
그런 수혁을 힐끗 쳐다본 윤재가 말없이 일어나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던 도중에 멈춰 계단 아래에서 저를 쳐다보고 있는 수혁을 한번 돌아본 다음 다시 계단을 올라가는 윤재의 귀에 저를 따라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감겼다.
정수혁이 지금 제 뒤를 따라 올라오고 있다.
윤재의 손바닥에 땀이 찼다.
뒤에서 울리는 발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귀를 울려 댔다.
방으로 들어온 윤재는 일부러 문을 닫지 않았다.
그 문을 닫은 것은 그녀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선 수혁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수혁에게 나가라거나 왜 들어왔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너 진짜, 나 1등 만들어 줄 수 있는 거니?”
윤재가 다짜고짜 그 말부터 내뱉었다.
“적선은 싫다며.”
“이번만 말고, 고3 마지막 기말고사까지 전부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해 줄 수야 있지.”
뉘앙스에서 불길함이 풍겼다.
“내가 원하는 걸 네가 주면, 나는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자신이 원하는 것은 시험 성적이다.
그러면 정수혁이 원하는 것은 뭘까?
모든 것을 다 가진 정수혁은 뭘 원하는 것일까.
“너.”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말해. 난 지금 진짜 진지하니까.”
“내가 가지고 싶은 거 너 하나밖에 없어, 서윤재.”
“날 언제 봤다고.”
“1년하고 7개월 동안 봤는데, 그거로 모자라?”
“모자라.”
“10년을 쳐다봤다고 해도 모자란다고 말할 생각이지, 서윤재?”
“아마도.”
“부탁하는 자세가 참 고자세다. 그렇게 생각 안 해?”
“네가 먼저 제안한 거야.”
“하긴, 그렇긴 하지. 내가 먼저 시험 망쳐 준다고 하긴 했지.”
“네가 제안했고 난 그걸 받아들일 마음이 생긴 것뿐이야. 하지만 적선 받듯 그냥 받지는 않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곧 죽어도 이건 정당한 거래라고 주장하고 싶은 윤재의 오기였다.
그냥 적선 받는 것이 아니라, 이건 정당한 거래다.
1등과 다른 것을 교환하는 것뿐이다.
“원하는 거라면, 서윤재 너라니까.”
“내가 뭐?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데?”
“자자, 나하고.”
“뭐?”
윤재의 얼굴이 구겨졌다.
“나하고 자자고. 섹스 몰라? 나하고 섹스하자고. 나하고 자 주면 졸업할 때까지 계속 너한테 져 줄게.”
“미친 거 아냐?”
“미쳤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안 미쳤어. 지극히 정상이야.”
“돌았구나?”
“돌았다는 말은 어느 정도 맞아. 너한테 돌았으니까. 그러니까 너한테 돌아 버린 놈에게 다리 좀 벌려 주고 대신 시험 1등은 네가 가져가면 되잖아. 이 정도면 수지 타산이 맞지?”
수혁이 질 나쁜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 윤재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시험 1등을 놓고 몸을 허락할 수는 없다.
정수혁에게 몸을 허락하고 나면 그 뒤에 뭘 또 요구해 올지 알지 못할 일이다.
정수혁은 절대로 한두 번으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관계를 이용해서 나중에 협박해 올 수도 있다.
“선택해. 나하고 자고 1등을 가져갈 건지, 아니면 나하고 자지 않고 계속 2등이나 하고 있든지.”
수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에 반해 윤재의 눈동자는 흔들렸다.
수혁이 단호하면 단호할수록 윤재는 더 흔들렸다.
그리고 흔들리던 윤재가 마음을 굳혔다.
“삽입은 안 돼.”
이게 윤재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이다.
“삽입만 안 하면,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삽입 없는 섹스가 가능하다고 생각해?”
“싫으면 그만둬. 나도 그럴 마음 없으니까.”
지금 윤재는 줄다리기를 하는 중이다.
정수혁이 정말 자신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면, 1년 7개월 동안 봐 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붙잡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삽입은 안 된다는 조건 역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삽입만 안 하면 돼. 만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이것이 윤재 나름대로 최후의 배수진이었다.
“그러면, 어디까지 되는 건데?”
“만지는 것까지만.”
“비싸네, 서윤재.”
“그래도 할 건지 말 건지만 정해.”
“해야지. 서윤재를 만질 수 있는데, 해야지.”
대체 왜 정수혁이 자신에게 이렇게 집착하는지 윤재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수혁과 자신 사이에 어떤 교집합도 없다.
그런데 정수혁은 자신에게 왜 이러는 것일까.
그렇다고 자신이 엄청나게 미인이냐? 그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의심하고 있을 때 수혁의 손이 윤재의 어깨에 얹어졌다.
“지금 뭘…….”
“만지게 해 준다고 했잖아.”
“지금 아래층에 부모님이 계셔.”
“소리만 안 내면 괜찮아.”
“하지만…….”
“만지기만 할 거야. 만지기만.”
속삭여 오는 목소리에 윤재가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만지는 것만.
그래, 만지는 것뿐이라면.
털썩.
윤재가 쓰러지듯 눕자 침대가 출렁거렸다.
매트리스와 함께 흔들리는 윤재의 위로 수혁이 올라탔다.
제 위에 올라앉은 수혁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 묵직한 무게감에 윤재가 숨을 헐떡였다.
수혁의 손가락 끝이 윤재가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에 닿았다.
툭.
단추 하나가 풀리자 윤재의 깨끗한 쇄골이 드러났다.
툭.
손가락이 가볍게 단추를 풀며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여섯 개의 단추는 저항도 없이 풀렸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저를 내려다보는 수혁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윤재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살짝 깨무는 것으로 떨림을 숨겼다.
벌어진 셔츠 안으로 들어온 손이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었다.
가볍게 후크가 풀린 브래지어가 제 몸에서 벗겨지는 것을 윤재도 느꼈다.
드러나는 가슴을 가리는 대신에 손으로 시트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괜찮아. 만지는 것뿐이야.’
진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으면 금방 지나갈 것이다.
사람이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줘야 하는 법이라는 건 윤재도 안다.
그건 어린아이도 아는 간단한 법칙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중요한 것을 얻으려면 중요한 것을 값으로 치러야 한다.
이건 아버지라는 존재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한 대가다.
저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딸로 여기지도 않으면서도 놓아주지 않는 아버지라는 존재에게서 완벽하게 달아나기 위해서는 정수혁과 이런 식의 거래를 할 수밖에 없다.
조금 비굴해도, 조금 구차해도 이 시간은 금방 지나가고 나중에는 다 잊어버리면 된다.
악몽을 잊어버리듯이 말이다.
‘싫어…….’
수혁의 손바닥이 제 가슴을 덮자 윤재가 숨을 삼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더운 숨결이 저를 덮는 감촉에 눈을 뜬 윤재는 코앞까지 다가온 수혁의 얼굴에 당황했다.
수혁은 허리를 숙이고 윤재의 바로 앞까지 얼굴을 내린 채였다.
윤재가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수혁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단숨에 삼켰다.
“흡!”
입술이 닿는 순간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뜨거움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부드러운 입술, 그다음으로는 거친 혀였다.
다소 거칠게 빨아올리는 수혁의 숨결에 윤재의 입술과 숨결 그리고 혀까지 남김없이 그에게 휘감겼다.
“읍. 흐읍.”
혀뿌리까지 휘감고 빨아올리는 탓에 맞물린 입술 사이로 삼키지 못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흡.”
키스는 처음이다.
첫 키스를 정수혁과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윤재가 수혁의 어깨를 꽉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밀어내듯 그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수혁은 오히려 더 거칠게, 더 깊게 윤재의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자신을 송두리째 삼키려 드는 입술에 윤재가 정신없이 숨을 헐떡였다.
그 헐떡이는 숨은 모조리 수혁에게 삼켜졌다.
그리고 난폭하고 거친 키스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수혁의 입술이 윤재의 가슴을 물었다.
“하, 하지 마!”
젖은 혀가 가슴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핥자 윤재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쉿. 아래층에서 깨기를 바라?”
수혁의 낮은 속삭임에 그제야 윤재는 아래층에 부모님이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집은 방음이 가장 취약한 집이다.
문틈이 떠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높이면 아래층까지 분명히 전달될 것이다.
“흐윽.”
제 침이 묻은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비트는 수혁의 짓궂은 행동에 윤재가 터져 나오려는 숨을 애써 참으며 헐떡였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즐기듯이 젖꼭지를 비틀던 수혁이 다시 그것을 입에 물고 씹었다.
“흑.”
아릿한 아픔이 묻어날 정도로 젖꼭지를 씹던 수혁이 유륜과 함께 꼭지를 빨아 당겼다.
젖은 유륜이 수혁의 입 안에서 제멋대로 굴려졌다.
자극을 받아 단단하게 일어선 젖꼭지가 그의 혀에 굴려질 때마다 윤재의 등이 화끈거렸다.
“응, 흐응, 읏.”
수혁의 이가 젖꼭지를 씹고 혀가 그것을 휘감아 빨아올릴 때마다 윤재가 허리를 움찔거렸다.
아프고 얼얼했다.
귀가 화끈거리고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양쪽 젖가슴에 제 흔적을 잔뜩 남긴 후에야 수혁은 얼굴을 들었다.
“자, 잠깐만…….”
허리를 든 수혁이 제 하체에서 바지를 벗겨 내자 윤재가 당황해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뻗은 손이 무색하게 하체에서 팬티만 남기고 바지가 벗겨졌다.
“걱정 마. 삽입은 안 해. 약속했으니까.”
겁먹은 윤제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은 수혁이 젖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씨발. 서윤재. 왜 이렇게 야하냐?”
윤재의 팬티 위, 가운데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수혁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윤재는 그가 흥분한 모습은 처음 봤다.
정수혁은 늘 여유만만하고 느긋한 모습이었다.
무엇에도 쫓기지 않고, 항상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처럼 그렇게 느긋했던 정수혁이 지금은 잔뜩 흥분해서 거친 숨결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여기, 젖었어. 그거 알아?”
팬티의 가운데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수혁이 짓궂게 눈을 휘었다.
그 손가락이 누를 때마다 팬티에 음영이 생겨났다.
팬티의 가운데가 젖어 들며 얼룩이 번져 나가는 것을 보며 수혁이 입술을 핥았다.
“으응, 읏.”
손가락이 집요하게 팬티의 가운데를 문질렀다.
잔뜩 젖어 버린 팬티가 속살에 달라붙어 왔다.
윤재의 호흡도 이미 거칠어진 지 오래였다.
그 손가락이 제 팬티 위를 문지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윤재를 휘감았다.
싫은데, 분명히 싫은데 다리가 저절로 벌어지며 저절로 허리가 흔들렸다.
“아, 읏.”
팬티가 흥건하게 젖어 들었다.
손가락이 그 위를 움직일 때마다 윤재의 허리가 함께 흔들렸다.
흠뻑 젖은 팬티를 수혁이 옆으로 젖힌 것은 그때였다.
차갑게 젖은 팬티의 한쪽이 젖혀지며 그 안쪽으로 공기가 스며들자 윤재가 허리를 움찔거렸다.
젖혀진 팬티 사이로 수혁의 손이 파고들었다.
“아……!”
팬티 안으로 파고든 손이 그녀의 중심 깊은 곳으로 찔러 들어왔다.
“하읏.”
윤재의 고개가 젖혀졌다.
축축하게 젖은 속살 안으로 파고드는 수혁의 손가락을 윤재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길고 굵은 손가락이 그녀의 안에서 움직였다.
젖은 팬티 안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울리며 그녀의 얼룩진 팬티가 불룩거렸다.
속살을 후비는 젖은 소리가 팬티 밖으로 흘러나왔다.
“하아, 읏. 하읏.”
젖가슴을 입술로 깨물며 아래에 박은 손가락을 움직여 대는 수혁의 아래에서 윤재가 몸을 꿈틀거렸다.
구부린 엄지의 끝이 그녀의 둥근 살점을 문질러 댔다.
“하읏, 으응, 응…….”
윤재의 허리가 들썩였다.
다리를 벌린 채로 윤재가 허리를 흔들며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신음을 들으며 수혁의 손놀림이 더 빨라졌다.
팬티 안에서 사납게 움직이던 손이 빠져나가자 윤재의 벌어진 입술에서 긴 숨이 새어 나왔다.
생경한 열기에 녹아내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윤재가 그저 숨만 헐떡이고 있을 때 그녀의 젖은 팬티 위를 젖은 것이 눌러 왔다.
손가락이 아니었다.
“흣.”
그것이 수혁의 입술이라는 것을 윤재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정수혁이 그녀의 잔뜩 젖은 팬티 위에 입술을 내린 것이다.
애액으로 흥건하게 젖어 거무스름한 음모와 그 안쪽의 살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팬티 위로 입술을 내린 수혁이 갈라진 얼룩에 혀를 대고 꾹꾹 눌러 댔다.
“아읏, 흣.”
젖은 팬티 위를 혀로 꾹꾹 누르다가 팬티와 함께 속살을 물어뜯는 행동에 윤재는 숨이 막혀 왔다.
무릎을 세우고 다리를 벌린 채로 윤재가 허리를 들썩였다.
젖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밀어내고 싶은데 밀어낼 수가 없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의 하체에서 젖은 팬티가 끌려 내려갔다.
완전히 드러난 가랑이 사이로 수혁이 얼굴을 파묻었다.
“하윽!”
윤재의 입술에서 신음이 터졌다.
수혁의 더운 혀가 그녀의 입구를 핥아 올렸기 때문이다.
두 손으로 그녀의 입구를 벌리고 그 중심에 혀를 대고 핥기 시작하자 윤재의 얼굴이 귀까지 전부 벌겋게 달아올랐다.
굵고 단단한 혀가 안쪽으로 파고든다 싶더니 입술이 그곳을 삼키고 빨아들였다.
“하읏, 아, 아흑.”
뜨거운 입술이 저를 삼킬 때마다 윤재가 허리를 떨었다.
정수혁은 마치 짐승처럼 저를 먹어 치우고 있었다.
게걸스럽게 가랑이 사이를 탐하던 수혁이 입술을 닦으며 얼굴을 들었다.
몸을 일으킨 수혁이 바지의 버클을 푸는 것이 윤재의 눈에 들어왔다.
바지를 내리자 잔뜩 부푼 브리프가 드러났다.
브리프가 팽팽했다.
그 안에 감춰진 것이 얼마나 거칠게 성났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안 돼, 삽입은…….”
그제야 윤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삽입은 안 된다.
만에 하나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저지르는 것은 싫다.
아버지에게서 자유를 얻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하는데, 그 자유를 정수혁에게 또다시 속박당하는 것은 싫다.
“안 해. 걱정 마.”
수혁이 몸을 내렸다.
그러자 그의 하체가 윤재의 가랑이 위로 문질러졌다.
단단한 중심을 감춘 브리프로 윤재의 젖은 가랑이 위를 비비며 수혁이 거친 숨을 헐떡였다.
수혁은 마치 진짜 섹스를 하듯 윤재의 위에서 하체를 문질렀다.
브리프를 입었다고 해서 그 안의 단단한 것이 감춰질 리가 없었다.
그 단단하고 굵은 것이 제 위를 문지를 때마다 애액이 흘러나와 그의 브리프를 적셨다.
두 손으로 윤재의 어깨 위를 짚고 수혁이 하체를 움직였다.
제 어깨 바로 위를 짚은 팔뚝에 시퍼런 핏줄이 꿈틀거리는 것이 윤재의 눈에 들어왔다.
잔뜩 흥분한, 그러나 애써 참고 있는 그 표정도 눈에 들어왔다.
그 이마에 핏대가 서 있었다.
꽉 다물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와 윤재의 얼굴을 적셨다.
“윽!”
단발의 신음과 함께 수혁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윤재는 그의 하체가 닿아 있는 제 가랑이 위쪽이 뜨겁게 젖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브리프 안에서 사정한 탓에 정액이 브리프를 적시고 윤재의 하체까지 함께 적신 것이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수혁이 그녀의 위에서 내려와 그 옆에 엎드렸다.
“나중에는, 안에다 하게 해 줄 거지?”
곁에 엎드려 제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여 오는 목소리에 윤재가 고개를 돌렸다.
“그럴 일 없어.”
냉담하게 대답하지만 아직도 가랑이 사이가 화끈거렸다.
가랑이 사이의 음모에 남아 있는 수혁의 타액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아직도 그 혀가 제 몸을 탐하는 것만 같았다.
*
그 후로 수혁의 요구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부모님이 외출한 일요일의 오후, 2층이 아닌 거실에서 윤재는 수혁에게 안긴 채로 숨을 헐떡이는 중이었다.
거실 소파, 아버지가 늘 앉아서 신문을 보는 장소에서 수혁의 다리 사이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 손에 가슴이 만져지며 윤재가 숨을 헐떡였다.
수혁의 손은 그녀의 가슴과 가랑이 사이에서 움직였다.
목덜미를 물어뜯으며 수혁이 윤재의 가랑이 사이에 넣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벌어진 속살 안쪽으로 손가락이 들락거릴 때마다 질척질척 소리가 울렸다.
수혁의 손가락을 타고 애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제 엉덩이 쪽에 닿는 단단한 것이 성난 수혁의 분신이라는 것을 윤재도 알았다.
그것이 금방이라도 안으로 찔러 들어올 것처럼 윤재의 뒤를 꾹꾹 눌러 댔다.
상체에 셔츠 한 장만 걸쳤을 뿐 벌거벗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윤재가 가끔 현관문을 힐끗거렸다.
부모님은 언제 돌아오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애초에 귀가 예정 시간 같은 것을 말해 주는 법이 없었다.
조금 열어 놓은 창문 너머에서 빗소리만 들렸다.
어제 잠깐 그쳤던 장맛비가 밤부터 다시 내리기 시작하더니 오늘은 그치지도 않고 온종일 내리고 있었다.
“서윤재. 네 여기, 엄청 조인다는 거 알아? 내 걸 넣으면 그것도 조이겠지?”
“꿈 깨. 절대 안 돼.”
수혁의 손에 만져지며 잔뜩 달아올라 있었지만 윤재가 단박에 그의 말을 잘랐다.
아무리 흥분해도 넘어갈 생각은 없다.
정수혁과 자신의 선은 여기까지다.
만지는 것, 그 이상의 선은 넘을 생각이 없다.
“이렇게 질질 싸면서도 싫다는 거야?”
“우, 웃기지 마.”
“나 지금 터지기 일보 직전이야, 윤재야.”
“알아서 해.”
“박는 게 싫으면, 빨아 줄래?”
“미친.”
뭘 해 달라고?
윤재가 제 몸을 만지고 있는 수혁을 밀어냈다.
소파의 가장자리로 물러나 수혁을 노려보는 윤재의 눈에 거친 숨을 흘리는 남자가 들어왔다.
동갑의 소년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열여덟 살의 소년의 눈이 저렇게 사납게, 맹수처럼 사납게 저를 노려볼 수 있는 것일까.
탐욕스럽고 사나운 눈매였다.
정수혁은 항상 저런 식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언제부터 자신을 저렇게 보고 있었던 것일까.
“이렇게 됐잖아. 그러니까 네가 입으로 해.”
브리프를 내린 수혁이 그 안에서 튀어나온 분신을 손으로 쥐었다.
그의 말처럼 그의 분신은 이미 뻣뻣하게 부풀어 말간 것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거 빨면, 박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빨기 전에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시선에 결국 윤재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벌린 가랑이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것을 입에 넣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입 안 가득 들어차고도 다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손으로 쥔 채로 윤재가 입술을 움직였다.
자신이 제대로 하는지 어떤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입에 물고 입술을 조이고 얼굴을 움직였다.
그것이 입 밖으로 빠져나갈 때마다 침이 입술 주위에 번졌다.
머리 위에 거친 숨소리가 내려앉았다.
“하아, 하아…….”
그 사나운 숨소리를 들으며 윤재가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움직였다.
머리 위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며 마침내 입 안에서 뜨거운 것이 퍽, 터졌다.
입 안으로 쏟아지는 것에 기겁하고 입술을 떼려고 했지만, 수혁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흡, 흡!”
삼키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 미지근한 것이 기어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죽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오만한 포식자의 웃음소리였다.
재수 없는 정수혁의, 승자의 웃음소리였다.
그리고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무슨 비가 이렇게 내리는지…….”
현관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들려온 소리는 새어머니, 그러니까 수혁의 어머니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현관 앞에 우뚝 선 두 사람의 시선을 고스란히 느끼며 윤재가 얼굴을 들었다.
그때까지 그녀의 머리를 누르고 있던 수혁이 손을 풀어 줬기 때문이다.
수혁의 시선도 현관을 향했다.
거실을 가득 채운 더운 열기.
텁텁한 땀 냄새에 섞인 음란한 냄새.
그리고 셔츠 한 장만 입고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 소파 앞에 앉아 있는 윤재와 브리프를 허벅지까지 내리고 있는 수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뚝.
미처 다 삼키지 못한 하얀 정액이 윤재의 벌어진 입술에서 떨어졌다.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아아악!”
새어머니의 비명이 귀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