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밤 광향 호텔 살인 사건에 이은 두번째 살인사건
발생.
지난달 7일 광향 호텔 뒤 야산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과 같은
유형의 살인 사건이 '미산 아파트 단지' 뒤 야산에서 발생했다.
범인은 살해후 성난 개를 이용해 사체를 파손한 것으로 추정.]
'참 무서운 세상이군.'
나는 다방에서 후배 태민을 기다리며 신문을 읽다가 혼잣말처
럼 중얼 거렸다. 누구의 짓인지 잔인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생각
을 했다.
다방은 차분한 분위기 였으며, 자욱한 담배연기와 천정의 샹
제리엘 불빛이 혼합된 지하다방 이었다. 은은히 깔려 나오는 죠
지윈스턴의 'Thank Giving'은 더욱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
었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치 못한 나는 두리번 거리며 모든걸
관찰하며 태민이 녀석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다방은 제법
넓었다. 한쪽 카운터를 비롯해서 20여개의 테이블이 놓여있고 테
이블 사이를 가로막은 앝으막한 담 사이로 퇴색한 造花가 얼룩
덜룩 피어 있었다.
오른쪽 벽면엔 레오나르 다빈치의 '모나리자', 빈센트반 고호
의 '해바라기' 그리고 작자를 알 수 없는 여인의 그림의 걸려있
고 반대편엔 담쟁이 덤굴을 흉내낸 플라스틱 풀이 비너스를 휘감
고 있었다.
이미 차가와진 커피를 조금 마시고 있을때 태민이 녀석이 나타
났다.
"형, 미안해. 좀 늦었지?"
"임마, 좀 늦었지? 너 기다리느라구 눈알 툭 튀어나오는 줄 알
았다."
"일찍 나올려구 그랬는데 어쩌다 보니 좀 늦었지 뭐유. 미안해
다시는 안 늦을께."
"다시는 너 안 기다리구 만다."
"에이 형 화났어? 좀 늦었다고 삐치긴, 그러지 말고 화 풀어.
음?"
"이 자식이 징그럽게 왜이래"
"화 풀라니까."
"알았어 임마 근데 만나자는 용건이 뭐야?"
"에이, 다 틀렸지 뭐유."
"뭐가 틀렸는데?"
"난, 형이 걱정되우. 이렇게 꾀죄죄하게 살다가 노총각으로 늙
어 죽는거 아닌가 해서, 여자애 하나 소개시켜 줄려구 했는데 요
앙큼한 계집애가 어딜 갔는지 전활해두 안받잖아."
"그래 겨우 만나자는 이유가 여자 소개 시켜 줄려구 그랬냐?"
"형두 참 딱하우, 그 나이 되도록 장가도 못가고 사귀는 여자
도 하나 없이 무슨 재미로 살아가는지.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가
우, 뭐 여자가 많아서 고르는 것두 아니구 그 흔한 계집애 하나
없어서 매일 화실에나 처밖혀서 裸體(나체)나 그리구 있구, 그게
무슨 재미유?"
"고양이 쥐 생각하네."
"형두 한 번 보면 반할거유, 大學다닐때 만난 앤데, 성적두 서
글서글한게 괜찮구, 그 정도면 얼굴도 미스코리아 감인데다가,
잘 빠진 몸매하며 키는 좀 작지만, 한가지 흠이라면....."
"이 자식 봐라, 나 소개 시켜 준다면서 침은 왜 니가 흘리고
그래?"
"하여간에 형두 보면 반할 거유, 형이 아무리 안경 치뜨고 찾
아봐두 그런애 찾기는 힘들걸, 좌우간에 오늘 데리고 나왔어야
하는건데."
"몇살이나 됐는데?"
형보다 두살 아래니까."
"스물 여섯 이라면......"
"왜 구미 땡기우? 나갑시다. 미안한데 내가 술이나 한잔 살테
니까, 아까 오면서 좋은데 봐둔데 있으니까......"
태민이 차를 세운곳은 번화가를 벗어난 길거리의 자그마한 포
장마차였다. 난 태민에게 애교조의 투덜거림으로 투덜대며 포장
마차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임마 좋은데 있다구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 곳이 겨우 포장마
차냐?"
"좋찮우, 우리가 언제 고급 술집에서 술 먹었수. 경치좋구 또
안주 푸짐하구, 값싸구, 우리 처지에 이정도면 족한거 아니유?
와! 이 펄떡 펄떡 뛰는 똥집하구 싱싱한 꼼장어, 와! 이건 꼬치
아냐!"
태민은 내가 포장마차로 데려 왔다고 투정을 하자, 내게 이 포
장마차가 좋다는 걸 한동안 설명했다.
"추접떨지 말구 잔이나 받어."
"내 잔부터 받으슈."
태민은 먹거리에 걸신 들린 놈처럼 게걸 스럽게 먹어댔다.
"형의 노총각 탈출을 위하여!"
"위하여"
후배중에 태민이 녀석 만큼이나 내 생각을 해 주는 녀석도 없
엇다. 한살 차이라고 맞먹으려구 드는 거나 가끔 술값 청구서가
내게로 오는것 빼구는 참 착한 놈이다.
"형 아직도 총각이유?"
"이 자식이."
"그거는 한거유?"
"너 임마, 취했냐?"
나는 낮 뜨거워짐을 느꼈다. 아주머니의 눈치가 보여 흴끈 쳐
다보니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안주를 구려고 버너 불을 불이고 있
었다. 안주굽는 냄새와 사람들 살아가는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해
왔다. 얼마만에 맡아보는 사람냄새 인지 몰랐다.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사람의 냄새를 잊고 살아가는걸 모두 아는지 모
르는지. 지난 겨울 등산때의 일이 어렴풋이 지나쳐갔다. 지난겨
울 자살을 결심하고 산에 올랐을때 눈 덮인 산속에서 2박3일을
헤메고 자살할 용기가 없어 下山할때 人家가 가까워지면서 맡았
던 반가운 사람 냄새가 지금 이 도시에서 풍기고 있었다.
"형 하구 이렇게 술 먹어 보는 것두 오랬만이지?"
"그래 그게 벌써 언제야....."
"고등학교때 생각나우? 자율학습 튀고 과자 한봉지 사다가 운
동장에서 술 먹을때...그때가 참 좋았는데, 이슬이 내리면 축축
한 공기속에서 취하는 줄도 모르고 냅다 마셔 대다가는 안주라고
다 떨어지면 나발불다, 그냥 쓰러져서 자고 일어나면 새벽이구,
주린배를 포크 하나 들고 아침부터 친구놈들 도시락 뒤져먹
던,...그땐 욕도 참 많이 얻어 먹었는데."
술 한잔 한잔이 들어갈 때마다 새록새록 피어나는 고등학교적
이야기며 군대 얘길 하다 돌아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여자에 관한 관심이 내게서 불어 일어나
기 시작했다. 그건 내게 있어서 태민이 녀석이 믿을 수 있는 녀
석이고 한번도 내게 실없는 소릴 해본 적이 없다는데 있다. 그
후 한달쯤 지난후 태민의 소개로 나는 남주를 만날 수 있었다.
남주는 태민의 말대로 정말 반할 정도였다. 처음 만난것 같지
않은 그런 느낌. 그리고 대화를 술술 풀어 나가는 남주의 유창한
말 솜씨, 윤기가 흐르는 보드러운 단발머리, 짙은 눈섭, 동그랗
게 커다란 눈동자, 약간 높은 코, 하얀피부, 도톰하면서 귀엽고
발간 입술, 다홍빛 볼, 툭 불거진 가슴, 가늘고 긴 손가락, 빨간
메뉴큐어칠한 손톱, 쭉 빠진 다리, 초록색 구두 그리고 쾌활한
성격. 난, 정말 아름다운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엇다.. 이런걸
두고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동일이라고 합니다."
"강남주라고 해요. 태민씨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화가시라
구요?"
"예, 아직은 많이 서툴지만..."
"어떤 종류의 그림을 그리시나요?"
"우리가 흔히 서양화라고 하는 것을 주로 그립니다."
"피카소 같은거요?"
"전 추상화는 소질이 없나 봅니다."
"그럼 초상화도 그릴줄 아세요?"
"예."
"그럼 저 초상화 한장 그려주실래요..헤헤 농담이에요"
"아닙니다 그려드리죠. 그런데 남주씨는 어떤 일을 하시죠?"
순간 남주의 경직되어지는 얼굴 근육을 볼 수 있었다. 뭔가 긴
장감 같은 것이 내게도 느껴져 왔다.
"태민씨가 아무말 않던가요?"
"아무런 말도 없었어요. 그저 남주씨 자랑말고는."
"태민씨는 그런말 하고싶지 않았나 보군요. 전 솔직히 말하면
술집에 다녀요. 남들이 절 호스티스라고 하더군요. 전 그런거 신
경 안써요. 남들이야 뭐라든 가진자들에겐 턱없이 친절하고 못가
진 자에겐 냉혹한게 세상 아닌가요? 그런말 있잖아요.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구요"
처음 남주가 호스티스라는 말을 거침없이 내 놓았을때 당황 했
었다. 그러나 남주의 신념에찬 목소리가 나로 하여금 그녀를 이
해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무언가 사연이 있겠지'
"왜요. 놀라셨어요?"
"예, 조금"
난 솔직히 대답을 했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어떤일을 하든간에, 자기가 어떤 마음을
먹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제가 순결한
여자라는 건 아녜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여자인지도
몰라요."
난 내가 지금 무언가 실수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어쩔줄
몰라했다.
"너무 비관론자적인 생각을 가지실 건 없습니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할 순 없으니까요."
"예술가들 처럼 말씀 하시는 군요"
난 남주의 그 당당함에 눌려 버렸다. 그녀는 내가 갖지 못한
용기를 갖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남주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날의 대화는 주도권을 남주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리고 남주
는 그날부터 날 오빠라고 불렀고 우리는 여러차례 만나면서 빠르
게 친해졌다.
남주를 대하고 있으면 속이 시원해 졌다. 내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세상에 대한 비판을 그녀가 대신해 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
다. 그건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속에
파고 들어온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첫 만남에서 부터 내 모든걸 빼앗아 버린 여자, 남주. 그녀는
신비스러운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정도 눈총은 받으리라. 그러나 그 눈총은 둘째 치고라도
가장 문제인건 어머니였다. 내 어머니는 전쟁통에 돌아가신 아버
지 몫까지 희생에 희생을 거듭 하시면서 나를 키워 주셨다. 그리
고 어머니는 내가 법관이나 변호사가 되길 바라셨다. 나는 그동
안 어머니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고등학교에 입
학하기 전까지 줄곳 우등생이란 칭호를 들으며 살아왔다. 그때까
지 받은 상장을 모으면 책 두어권은 만들 수 있을 분량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기대를 져버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
터 내게서 숨은 재주를 발견해냈다. 그것은 그림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말리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셨지만 나를 꺽지는
못하셨다. 나는 미술의 길로 접어들었고 미대에도 합격을 했다.
어머니의 결론은 어머니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림을 그리라
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착하고 행실바른 며느릴 얻어 손자 둘, 손녀 둘을 낳
게 하시겠다고 늘 입버릇 처럼 말씀하셨다. 그런 어머니께 남주
이 이야기를 한다면 어머니는 아마도 기절하시고 말것이다. 머릿
속에 괴로웠다.
그림이 잘 되질 않았다. 선은 생명을 잃고 아무렇게나 흘러 갔
으며 물감은 제 색을 내지 못하고 붉은 색은 주홍으로 파랑색은
남색으로 변해 버렸다. 당분간은 어머니께 말씀드리지 않기로 했
다.
나는 남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신호가 울렸는데도 남주
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8번, 9번.
"여보세요?"
잠이 덜 깬 듯한 아니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주야 나야."
"오빠 저....아!."
"남주야, 내말 들리니?"
다급해 외쳤으나 남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비질하는 듯
한 소리가 잠시 들렸을 뿐이다.
화실을 벗어나 택시로 5분 거리인 남주의 집에 도착 했을때 남
주이 방문앞에는 남주의 초록색 구두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남주야!"
"오빠."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때
失神한 듯 쓰러져 있는 남주 그리고 방안에 널린 속옷과 옷가지
들.
"남주야!"
남주는 그대로 있었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괴로와 했다.
남주는 누군가 바늘로 마구 찌르고 있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마음대로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듯 했다.
마치 몸 전체가 굳어진 중풍환자처럼 그리고 온 몸에 여리게
경련이 일었다.
나는 남주에게 다가가 등을 들이댔다.
"남주야 괜잖아. 병원에 가자....금방 나을거야."
남주는 내가 등을 가져가며 자신을 들쳐 업으려 하자, 남주는
나를 힘껏 밀어냈다. 예상외의 남주의 행동에 나는 앞으로 넘어
지고 말았다. 남주의 힘겨운 목소리가 뒤따랐다.
"아니야, 좀 있으면 괜찮아요. 잠깐만 이대로 놔둬요."
"이러는게 아니야.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지."
"내 병은 내가 더 잘알아요. 의사들은 내 병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남주는 병원을 거부했다. 좀 시간이 흘렀다. 아까보다는 나아
진듯 했으나 난 여전히 불안했다. 남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 병을 자신만이 가장 잘 알다니. 도무지 수수
께끼 같은 말이었다.
남주는 마치 물속의 문어를 꺼내 도마위에 놓았을때와 흡사하
게 축 늘어져 있는걸로 봐서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버린 그런 상
탠것 같았다.
"오빠 놀랬죠? 미안해."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좀 전에는 금방 죽어가는 사람처럼 온
몸에 경련이 일었는데?"
"아무일도 아니예요. 나좀 일으켜줘요."
"응."
나는 남주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남주는 내게 몸을 맡기고 있
었다. 남주를 안아 일으켰으나 남주에게선 아무런 저항감도 없었
다. 그저 마네킹 마냥 하는대로 축 늘어져 있었다. 남주에게서는
땀냄새와 화장품냄새가 동시에 풍겨 좀 이상한 냄새가 났다.
"혹시......."
남주의 얼굴엔 묘한 웃음이 돌았다. 그저 신비할 뿐이었다.
"내가 癎疾(간질)이 아닌가 걱정하는 거죠?"
"......."
"그런건 아녜요. 가끔 이럴때가 있어요. 지금은 말할 수 없지
만, 조금씩 좋아지고 있대요. 궁금하겠지만 조금만 참아요. 내
가, 나에 대해서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때가 되면
다 말해 줄께요.
"남주를 방 한쪽 구석에 개어놓은 이부자리에 기대어 앉혔다.
그제서야 난 방안이 온통 초록색이란걸 알아챌 수 있었다. 벽지
도, 커텐도, 유리창마저도 연한 초록빛이었다.
무엇보다도 남주의 발그스레한 뺨이 눈에 빨려 들어오는듯 했
다. 남주는 방바닥에 자신의 속옷이 뒤엉켜 있는걸 봤는지 슬그
머니 주워 뒤로 숨기고 있었다.
남주는 모든게 신비로울 뿐이었다.
"오빠."
"왜?"
"와줘서 고마워요. 오빠가 오지 않았으면 아직도 계속 아팠을
거야. 날 편하게 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어주면 온몸이 바늘로
쑤시는 듯하다가도 어느때 보다도 빨리 회복돼."
"항상 네 곁에 있어줄께."
남주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 방울이 그녀의 발그스레한 볼을 타
고 흘러 내렸다.
"바보같이 울긴."
난 남주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고 이마에 입 맞추어 주었
다.
그 일이 있고난 후 난 의사를 찾아갓다.
의사에게 내가 알고 있는 남주의 증상을 말했더니, 환자를 보
기 전이라 잘 모르지만 정신과 쪽으로 가보는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소아과에 있는 선배의 소개로 정신과 의사를 만나게 되었
다.
그의 말에 따르면 드물게 남주와 같은 증세를 나타냈던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연구된 결과나 병에 대한 자료
가 없기 때문에 확실히는 모르지만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때 나타
나는 정신병의 일종일거라고 설명했다.
"그 충격이란게 어떤거죠?"
"글세, 그게 물리적인 충격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충격을 받는다고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야. 어
쩌면 그 병은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열성 유전자일 수도 있어."
"유전, 만약 그게 유전이라면 치료할 수 있나요?"
"글쎄, 그게 열성인지 우성인지도 모르고 또 유전자의 빈출빈
도나 강도 아무것도 알 수 없기때문에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꼭
고칠 수는 있을걸세"
"있을거라는 추측뿐인가요?"
"현대 의학의 힘을 너무 과대평가 하지는 말게. 현대 의학의
힘으로도 고치지 못하는 병은 부지기수란걸 알아야 하네."
"그러면 고치지 못한다는.......?"
"아니 그렇게 단정지을 문제는 아니라고 보네. 아직 환자의 증
세나 환자의 상태를 모르는 상태이므로 지금은 뭐랄 순 없겠지만
노력해 보겠네. 난 자네의 말을 듣고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
어. 이건 비단 의사로서만의 호기심은 아닐쎄. 나도 자네와 같은
인간으로서 돕고싶은 거네. 내게 환자의 치룔 한번 맡겨주게."
"남주는 병원을 거부해요."
"자네가 한번 잘 말해보게 이건 비단 남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그리고 전세계적인 문젤세 아직 그런 환자의 수나 분포
도는 없지만, 나는 그런 환자가 부지기수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병을 발견하고 치료하는 일은 의사로서의 본분이 아닌가."
공원으로 갔다. 남주와의 약속장소였다. 공원으로 가면서 병원
을 거부하는 남주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해 보았으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엇다.
이미 가을 하늘의 짙은 청색은 저녘노을로 주홍빛 물이 들어
있었다. 둥실둥실 떠있는 작은 구름 덩이들이 옜날 뒷밭에 심었
던 목화밭 같았다.
秋分이 지난지 꽤나 된 가을 날은, 무덥던 여름의 꼬리를 잘라
낸 듯 짧아져 있었다.
공원은 한적하고 조용했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은 어딘선가
꽃향기를 물어왔으나 이미 식어있었다. 공원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은행나무나 단풍나무가 조금씩 물들어 가고 있었고, 일곱시
가 채 안된 시간이었으나 어둑어둑 해지고 있었다. 하나둘 켜지
기 시작한 가로등 불빛이 발아래 쏟아지고 있었다. 공원을 이리
저리 뚫어 만들어 놓은 미로같은 산책로를 한참 지나 약속 장소
에 도착했을때, 벌써 남주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를 망설이다 의사의 이야기를 전했다. 남주의 얼굴빛은 금
새 흑빛이 되어갔다.
나는 곧 후회했다.
"오빠, 오빠가 나를 걱정해 주는건 고마워, 하지만 이번일은
모른척 해 주었으면 좋겠어. 나도 병인줄은 알어. 그리고 난 의
사라는 사람들이 싫어, 무서워, 무섭단 말이야. 그들이 날 보면
갈기갈기 찢어버릴거야. 다리 따로, 팔 따로, 머리, 눈, 코, 귀,
온 몸을 하나하나 떼어내서는 연구합네 하고는 여기저기 칼질이
나 해 보다가는 태워버릴거야. 아니면, 알코올 속에 술 담그듯
담가버릴 거야."
"남주야 아니야, 그냥 몇가지만 물어볼 거야. 그리고 너 한테
는 손도 못대게 내가 지키고 있을께."
"난 꿈을 꿔. 의사들은 내 머리를 잘라서 수술대 위에 올려 놓
고 가죽을 벗기고 내 신체 부위를 하나 하나 떠어 내서
는......."
남주는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지금 당장 그런일을 당하고 있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눈빛은
증오로 가득찬 눈빛이라고나 할까. 남주의 표정이 무섭게 느껴졌
다. 그녀의 얼굴색은 가로등 불빛아래 하얗게 변해 있었다.
남주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남주야."
"오빠 무서워, 무섭단 말이야. 날, 좀 지켜줘, 나를 지켜달란
말이야. 사람들이 무서워. 사람들은 날 죽이려고 해. 그들은 모
두 날 證梧해,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남주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가을의 조용한 저녘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와 남주의 흐느끼는 소리가 가을의 저녘을 온통 울음
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난 남주의 곁으로 다가 앉았다.
남주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남주의 손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
다. 남주의 팔을 끌어당겼다.
남주는 흡사 장날에 어미소를 떠나가는 송아지 마냥 어색한 자
세로 끌려왔다.
남주의 어깨를 감싸고 품에 안았다. 남주의 탄력있는 가슴이
압박되어왔다. 한동안 남주와 아는 서로의 체온을 나누어 가졌
다. 남주의 귓볼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남주의 어색한 자세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남주는 내 가슴을 향해 조금씩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자
세가 완전히 흐트러졌다.
난 팔에 힘을 주어 남주와의 사이를 더욱 밀착시켰다. 결코 남
주를 놓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남주를 정상으로 만들어 주겠
다고 결심했다. 남주는 내게 온 몸을 맡기고 있었다.남주의 손이
내 등뒤로 휘감았다.
"남주야, 사랑해. 난 널 놓치고 싶지 않아."
그 순간이었다. 남주는 고개를 세차게 서너번 내어 젖더니, 나
를 확 떠밀어 버렸다. 엄청난 완력이었다. 갑작스런 남주의 저항
에 놀랐다. 그보다 더 놀란건 남주의 분노에 찬 얼굴이었다.
남주의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헷다. 눈은 증오로 가득했다.
꽉 다문 입술에선 피가 흘러 내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감싸 쥐고는 온몸을 휘휘 내 두르다가 드디어 그녀의 입에선 동
물의 울음소리와 같은 소리가 났다. 흡사 늑대의 울음 소리와 같
은 섬짓한 소리였다.
"으으으으으으"
남주는 괴로와서 미치는 듯 했다. 자신의 머리채를 마구 쥐어
뜯고 있었다. 온통 구겨지다 시피한 그녀의 얼굴은 흉악하리만큼
징그러워 보였다.
난 두려워졌다. 남주가 두렵게 느껴졌다.남주는 화가난 한마리
야생동물처럼 울부짖기도 하고 자신의 몸을 쥐어 뜯기도 했다.
그러다가 남주의 몸이 활모양 뒤로 젖혀지며 넘어졌다. 나는 남
주의 몸을 부축하여 넘어지려는 그녀를 잡았으나 그녀에게 떠밀
려 어이없이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너무나 강한 힘이었다. 사람
의 힘이 아니었다.
처절하리만큼 괴로운 표정. 그녀는 손으로 흙을 파기도 하고
풀을 잡아 뽑기도 하며 뒹굴고 있었다.
나는 달려들었다. 그리고 온 힘을 손바닥에 모아 뺨을 갈겼다.
순간 남주는 失神하듯 쓰러졌다. 좀전의 야생동물 같은 표정은
어디로 가고 마냥 소녀같은 남주는 행복하게 죽은 소녀처럼 누워
있었다.
나는 남주의 상체를 안아 일으켰다. 남주가 살며시 눈을 떴다.
언제 발작이 일어났느냐는 그런 표정이었다.
"오빠"
남주의 표정은 갑자기 밝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남주
의 얼굴엔 긴장과 초조가 어려 있었다. 마치 죄 지은 학생이 들
통나서 혼나기 직전의 표정처럼.
남주는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는 나를 쳐다 보았다. 좀전에
미쳐 날뛰던 남주라고는 믿을 수 없이 차분했다.
"놀랐지?"
"응"
난 그때까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행이야."
"뭐가?"
"이젠 오빠한테 다 얘기해야 될까봐, 앉어 얘기해 줄께."
긴장되기 시작했다. 남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주의 이야기는 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남준 또박또박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남주의 표정을 살피며 그녀의 과거속으로
함께 들어갔다.
재작년의 일이야, 난 사귀는 남자 친구가 있었어. 진호라고 키
도 크고 체격도 좋은 남자였어. 나와 그는 결혼 하기로 손가락
걸고 약속을 했었는데, 어느날 여름이었어. 난 하루종일 진호의
뒤를 따라 다녔어. 그는 날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다가는 아마 10
시가 좀 넘었을 거야. 그는 마지막으로 좋은델 구경시켜 준다고
하고는 택시를 타고 郊外로 빠져 나갔어, 나는 어디로 가는지 궁
금해서 물었는데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 한 20여분 정도 달린후
에 택시에서 내린 나는 진호의 '우리 이제 헤어질때가 된것 닻
다.'는 말에 너무 놀랐어. 진호는 나와 결혼 할 수 없다는 거야.
"진호씨, 분명히 말해봐. 진호씨 입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나
와 결혼 하겠다고 말해 놓고선. 이제와선 결혼할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널 사랑한줄 알았니, 바보야, 난, 너같은 여잔 몇자 실
어다 준다고 해도 싫어."
"너 같은 여자!, 내가 뭐가 어쨌다고 그래 이 병신같은 새끼
야."
"이년이 돼지고 싶어 환장을 했나. 어디다 대들어. 죽어볼래?"
"죽여. 죽여봐, 용기도 없는 새끼가......."
"이년이."
"때렸어, 또 때려봐. 이 개같은 자식아, 네가 뭔데 날 때려."
"이 부모도 없는 고아년이, 어디다 대고 지랄이야."
'고아!'
그말은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어. 그래 난 고아야.
가끔은 내 부모님이 어떤 사람일지 상상을 하기도 하지만 어머니
나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어. 그래서 외롭거나 쓸
쓸할땐 난 내 부모님은 어떤 사람들일까? 상상하길 즐겼어. '아
버지는 훌륭하신 사장님이시구, 어머니는 유명한 모델이었을 거
야' 그렇게 상상하면 기분이 좋았어.
난 진호에게 대들었어.
"네가 뭔데 날 쳐?"
난, 화가나서 심한 욕이란 욕은 다 해대고는 너무 서러워서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큰 소리를 내며 울었어. 한참을 울고 있
는데 진호가 내 어깨를 감싸쥐고 날 일으켜 세웠어. 그리고는 날
안았어.
"미안해, 남주."
"......."
어떻게 그렇게 금방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해 졌는지 몰라. 그
는 날 안고는 숲으로 들어갔어.
"진호씨 이러지마."
"가만히 있어."
"이러지마, 제발 부탁이야."
"널 사랑해, 널 사랑하기 때문이야."
나는 버텼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어. 진호는 날 쓰러
트린뒤 性慾을 채우고는, 옷을 입혀주고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라
고 한 뒤에 도망치듯 떠났어. 난 진호의 말을 믿었어.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 몸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조금 있으면 나타나
리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진호는 나타나지 않았어. 한참
시간이 지났을까. 인기척이 났어. 낮선 남자들의 목소리였어.
"여기 어디라고 했는데, 어디야?"
"진호 이자식이 혼자 놀라구 데리고 튄거 아냐, 그 계집애 반
반한게 먹음직 하게 보이던데."
"아냐,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야. 잘 찾아봐."
"이 썅년이 토깐거 아냐?"
"아가야, 서방님 오셨다. 이리 나오련."
"하하하"
그 사람들의 웃는 소리가 들렸어, 난 어쩔줄 모르고 있었어.
나무뒤에 숨어있다가, 잠시후에 그들에게 잡히고 말았어. 그들은
인간도 아니였어. 나를 놓고 다투기도 하고 하나씩 하나씩 옷을
벗기구 더듬기도 했어. 난 도망칠 수 없었어. 도망치려는 날 그
들의 억센 주먹으로 저지하면서 그들은 날 가지고 놀듯이 여기저
기 손자국도 냈어.
난 눈을 꼭 감아버렸어. 더 이상 그 짐승들의 얼굴을 쳐다보기
도 싫었어.
"야! 이년이 뭘 아는데."
누군가, 덩치 큰 놈이 내 몸위로 덮쳐오는 것 같았어. 난 이를
악물었어. 그의 몰아쉬는 숨소리, 그때 내가 들을 수 있었던건
그의 심장뛰는 소리였어.
"쿵쿵쿵"
그들은 날 더듬으면서 낄낄 거리며 좋다고 웃어댓어. 변태같은
놈들이었어. 하늘이 빙빙도는듯 했어. 귓가에는 그들의 심장소리
만 들려왔고, 난 진호의 얼굴과 그를 향한 저주의 말들만 생각났
어.
'죽여버릴거야. 진호, 너희 변태자식들. 다 죽여버릴거야. 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게 죽여버리겠어.'
그날밤 난 그들에게 여러차례 당했어. 기듯이 길가에까지 나와
서는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을때는 새벽이 다 되어서였어. 이
틀을 꼼짝도 하지 못하고 방안에만 있었어. 치욕스러워 눈물만
나오고 결국엔 죽으려고 동맥을 잘랐지만 의사들은 잘도 날 살려
냈어. 난 내 마음의 분노의 불길이 너무 활활 타오르는걸 알수
있었어. 너무 그 느낌이 강해서 내 자신도 내가 너무 복수심에
젖어있다는걸 느낄 수 있었지만 이미 난 내 자제력의 한계를 넘
어선 후였어.
나는 진호의 집으로 그를 찾아갔어. 내 가방속엔 낚시줄과 과
도를 들고 말이야. 그런데 어이 없게도 진호의 하숙집엔 진호가
없었어.
나는 반년을 그 자식을 죽이겠다고 결심하면서 찾아 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어. 그러는 사이에 난 미쳐가고 있었어. 하지만
증세가 나타나면 기억이 희미해 난 돈을 벌어야 했어. 그동안 모
아둔 돈은 진호에게 모두 사기 당했고 내가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돈도 다 써버린 후였기 때문에 난 호스티스가 되는 것도 마
다않았어. 일단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한달만 한다던
일이 한달 한달 늘어나더니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에서 빠져
나갈 수가 없었어.
그런 생활은 1년쯤 했을때 올 여름 난 손님과 팔장을 끼고 갖
은 아양을 다 떨며 신흥 아파트를 지나 강향호텔 쪽으로 가고 잇
었어. 그 남자는 30대 후반의 체격이 큰 남자였어.
"강양은 불빛 아래서 보니 더 예쁘군."
"아이, 자기는 농담도..."
"농담이 아냐."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를 끌어안고 호텔 뒤의 야산으로
들어갔어. 아마 싸구려 여자를 호텔까지 데려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 자식은 다짜고자 들이덤벼 옷을 벗기기 시작했
어. 내 저항쯤은 가볍게 무시한 채로, 이런 자식들에겐 저항해
봐야 나만 손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반항은 하지 않
았어. 그는 나를 끌어 안았고, 난 작은 키 때문에 그의 가슴에
얼굴이 묻혀버렸어. 순간 난 거대한 심장 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
어.
"쿵쿵쿵"
가쁜 숨소리와 내 고막 속에서 마구 울려 퍼지는 심장소리. 가
슴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불끈 솟아 오름을 느낄 수 있었어.
순간 그날밤의 기억들이 영화장면 반복되듯이 생생하게 되살아났
어. 순간 나는 당한 狂氣를 느꼈어. 표범의 발처럼 강하게 변해
버린 손으로 그의 옷을 찝어버렸어.. 그의 가슴에서 새빨간 선혈
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어. 난 달려 들었고 그는 뒤로 주춤 물
러나려 했으나 나의 손은 어느새 그의 목을 힘껏 잡고 있었어.
나는 한마리 성난 표범처럼 그의 가슴을 물어 뜯었어. 얼굴위로
뜨거운 것이 튀어 찝질한 느낌이 느껴졌지만 난 멈출 수 없었어.
이미 내 짓이 아니었어. 나를 지배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나는, 나
의 통제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는 악마처럼 나의 몸을 지배하여
그의 온 몸을 물어뜯게 했어.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때 나는 미쳐
날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너무 놀라서 기절할 뻔 햇어.
정신차린 내 손에는 물어 뜯다 남은 심장 조각이 들려 있었어.
아직도 고동치고 있는 끈질긴 생명.......
그 남자는 죽어 있었고 그의 몸은 걸레가 되어 있었어.
살점은 물어 뜯겨 여기저기 튀어 있었고 뽑힌 머리카락은 사방
에 흩어져 있었어. 시커먼 핏덩이가 시체옆에 듬북 쏟아져 있고.
나의 몬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어.
어떤 사냥개도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을 거야.
난 어떻게 도망을 쳤는지도 모르게 도망쳐 버렸어.
"아니야, 거짓말이지. 나 놀리려구 지어낸 얘기지? 네가 그럴
리가 없어."
난 내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남주의 얼굴은 온통
피빛이었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얼룩져 있었다.
"......."
"남주야 거짓말이지. 나 놀리려구 지어낸 말이지?"
"얘기 마저 들어."
남주의 얼굴은 냉담했다. 무서우리만큼.
남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남주의 표정과 함께
나는 그 사건 속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는듯 했다.
나는 그 사건이 있은후에 밤마다 꿈을 꾸곤 했어. 밤마다 심장
을 먹어치우는 꿈을 꿨어. 그럴때마다 온몸을 바늘로 쑤셔대듯이
따가왔고 괴로왔어. 너무도 두려워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
어.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 때문에 더 두려웠어.
그러던 한두달이 지난 어느날이었어. 오빠를 만나기로 했던 전
전날 이었을거야. 나는 우리가게 단골 손님을 살해하게 됐어. 내
가 제 정신이 돌아왔을때. 그 남자의 시체를 보게 됐어. 왼쪽 귀
밑에서부터 오른쪽 턱 밑까지 쭉 찢어져서 덜렁거리는 살점, 구
멍난 가슴, 다부러져 흩어진 갈비뼈, 여기저기 튀어 나오고 끊긴
창자들, 온몸이 씹히고 씹혀 더이상 씹힐곳이 없는 완전히 걸레
가 된.......
남주는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하겠다는듯 머리를 감싸쥐곤 온 몸
을 떨었다. 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事件 현장 그리고 그
앞에서 屍體를 물어뜯는 미치광이 남주.
남주는 그렇게 한참을 괴로운듯 다음말을 인지 못했다. 좀 시
간이 지났을때 조금 진정된 듯한 남주를 볼 수 있었다. 남주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태민씨에게 연락을 받고 나가지 않으려고 했어. 난 또다른 사
람을 살해하게 될까봐 겁이났어. 난 아무도 사귀지 않겠다고 결
심을 했어. 그런데 오빠를 만나던날 이 요망한 계집의 가슴이 고
동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 안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오빠를
계속 만나왔어, 오빠를 사랑함을 느꼈어. 하지만 난 안돼, 오빠
를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할 자격도 없는 살인자니까. 그래서 계
속 속이려고 했어. 자연스럽게 헤어질 때까지.
그러다가 아까 오빠가 나를 안았을때 난 망설였어. 난 오빠를
해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난 남주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주의 흥분된 표정
과 겁먹은 눈동자가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남주야, 진정해. 난 네 말은 믿지 않아. 너처럼 착한 애가 그
럴리가 없어."
"오빠야,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집에가서 좀 쉬면 나아질 거야. 넌 소설가가 잘 어울려."
난 내 목소리의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한채 말하고 있었다.남
주를 부축하여 집까지 데리고 갔다. 날씨는 땀흘릴 날씨가 아니
었지만 남주의 온몸은 땀으로 온통 젖어있었다. 땀냄새와 향수
냄새가 코 끝에서 알싸하게 느껴졌다.
"잘자."
"......."
애써 마음을 진전시킨 다음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진 나는 잠
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남주의 집에 전화를 했으나 남주는 집에 없
었다.
난 태민에게 알릴 필요를 느꼈다. 태민은 오전에 바쁜일이 있
다며 오후에 만나자고 했다. 늘 만나던 다방에서 5시가 되기 전
부터 초조한 마음으로 태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시가 좀 넘어서야 태민은 가을 잠바라고 보기엔 너무 두툼
한 잠바 옷깃을 잔뜩 세운채 신문을 접어들고 나타났다.
"웬일이유, 형이 먼저 만나자고 하고?"
녀석은 추운듯한 표정으로 나타났고 난 태연해 지려고 노력했
다.
"어디 아프냐?"
"감기가 들었는지 추워 죽겠수, 아휴 추워."
난 태민에게 차근차근 남주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 줬다. 태
민은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남주가, 남주가 그럴 수가... 형 이 일을 어쩌우?"
"나도 모르겠어."
"다른 사람에겐 얘기 했수?"
"얘길 어떻게 하냐."
"아무튼 잘했수 이건 보통일이 아니유. 당분간 우리 둘만 알고
있는 비밀로 해두는게 좋겠수.그리고 남주는 어떻하든 우리가 보
호 해야 할텐데 무슨 수가 없겠수?"
"글쎄 생각해 봐도 묘안이 없다."
태민은 나보다 더 당황해서 어쩔줄을 몰랐다. 그 성미를 참지
못해 뜨거운 커피를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마시기도 하고
주먹을 줬다 폈다. 하다가는 안절부절 신문을 훽훽 소리가 나게
넘기기두 했다.
난 차분한 남주보다 태민이 일을 저지를것 같았다.
"형"
태민이 다급히 외치는 소리에 태민을 쳐다보니 얼빠진 놈처럼
신문을 넘기며 입은 반쯤 벌리고 시선은 정문을 향하고 있었다.
"왜 그래?"
"못봤수?"
"뭘?"
"남주, 피투성이가 된 남주가, 저기 서 있었는데...."
난 고개를 돌려 정분을 바라 보았으나 남주는 커녕 사람은 전
혀 보이지 않았다. 난 고개를 돌리다가 그만 '앗!'하고 소릴 지
르고 말았다.
태민이 앞뒤로 넘기고 있는 석간 신분엔 컬러판 사진으로 피투
성이가 된 죽은 남주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미모의 여인 투신자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