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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라면 먹고 가라고! (113/114)


113화 라면 먹고 가라고!
2023.08.31.


진동하는 휴대폰 액정 위로 발신자가 떠올랐다. 정혁은 손을 들어 잠시 회의를 중단시킨 뒤 휴대폰을 귓가에 붙였다.


“유다정?”

『아빠!』

지저귀는 새처럼 짹, 하고 울리는 맑고 낭랑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입꼬리가 절로 미끄러졌다.

간혹 인간더러 비타민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던데, 바로 이런 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잠깐만, 하고 편안한 어조로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온화했다.

회의실 안에 있는 모두가 그런 그를 낯설어하고 있을 무렵 그가 밀착하고 있던 휴대폰을 귀에서 잠시 떨어트렸다.


“잠깐 다들 쉬었다가 해요.”

그러며 그가 손을 휘 내젓는다. 그러니까 통화가 길어질 예정이니, 지금은 당장 다들 눈앞에서 사라지란 거다.

뭐 덕분에 한창 무거운 주제로 진행되던 회의에도 휴식이 주어졌다.


“유시우 밥 먹었어?”

『어, 네! 볶음밥!』

“또 볶음밥?”

정혁이 잔뜩 찌푸린 눈썹을 긁적였다. 제 아들이 어째서 자장면만 보면 환장을 하는지 이젠 알 것도 같았다.


『어…… 아빠! 있잖아요. 시우가 할 말 있어서 전화했어요!』

“해.”

『있잖아요. 돌고래는 바다에 살잖아요.』

“그치, 돌고래는 바다에 살지.”

『근데! 어, 상상동에도 살아요.』

“상상동?”

말뜻을 몰라 의아해하자 옆에 있는 여자가 ‘삼성동’이라고 속삭여 정정했다. 엄마의 귀띔에 시우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어! 아니, 상선동!』

정혁은 아들이 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를 대충 이해했다.


“그래. 생각해 보니까 거기서도 살겠네.”

선선히 긍정한 정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통유리창 밖으로 비치는 건물을 넓게 훑었다. 생각해 보니, 바로 저곳에 도심 속 대형 수족관이 있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이건가 보다.


“유시우. 주말에 상상동으로 돌고래 보러 갈까?”

『우와! 진짜?』

듣고 싶은 대답을 지능적으로 교묘하게 유도해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참 해맑다.


『우와! 신난다!』

유시우가 연달아 환호성을 질렀다. 굳이 보지 않더라도 껑충거리고 있는 모습이 다 그려졌다. 그때였다. 아이의 환호성에 누군가의 속삭임이 뒤섞여 흘렀다.


『시우야, 아빠 이따가 맛있는 거 사 오세요, 해. 응?』

“유다정. 다 들려.”

순간 정적이 깔렸다. 이윽고 어색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하하, 시우한테 한 말인데…… 다 들렸나 보다.』

“나 들으라고 한 말 아니고?”

『그건 아닌데…… 뭐, 들었으면 할 수 없고요.』

정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요? 내가 무슨요.』

“안 하던 짓 하면 일찍 죽는대. 꿍꿍이가 없는데 유시우한테 그런 걸 왜 시켜?”

『어머머? 시키긴 누가요? 신소리 그만하고 끊어요!』

다정이 펄쩍 뛰며 정색한다. 너무 진지한 것조차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유다정. 오빠 보고 싶어요, 해 봐.”

그러자 휴대폰 너머에서 경악의 비명이 터져 나온다. 꺅, 하는 비명에서 절대 말하지 않으리란 다짐이 고스란히 읽혔다. 대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소리쳤다.


『옵뽜! 보고 싶어요!』

유시우였다. 정혁이 목을 울려 킥, 하고 웃었다.


“유시우. 돌고래가 좋아 내가 좋아?”

『어, 돌고래. 아, 아니, 아빠!』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들킨 시우. 재빨리 말을 바꿔 보지만 이미 때는 늦은 듯했다.


  

* * *

문이 열리자 정혁이 한 손 가득 들고 온 쇼핑백을 흔들어 보인다.


“세상에 이게 다 뭐예요?”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했더니 아예 저녁을 사 왔다. 일식집에서 코스를 그대로 포장해 온 모양인데, 다정이 좋아하는 모듬 초밥과 시우가 먹을 만한 것들도 잔뜩 있었다.

그리고 그의 깁스된 팔에는 커다란 봉제 인형도 끼어 있었다. 봉제 인형의 정체가 돌고래라는 걸 알아챈 시우는 입이 쩍 벌어졌다.

밥을 먹기 무섭게 시우는 거실에서 돌고래 인형을 타고 껑충거렸다.

워낙 얌전한 애라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최근엔 어찌나 활발한지 층간 소음 방지용 매트를 깔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이 되었다.


“엄마! 시우 돌고래예요!”

꺄르륵 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뒤집히는데도 신이 나 웃기 바빴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정혁이 문득 의문을 표했다.


“유시우는 누굴 닮아서 저렇게 변덕스러운지 몰라.”

어머, 하고 다정이 정색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지금 나 닮아서 변덕스럽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한 적 없어. 그냥 변덕스럽다고 했지.”

“애들이 관심사가 쉽게 변하는 건 당연한 거죠. 이제 고작 다섯 살인데 이 세상에 신기하고 흥미로운 게 얼마나 많겠어요.”

정혁은 뚱한 얼굴로 시우를 보았다. 언젠 장래 희망이 호랑이라더니, 공룡한테 혹했다가 이젠 돌고래까지 라이벌이다.

투덕거리기도 잠시 새침하게 굴던 다정이 뭔가를 떠올린다. 그러고는 화색 띤 얼굴로 그의 엉덩이를 팡팡 때렸다.


“어어? 이 여자가 어딜 만져?”

정혁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만진 게 아니라 예뻐해 주는 거잖아요. 기특해서.”

무슨 소리냐는 듯 그의 고개가 삐딱해진다.


“엄마 종합검진 때문에 입원했다는 연락 받았어요. 자꾸 이렇게 이쁜 짓만 해서 어쩌지?”

“어쩌긴. 예쁘면 예뻐해 주면 되지.”

이번엔 정혁이 알아서 엉덩이를 내밀었다. 다정은 장단 맞춰 그의 엉덩이를 두어 번 더 팡팡 때려 주었다.


“어떻게 그런 예쁜 생각을 했어요?”

“사위 사랑은 장모니까. 오래오래 사랑받으려면 어떡해? 해야지.”

“꽃분 씨도 같은 병실에 입원했던데. 적적하실까 봐 일부러 그렇게 한 거예요?”

“그건 홍준호가. 나처럼 이쁨받고 싶은가 봐. 자꾸 나 따라 해.”

어쩜 이렇게나 애들 같은지. 다정은 찌푸려 웃었다.

시우가 잠든 걸 본 뒤에야 정혁이 재킷을 들고 일어났다. 조금 당황한 다정이 얼른 그를 뒤쫓았다.


“가, 가려고요?”

“가야지. 일하다가 미뤄두고 왔어.”

“오늘 꼭 다 해야 해요?”

“그건 아니지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가 신조라.”

정혁이 고개를 숙여 다정의 뺨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냉정하게 돌아서는 그를 다정이 총총 따라나섰다.

구두를 꿰어신던 정혁의 눈길이 아래로 향한다. 소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손이 보였고, 슬리퍼 발끝은 세운 채로 바닥을 콕콕 내리찍고 있었다.


“왜?”

그가 묻자 다정이 가까스로 입을 여는데 목소리가 모깃소리처럼 작았다.


“저기 ……먹고 갈래요?”

정혁은 청각을 곤두세웠다.


“뭐라고? 잘 안 들려.”

“……고 가라고요.”

“응?”

다정의 아랫입술이 꾹 깨물렸다. 분명 알아들었으면서 이런 식으로 놀리더라.


“라면! 라면 먹고 가라고!”

정혁은 피식 웃었다.


“배불러.”

다정이 갈고리 눈을 치뜨고 그를 노려봤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 자고 갔으면 좋겠다는 말이잖아요! 이젠 필요 없으니까 가 버려요!”

소리치고 팩 돌아서는데 외팔이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진작 그렇게 말을 하지. 응? 화났어?”

“아뇨. 내가 왜요?”

아니라고 하면서 찬바람이 쌩 불었다. 이렇게 나오면 또 하는 수 없다. 그가 다정의 팔을 붙잡아 제 목에 감았다.


“매달려 봐.”

언제 토라졌냐며 다정이 깡총 뛰어 그의 목에 매달렸다. 두 다리는 매미처럼 그의 허리에 감아 고정했다.

그가 들고 있던 재킷을 소파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러고는 고개를 기울이더니 다정의 코끝에 자신의 코를 비벼온다.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아 다정은 콧등을 찌푸렸다. 살짝씩 입술도 스치지만 조급하게 서두르는 사람은 없었다.


“나 정말 가 버려?”

“치, 멍청이.”

얄밉다는 듯이 눈을 흘기는 다정의 얼굴이 붉은 이유가 조명 빛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 * *



“3D로 구현한 입체 조감도를 보내드렸어요. 보완할 점이나 요구사항이 있다면 확인해 보시고 메일로 첨부해 주세요. 모형 제작할 때 반영하겠습니다.”

업무 통화를 마친 뒤 다정은 시우와 함께 외출을 나섰다. 아들과 함께 도착한 곳은 경기도 외곽에 있는 창고형 대형 매장이었는데, 문구와 완구, 각종 공작 재료나 자재를 취급하는 곳이었다.

재학시절부터 한빛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도 건축 모형이나 디오라마 제작에 필요한 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종종 들르는 곳이기도 했다.


“시우는 갖고 싶은 거 딱 하나만 고르는 거예요.”

“어…….”

완구 코너 앞에서 시우는 거의 넋을 잃었다.


“시우야. 여기서만 구경하는 거예요. 엄마 이쪽에 있을 테니까 절대 밖으로 나가면 안 돼요. 알았죠?”

“네에!”

시우가 장난감 구경을 하는 동안 다정은 필요한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아 나갔다. 필요한 물품을 구입한 뒤 주문 제작이 필요한 것들은 매장 직원에게 따로 부탁을 해 두었다.

쇼핑을 하는 데 40여 분가량을 소요한 뒤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매장을 나섰다. 그런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밀려든다.


“어머나! 우리 시우.”

미쳤다. 잊어버릴 걸 잊어버려야지. 다정은 얼른 돌아서서 완구 코너까지 종종걸음쳤다. 하지만 시우가 보이지 않는다.


“얘가 어딜 간 거야?”

사방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뒤쪽에서 엄마! 하고 부르는 시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낯익은 남자가 제 아들의 손을 잡고 그곳에 서 있었다.

* * *

근처 야외 카페로 자리를 옮긴 다정은 도준의 야윈 얼굴을 한참이나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선배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시우가 먼저 알아봤더라고.”

제 이름이 나오자 적당히 식은 핫초코를 홀짝거리던 시우가 눈알을 굴렸다.


“저…… 선배. 나 얼마 전에 우연히 수경 씨를 만났어요.”

다정은 망설였지만, 왠지 쫓기는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도준이 이대로 수경을 영영 놓쳐 버릴까 봐 불안했다.


“아, 그랬구나…….”

도준은 애써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선배. 수경 씨 좋은 사람이에요.”

“알아. 좋은 사람인 거.”

“물론 선배도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이고요.”

미세하게 흔들리는 도준의 눈빛이 다정에게 붙들렸다. 다정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번졌다.


“나 선배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선배는 날 향한 마음이 특별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어요?”

도준 눈빛이 다시 한번 들썩였다.


“난 최근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사랑도 습관이구나 하는 생각요.”

“…….”

도준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밍밍한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습관? 사랑이라는 숭고한 감정이 한낱 무의식중에 행하는 습관과 같을 수 있을까.


“워낙 변덕스러워서 쉽게 변하는 게 사랑이라고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처음 본 길을 따라가는 게 익숙할 수도 있잖아요.”

“…….”

“하지만요 선배. 익숙한 것과 사랑은 달라요. 익숙해서 편한 길이 사랑이었다면 나도 분명 선배 프러포즈를 받아들였을 거예요. 그러니까 선배도 끌리는 길을 가요. 눈길이 향하고 발길이 이끌리는 길로 가세요. 그게 맞아요.”

“넌 어때? 이끌리는 길로 가니까 행복하니?”

다정은 활짝 웃었다.


“네, 아주 많이요.”

“편안해 보인다.”

도준의 얼굴에 스민 웃음이 약간 서글펐다.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론 다정이 행복하다니 또 마냥 좋기만 하다.


“그 사람이랑, 결혼할 거니?”

다정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게나 행복하다면서 왜? 아, 참…….”

추억의 밤 행사에 동문들 앞에서 자신이 비혼주의라고 했던 다정의 말이 문득 도준의 뇌리를 스쳤다.


“그 말 진짜구나. 비혼주의라는 거.”

“네. 근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예전이라면 결혼 같은 거 절대 안 한다고 했을 텐데, 이제는 그렇게 단호하게 말할 자신이 없다는 거예요.”

도준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철옹성 같던 고집을 기어이 꺾어 놓은 남자도 결국 그였다.

그래. 뭐든 변하지 않는 것보단 변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거니까.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말없이 서로의 앞에 놓인 커피잔만 바라보다가 다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 이 시점에 이런 말 전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수경 씨 곧 미국 들어간대요. 시우 아빠랑 같이 하는 일 때문에 들어가는 건데 거기 아예 정착해서 다신 안 올 수도 있다나 봐요.”

도준은 이번에도 덤덤했다.


“이제 나랑 상관없는 사람인데 그런 말은 뭐 하러 해?”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

“선배가 절대 후회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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