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밀항
(114/114)
114화 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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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밀항
2023.09.03.
도준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정은 생각이 많았다. 원한다면 출국일과 비행 일정을 말해주겠다고 했지만, 도준은 끝끝내 묻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후회하려고…….
어쩐지 도준만 보면 멍청하다며 욕을 하는 정혁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아파트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쇼핑한 물건과 시우를 꺼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집으로 향할 때였다. 시우가 갑자기 다정의 손을 팩 뿌리쳤다.
“시우야!”
다정이 놀라 소리쳐 부르지만, 시우는 경비실을 향해 곧장 달려갔다. 그러곤 한쪽 벽면을 향해 꾸뻑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예쁜 할머니이! 안녕하세요!”
그제야 경비실 건물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성자였다. 다정과 눈이 마주치자 멋쩍어하던 성자가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 내가 그렇게 예쁘니?”
“네! 할머니 예뻐요!”
시우가 쌍 엄지를 추켜세웠다. 아가씨든 할머니든 예쁘다는데 기분 나쁠 여자는 없었다.
“어린 게 립서비스할 줄도 알고. 그럼 말해봐. 네 엄마가 예쁘니? 아니면 내가 예쁘니?”
“어…….”
시우가 도르르 눈동자를 반원으로 굴렸다. 성자의 눈이 가늘어진다. 좋다 말았다.
“얘, 이럴 땐 거짓말이라도 듣기 좋은 말 해 주는 거야.”
“거짓말하면 나쁜 어린이!”
“쪼끄만 게 대쪽 같은 것 좀 봐. 얘, 너 그렇게 빡빡하면 못 써. 사람이 융통성도 있고 그래야지.”
어느새 시우의 곁으로 다가선 다정이 성자의 얼굴을 살폈다.
“안녕하셨어요. 그동안 별일 없으셨죠?”
“별일 있을 게 뭐니?”
성자가 쭈뼛거렸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아니, 그냥 애기 얼굴도 보고 할 얘기도 있고.”
“할 얘기요? 그럼 잠시 올라가실래요?”
다정이 권하자 성자가 아서라 손을 저었다.
“어휴, 괜히 우리 아들한테 들키면 나만 또 잡아먹을 듯이 굴 텐데. 됐다 얘.”
성자가 극구 사양한 바람에 결국 다정은 그녀와 함께 놀이터 한쪽 벤치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엄마아!”
“시우야, 조심해.”
저 멀리서 미끄럼틀을 타는 시우를 보며 다정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모습을 성자가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예뻐라. 어쩜 우리 정혁이 저맘때랑 똑같은지.”
“차정혁 씨 다섯 살 때 얼굴을 아세요? 듣기론 생후 3개월 때 집을 나가셨다고 들었는데…….”
거침없이 던지는 질문에 성자가 얄밉다는 듯이 눈을 흘긴다.
“얘, 넌 다 마음에 안 드는데, 엄청 예의 바른 척하면서 이렇게 니 할 말은 다 하는 게 제일 마음에 안 들어.”
“죄송해요. 시우랑 닮았다고 하니까 궁금해서…….”
성자는 훅 한숨을 쉬며 다시 시우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게 다 노인네 때문이야. 그 노인네 말만 들으면 내가 천하에 죽일 년이지. 애한테 애미 험담을 어떻게 늘어놨는지,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애미를 상종 못할 인간 취급을 하겠어.”
씩씩거리던 성자가 이내 분을 가라앉히더니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버린 건 버린 거지. 내 손으로 못 키웠는데, 애미가 무슨 할 말이 있어.”
그때가 언제더라. 불현듯 오래된 기억들이 스멀스멀 밀려 나왔다.
연탄 한 장 쌓아두고 땔 형편도 안 되는데, 하필 그 겨울은 왜 그리도 춥던지.
출산 후 잉어 한 마리 고아 먹진 못할망정, 한데서 몸조리를 하느라 골병이 다 들었다.
“그때 생긴 산후풍으로 서른도 되기 전부터 뼈마디가 안 시린 데가 없는 거야.”
성자가 손목과 무릎을 매만졌다.
엄마가 된 건 성자가 막 스물을 넘긴 때였다. 그런데 애 아버지라고 하나 있는 양반은 매일 시나 쓴답시고 처자식은 나 몰라라.
며칠 뒤면 아기 돌인데, 돌잔치는커녕 돌 반지 하나 맞춰 줄 형편이 못 되었다.
그땐 성자도 나이가 어려 폭폭한 생활에 진절머리가 났다. 아이까지 낳았는데 여전히 살뜰하지 않은 남편도 불만스러웠다.
“정혁 아부지도 내가 좋아서 따라다녔거든. 처음엔 나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살다 보니 그게 아닌 거야. 외롭더라고. 그게 쌓이고 쌓이니까 그 양반하고 눈만 마주치면 싸우고 싶어 시비를 걸고 안달을 하는 거야.”
그러던 어느 날 성자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러다가 내 명에 못 살거나 미쳐 버리겠구나. 숨이 막혀서 딱 죽지 싶었다.
그래서 그날 밤 아기를 놓고 집을 나섰다. 잠깐 바람만 쐬고 돌아올 요량이었다. 그런데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집으로 가는 길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땐 지금처럼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는 시절도 아니고, 나도 어려서 길을 잃으니까 막막하더라고. 한겨울 옷도 대충 걸치고 밤길을 걷는데 수상쩍어 보일 만하지.”
마침 지나가던 순찰차가 성자를 태워 파출소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집이 어디냐 묻는데, 이상하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우리 아기한테 데려다 달라는 말을 하려는데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혼인신고를 했나, 아들 출생신고를 했나. 주민등록이 친정집 주소로 되어 있는데 경찰들이 데리고 가도 아무도 없지, 친정아버지는 노름꾼이라 허구한 날 빚쟁이한테 쫓기지.
집 나간 딸일랑 나 몰라라 자기만 야반도주를 해 버렸다.
“어떡해? 오갈 데라곤 애 아버지랑 애가 기다리는 단칸방뿐인데, 그땐 도무지 거기로 데려다 달라는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오는 거야.”
복지원과 요양병원을 전전하며 성자는 나중에야 자신의 병명이 우울증과 실어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병원에 입원해 일 년이나 지나 퇴원을 했는데, 아들이 보고 싶어 찾아갔지만, 도저히 발을 들일 용기는 나지 않아 그저 먼발치에서만 바라보았었다.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몸이 아프셨다고 왜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성자의 사연이 너무 안타까워서 다정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면 뭐 해? 그 말을 한다고 뭐 달라지나? 지 할머니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부잔데, 그런 할머니 내버려 두고 애를 데리고 온다고 해? 미쳤지.”
성자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옛날 기억을 들추자 속만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구질구질한 얘기 더 해서 뭐 해. 그나저나 너 고생했다는 말은 들었다. 경찰서까지 가서 욕봤다지?”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염치가 없다. 평생 어디 가서 염치 챙겨본 적은 없지만, 내가 사람을 너무 쉽게 믿어서 홀딱 넘어간 거지.”
“네? 넘어가요? 누구한테요?”
영문 모를 말에 다정은 눈알만 굴렸다.
“아, 아니다. 어쨌거나 내가 아는 게 좀 있어. 재판 때 다 증언하기로 했으니까 알고나 있어.”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성자가 시우를 불렀다. 시우가 미끄럼틀을 미끄러져 내려오자 성자가 손가방에서 만 원짜리 석 장을 꺼내 시우의 고사리손에 꼭 쥐여 주며 말했다.
“얘, 까까 사 먹어.”
시우가 눈동자를 핑글 굴린다. 다정이 가로막았다.
“그러지 마세요. 애 버릇 나빠져요.”
“버릇 좀 나빠지면 어떠니. 애가 애다워야지. 그럼 난 그만 간다. 행여나 내 아들 보면 나 왔었단 말은 하지도 말어.”
성자는 시우에게도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얘, 너도 네 아빠 오거들랑 나 봤다는 말은 하지 마.”
다정은 달아나듯 멀어지는 성자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 *
“말도 안 돼…… 곧 기소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방금 뜬 속보를 보며 다정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증거 확실해서 빠져나가기 쉽지 않았을 텐데,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라고 했어.”
예상 밖의 상황이었던지 정혁도 정색했다.
『우울증과 분노조절장애, 편집증, 불면증 등등의 심신미약을 이유로 오현아 쪽에서 정신감정 의뢰를 했습니다.』
스피커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변호사의 설명이었다.
『또 법원에 제출한 구속적부심 청구가 받아들여져서 검찰에서도 불구속 기소로 전환했습니다.』
“불구속? 말도 안 돼…….”
정혁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일단은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다고 법원에서 판단했으니 공판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정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위험한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밖을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요?”
『불구속 상태라도 활동이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치료를 목적으로 의료기관에 통원하는 정도만 허용되고 있습니다.』
다정은 불안한 얼굴로 침음했다. 오현아가 다시금 자신과 시우에게 무슨 짓을 할 것 같아 걱정이었다.
그녀의 변호사 역시 다정이 걱정하는 부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시우 군에겐 접근금지 가처분 명령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그뿐 아니라 학부모를 대표해 학부모회 회장과 임원들이 오현아 씨의 유치원 접근을 금지해 달라는 신청서를 법원에 제출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정혁은 떨떠름하게 표정을 굳혔다. 정말 안심해도 되는 걸까.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하긴, 한송 정도면 사법부에 그 정도 위압을 가할 정도의 힘은 있을 테다. 당장 구치소에 갇힌다니 그 꼴을 못 봐 모든 수단을 강구했을 거다.
뭐 상관없다. 구치소든 교도소든 정신병원이든, 유시우에게 헛짓거리를 하지 못하도록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니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교사, 교사로 인한 과실치상, 미필적 고의에 의한 아동 상해, 폭행, 계획적인 증거 조작과 위증 교사, 그리고 무고죄.
제아무리 초범이라도 이 정도 죄목이면 실형이 확정되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다.
* * *
구치소로 이감되었던 현아가 풀려났다. 현아는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채 구치소를 나섰다.
구치소 앞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선영은 딸을 보자마자 냉큼 달려가 현아를 품에 안았다. 그러곤 표독스레 소리쳤다.
“뭐 해? 기자들 막앗!”
표 비서와 수행원들이 기자를 밀쳤다.
“오현아 씨. 텐트 사고 피해자와 상해를 입은 피해 아동에게 한마디 해 주시죠.”
“자자, 궁금한 점이 있으면 그룹 홍보부로 공문 띄우세요. 정식으로 절차 밟아 그룹 차원에서 답변할 겁니다.”
“오현아 씨. 전 축구 국가대표 김영준 선수가 오현아 씨한테 사주를 받아 텐트를 무너뜨렸다고 자수했는데요, 두 사람 정확히 어떤 사이입니까? 단순히 유치원 원장과 체육 교사 사이가 맞습니까?”
“비켜요, 비키세요들!”
“오현아 씨. 유치원 원아에게 자신이 먹던 약물을 먹여 잠재운 뒤 상해를 입혔습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죠? 이런 일을 저지른 게 이번이 처음이 맞습니까?”
“이번 사건을 발단으로 과거에 학폭을 당한 피해자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찰칵찰칵, 플래시 소리가 연신 터져나갔다. 현아는 검은색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떠밀리듯 대기 중인 검은 세단에 몸을 실었다.
차에 올라타고서도 취재 열기에 파묻힌 차는 한참을 거북이처럼 느리게 움직여야 했다.
“세상에, 우리 딸.”
겨우 취재진을 따돌리고 달리는 차 안에서 선영은 딸의 후드를 벗기고 창백한 뺨을 감쌌다. 못 본 사이 얼굴이 반쪽이었다.
“오현아. 괜찮아?”
현아는 말이 없었다. 구치소에 갇힌 며칠 동안 극심한 충동들이 공포가 되어 그녀를 괴롭혔다.
현아는 불현듯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 엄마! 나 왜 풀어 줬어? 아빠가 나 병원에 가두래? 그래서 풀어 주는 거야?”
“아니야, 현아야. 아니야!”
선영은 가여운 딸을 품에 꼭 안았다.
“현아야, 병원은 두 번 다시 안 가도 돼. 엄마가 약속해.”
현아를 태우고 도착한 곳은 한 대학병원의 특실이었다. 입원 수속은 벌써 되어 있고, 기자들을 피해 입원실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선영은 현아를 내리지 못하게 했다. 대신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내릴 준비를 한다. 그녀가 후드를 깊게 덮어쓴다. 처음 보는 여자였는데, 현아가 입고 있는 후드와 같은 옷이었다.
“현아야 엄마 말 잘 들어. 엄마는 너 감옥에 갇히는 꼴 못 봐. 병원에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야.”
“엄마…….”
“중국으로 가. 엄마가 다 준비해 놨어.”
“나 출국금지 아니야?”
선영은 말없이 자신의 핸드백에서 여권과 배표를 꺼내 현아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펼치자 여권에 새겨진 이름은 배상화, 한데 사진은 제 얼굴이 맞았다. 위조여권이었다.
“3시간 뒤에 출항이야. 여권은 믿을 만한 루트로 구한 거라 절대 들킬 일 없어. 나머지는 표 비서가 다 준비해서 데려다줄 거야.”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나더러 밀항을 하란 말이야?”
“일단 중국으로 가. 우리 쪽 사람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도착하면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숨어 있어. 여기 일 잠잠해지면 엄마가 다른 나라로 갈 수 있게 준비해서 따라갈 테니까. 알겠지?”
현아는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시, 싫어. 나 혼자 가라고? 아하앙, 싫어. 엄마도 같이 가. 나 무섭단 말이야.”
“오현아. 너 감옥 가고 싶어?”
현아가 오열하며 도리질을 쳤다.
“그럼 병원에 갇힐래?!”
“싫어허어엉! 무슨 엄마가 그런 말을 해에!”
“그럼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 너 여기 있으면 병원이든 감빵이든 둘 중 하나야!”
“엄마아하앙!”
“표 비서, 배 시간 늦지 않게 애 잘 챙겨 보내.”
“걱정 마십시오, 이사장님.”
운전석에서 표 비서가 머리를 조아렸다. 선영은 흐느끼는 딸의 뺨을 애절하게 쓰다듬고는 차에서 내렸다. 조수석에서 현아와 같은 복장을 한 여자도 따라 내렸다.
현아는 유리창 뒤에 숨어 선영와 자신의 대역이 병원 입구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을 보며 흐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